나무처럼 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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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무처럼 댓글 0건 조회 771회 작성일 09-02-21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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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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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가뭄 끝의 단비가 반갑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식물들에게도 더없이 반가울 것이다. 예전 같으면 조금은 먼 출근길이 힘겨울 것도, 성급하게 올라온 꽃송이들이 행여 다칠 것도 염려됐겠으나 서두르다 어려움을 겪어낸 나무나 풀들은 그 곁에서 숨 쉬고 있던 새로운 희망의 눈(芽·아)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마음 아파도 참을 수 있고, 개인적인 불편함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희망의 새봄을 준비하고 있을 이 산야의 새싹들에게도 그야말로 단비일 것이다. 이제 산불에 대비하느라 주말을 포기해온 나와 같은 산림공무원들도 한시름 덜게 됐다.

봄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숲은 말 그대로 약동하고 있다. 언 땅이 녹고 봄비에 촉촉해진 땅에서는 온갖 생명이 기지개를 켠다. 나뭇가지에 잎이 나기 훨씬 전부터 그 생명의 움직임은 시작된다. 나무줄기엔 수액이 돌고, 겨우내 숨죽이던 식물들은 땅속이나 줄기 위에서 꽃이며 잎이 될 눈들을 부풀리거나 씨앗의 껍질을 벗겨내느라 온 힘을 다하고 있을 터이다. 대견하게도 말이다. 대부분은 봄꽃이며 새순들이 눈앞에 펼쳐져야 봄을 절감하지만, 자연처럼 예민하게 감각을 세워 다가서 보면, 물이 오른 나뭇가지의 탄력이며 생명이 올라오는 땅의 흙냄새며, 들썩이는 겨울눈의 미세한 변화를 우리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낭만적인 봄타령은 행복하기 그지없는데, 살아간다는 것은 보다 긴박하다. 언 땅이 녹아 물이 오르기를 가장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마도 고로쇠 수액을 모아 파는 사람들이 아닐까. 다른 이들이 눈치 채기 훨씬 전에 이 봄의 기운을 알아내 설치를 해야 한다. 사실 물이 오른다 함은 나무로서는 새로운 성장에 대한 희망으로 설레는 엄숙하고도 감동적인 순간이지만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인 사람들은 고로쇠나무의 양분이 될 수액을 가로채 마시는 새로운 재미와 즐거움을 알아버렸고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누군가는 나무에 구멍을 내고, 한 방울씩 떨어지는 그 물을 모으는 노고를 해야 하는 것이 삶이긴 하다.

수액이란 나무의 도관을 흐르는 액체로 양분을 포함한 모든 물질이 이동된다. 모든 나무에 수액이 흐르지만 고로쇠나무 수액은 양이 많고 맛이 달아 상품이 된다. 세계적으로는 캐나다의 설탕단풍이 가장 유명한데, 그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흔히 파는 메이플시럽이란 것도 바로 이 수액을 졸여 만든 천연 당분이다. 고로쇠나무나 설탕단풍 모두 단풍나무 집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 산에 갔다가 링거주사를 꽂고 있는 환자들처럼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 채취통을 보면 마음이 짠해지며 나무에 해롭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그래서 관련 연구자들이 이 문제로 실험을 해보았는데 역시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나치지만 않다면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산림청에서는 그 결과에 따라 어린 나무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나무의 지름에 따라 채취 구멍수를 제한해 수액 채취 허가를 내주고 있다. 사과나무에서 열매를 따듯, 쇠고기를 먹기 위해 가축을 키우듯 우리는 나무가 주는 잉여의 선물을 받아 쓸 수 있다는 개념이다. 많은 수익이 되니 일부 지방에선 논에 벼를 키우듯, 산에 이 나무를 심어 키우기도 한다.

문제는 늘 그렇듯 지나친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눈앞의 소득에 급급해 나무가 우리를 위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채취하다보니 결국 나무가 쇠약해지고, 구멍을 뚫었던 곳을 방치해 병균이 침입하게 만들어 아낌없이 자신의 피와 살이 될 양분을 내어준 나무를 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언제나 매일 황금알을 낳아주던 거위에 더 큰 욕심을 내 배를 가른 악덕 주인이 생각난다.

수액이 점차 줄어들 즈음, 숲엔 물이 올라 삐죽삐죽 다투어 올라오던 새순들이 햇살을 받아 쑥쑥 잘도 자란다. 나무마다 풀마다 새싹의 모양도 다 다르다는 것은 당연할 수 있으나 숲에서 보는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세상의 모든 어린아이가 그러하듯 순결한 새싹들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봄 숲이 이런 어린 잎들로 가득할 즈음, 숲은 이를 탐내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아든다. 곰취, 참나물, 돌나물… 이름만 들어도 신선하고 입맛이 도는 산나물들이다. 산나물도 숲이 우리에게 주는 참으로 근사한 선물의 하나다. 그것도 적절히 골라서 알맞게만 이용하면 언제까지고 지천으로 보내주는 그런 선물이다.

하지만 산나물도 지나친 욕심을 내는 게 문제다. 일부 잎들만 살짝살짝 떼어내 근본을 다치지 말아야 식물은 다시 새잎을 내보낼 수 있고 그래야 그 잎으로 광합성을 해서 식물이 자라야 뿌리를 퍼뜨리고 꽃을 피우고 결실하여 다시금 새 생명들이 그 숲에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산 옆에서 산에 삶을 기대어 사는 이들은 나물을 뜯을 때 손가락에 도구를 끼고 잎만 일부 떼어내 뿌리를 다치지 않게 한다. 문제는 무모한 욕심으로 뛰어든 얼치기 나물꾼들이 자연이 내어준 무궁한 나물밭을 망치는 일이다. 줄기마다 하나의 순도 남기지 않아 더 이상 펼쳐낼 잎이 없어 죽어가는 두릅나무의 가시 가득한 줄기도, 높은 줄기에 오르기 어려운 나머지 베어내 가지와 잎만 잘라간 음나무와 껍질째 벗겨진 느릅나무 모두가 사람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배를 가른 또 다른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눈앞의 작은 욕심으로 내일의 희망까지 잃지 말았으면 싶다. 어려울수록 고로쇠나무나 산나물이나 두릅나무를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혹은 우리가 해야 할 일과 그 일의 순서가 생기지 않을까…. 학문이든 경제든 정치든.

이 나무와 풀들이 욕심 내지 말고 살라 한다. 추운 겨울 끝에 어김없이 봄이 오는 일이 진리이듯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엔 다시 풍성한 가을이 오며 결국 우린 풀처럼 나무처럼 일생을 또는 한 해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