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길이 즐거운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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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 가는 길 댓글 0건 조회 876회 작성일 09-03-3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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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길이 즐거운 아이들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학교 갈 때는 걸어가고, 집에 갈 때는 뛰어간다’고 했다. 내초 아이들은 반대다. 학교가 학원이고 놀이터고 집이다. 오후 2시 수업이 끝나도 운동장에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부모나 보호자들이 생계에 바쁘기도 하지만 학교만큼 재미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점심 급식도 식당을 하는 5학년 진우네 집에서 가져온다. 시키지 않아도 고학년 오빠들이 반찬을 강당 격인 ‘꿈나무실’로 옮기고 아이들은 자기 이름이 적힌 급식판을 들고 따라 나선다. 남자 선생님들의 서툰 배식을 받아 사실상 고정석이 된 자리에 가서 먹는다. 입맛이 없는 친구들은 대신 먹어 줄 ‘흑기사’를 요청하기도 한다.

급식판 설거지도 아이들 몫이다. 세제를 바른 수세미를 든 4학년 태준이 손이 제법 야무지다. “특별한 날은 집에서도 설거지를 해요. 오늘 엄마 생일인데 할까 말까 생각 중이에요.”
물론 교사들도 같은 교실서 함께 식사를 한다. 18일은 난데없는 손님(?) 때문에 행정실 선생님은 라면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이렇다보니 교사들은 결석생을 걱정하는 날보다 연휴가 낀 임시휴교일이나 방학을 더 걱정해야 한다. ‘학교가 문을 닫는 날’이 아이들에게는 가장 힘든 날이다. 이 날도 예비군 훈련이 있어 오전 수업을 끝으로 아이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놀기 좋아하는 선생님
하정훈 분교장은 지난해에 내초분교에 왔다. 내초에서만 5년을 근무한 진명식 분교장과 1년을 보낸 뒤 진 교사가 전근을 간 뒤 졸지에 분교장이 됐다.
24살에 교직에 들어서 올해로 8년차다. 본교인 해성초등학교 소속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내초분교 살림살이를 책임져야 한다.
“직전에 익산에서 근무를 했는데 41학급에 학생수만 1600명이었어요. 누가 누군지 이름 기억하기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한 눈에 다 들어와요. 본교 교장선생님은 교사 1인당 학생 4명으로 ‘신이 내린 학교’라고 말씀 하시는데, 어깨가 무겁네요.”
“희망하는 교사가 전혀 없었나 봐요. 점수관리요? 평정기간이 10년으로 늘었고 큰 학교에 근무를 해야 되거든요. 다행히 잘 해서 좋은 점수 받으면 고맙죠. 아이들에게 그 만큼 잘하고 있다는 평가라고 받아들이면 되겠네요.”
‘분교나 낙도에 근무하면 근무평정을 잘 받을 수 있다던데’라는 질문에 돌아온 답이다. 점수는 모르겠고, 학교에서 배웠던 교육관과 나름의 신념을 지키면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내초분교의 교훈은 ‘바르게 신나게 재미있게’다.
“바람이 많이 부는 여름날 연을 만들어 학교 앞 공터에 나가요. 신나게 놀면서 연이 나는 원리, 바람의 세기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 날씨가 맑으면 차를 타고 방조제 근처 풍력발전단지에 가요. 바람이 전기를 일으키는 걸 덤으로 배울 수 있거든요.”

내초에 온 지 4주를 갓 넘긴 서선영 선생님은 “교사들 운동량이 엄청나다”고 말했다. 아이들 따라 다니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교인 탓에 수업 외의 업무가 그리 많지 않아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 물론 직접 해결해야 할 일도 많지만.

17일부터 아이들에게 칭찬 스티커를 나눠주고 있다. 200점을 넘기면 최고 상품인 ‘선생님 집에 가서 잠자기’가 기다리고 있다. 극기훈련, 수학여행, 졸업여행 등 ‘외박 프로그램’을 갖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만든 이벤트다. 지난해에 20점이 모자라서 최고 상품은 올해로 미뤄졌다.
그렇다고 내초 아이들이 매일 노는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모든 교과과정은 본교 프로그램과 함께 운영한다. 3월 넷째주부터 ‘공식’ 방과후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원어민영어교실과 태권도 강습이 있다. 놀토가 아닌 1, 3주 토요일에는 인근 미군 전투비행단 소속 미국인 데이비스가 와서 아이들과 놀아준다.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자란다
‘경쟁 셈법’에 익숙한 외부인 눈에는 ‘아이들이 제대로 공부를 하겠느냐’는 것부터 보인다. 도시 아이들이 사설학원에 다니는 이유 중 상당수가 다른 아이들에게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잖은가.
집 보다 학교가 더 익숙한 아이들에게 어떤 경쟁력을 키워 줄 수 있을까.
하 선생님의 침묵이 길어진다.

“시설이나 여건으로 보면 학교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큰 학교는 방과후 수업만 12~13개가 넘고, 근처에 학원도 많고. 우리는 대신 아이들을 자세히 볼 수 있어요. 진우는 동물을 좋아하고, 동혁이는 수학을 좋아하고 주형이는 대인관계가 참 좋거든요. 거창하게 인성교육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도 없어요. 잘 하는 것 더 잘하게 조언해 주는 거죠.”

그렇다고 내초 아이들의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본교 안기근(56) 교장은 “내초 교사들이 개인 맞춤식 교육이나 학습법이 뛰어나 작은 학교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며 “수업연구대회 등에서도 도시학교 뺨치는 결과를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말썽 많았던 전국단위 성취도 평가에서 미달평가를 받은 학생은 1명도 없다. 4학년 승환이는 지난해 본교와 함께 선정한 ‘독서왕’에 뽑혀 자전거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솔직히 큰 학교에 있을 때는 하루 8시간 교사로 잘하면 됐어요. 사실 그러기도 바쁘죠. 내초에 와서는 24시간을 교사로 살아보려고 노력합니다. 선물을 사도 12개, 상품을 받아도 12개. 완전히 아이들 입장이 돼서 살 수는 없겠지만 ‘5년 근무한 적 있는 학교’에 만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좋은 학교는 어떤 학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하 분교장은 “경력이라고 해야 아직 보이지도 않지만 ‘아이들이 나를 보고 커 간다’는 생각을 새기고 살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어떤 이는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고 했고, 또 어떤 유명한 분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도 했다. 내초 아이들은 그렇게 선생님과 함께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