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로 존재감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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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존재감 댓글 0건 조회 1,100회 작성일 09-05-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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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기업 사장인 이아무개(45)씨. 그는 최근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아졌다. 지난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뒤 신문이나 방송 뉴스를 볼 때면
 
“그냥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이씨는 “슬픔의 정체를 알 길이 없지만, 내가 이렇게 정서적으로 그와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슬픔이 끝모르게 퍼져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닷새째인 27일에도 추모 인파는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서울역 등 전국 300여곳의 분향소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추모객들은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치며 눈물을 떨어뜨린다. “미안하다”며 흐느끼는 이들도 많다. 부모 손에 이끌려 나온 철부지들도 환하게 웃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눈물을 짓는다.
 
분향소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박했던 노 전 대통령의 사진과 동영상을 돌려보며 눈시울을 훔쳤다. 인터넷에선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글마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댓글이 꼬리를 문다.

죽음 이후 쏟아지는 ‘추모’의 열기는, 살아생전 그의 몫이었던 ‘애증’의 부피를 훨씬 뛰어넘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이상과 열정, 순수함에 반해 표를 던졌고, 탄핵에서 그를 구해냈다.
 
하지만 임기가 끝났을 때 그를 마음으로 지지하는 이들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추모 열기는 다소 뜻밖의 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노 전 대통령의 ‘지기’인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조차 “추모 열기의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다”고 했다.

문학평론가인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교자’의 지위를 얻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원망하지 말 것을 마지막 말로 남겼다. 하지만 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지난 26일 대한문 앞 분향소를 찾은 박정희(56)씨는 “노 전 대통령이 죽은 것은 결국 우리가 그를 버렸기 때문”이라며 “조문을 했는데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정신과 전문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처럼 슬퍼하는 것은 노 전 대통령과의 ‘감정적 커넥션’이 탄탄했음을 뜻한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1년여를 겪으며 사람들은 노 전 대통령이 내세우고 추구했던 가치의 진정성을 다시 깨닫고 있다. 식을 줄 모르는 ‘추모의 염’에는 반성적 회고와 성찰이 담겼다.
 
 충북 추풍령에서 아내와 세 아이를 데리고 봉하마을을 찾은 박아무개(40)씨는 “이 대통령 집권 이후 우리가 피땀 흘려 세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며 “시민들이 연대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열풍은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고통과 좌절이 투영된 현상이기도 하다. 문화비평가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는
 
“이 대통령의 집권 이후 삶의 고통이 커진 상태에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극단적 사건’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여기에 자신의 슬픔을 투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이 따가운 햇볕 아래 사람들을 한데 불러모으고, 4~5시간의 기다림마저 달갑게 견디게 하는 것일까?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는 ‘노무현의 재발견’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황 교수는 “보통사람들의 조문은 그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던 ‘효율’이나 ‘경쟁’ 등 경제적 가치와 대비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진정 우리가 마음으로 원했던 것은 ‘국민들과 소통하고, 국민 편에 서려 했던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보수 성향의 언론과 정치세력들이 ‘경제를 살리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말해왔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라는 대중들의 ‘무언의 항변’이 끊이지 않는 조문 행렬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뜻밖의 ‘노무현 신드롬’은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심리적 원인은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부재가 그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역설’을 낳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노 전 대통령은 갑작스런 자신의 부재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노 전 대통령의 부재는 한 전직 대통령의 죽음 그 이상이다. 이택광 교수는 “절망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받은 이 슬픔을 다독여줄 이가 없다는 것”이라며
 
 “이 대통령은 그런 ‘아버지’로서의 자격도, 역할도 이미 포기했고, 사람들도 기대를 접었다”고 말했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도 “이 추모 열기를 정서적으로 잘 되새겨 현실을 바꾸는 동력으로 삼아야겠지만, 앞이 보이지 않고 갈 길이 여전히 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