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위대한 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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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추장 댓글 0건 조회 934회 작성일 09-06-1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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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위대한 추장

중동의 떠오르는 신도시 아랍에미레이트 연합의 두바이 부족.
그들은 그저 중동에서 발견된 석유를 팔아서 부자가 된 것만은 아니다.

아랍에미리트(UAE) 7개 부족 중 하나인 인구 3천여 명에 불과한 두바이항.
이 작은 어촌 마을에서 새 부족장이 선출된 것은 1958년이었다.

그 추장 '셰이크 라시드'는 취임하자 마자 이듬 해부터,
두바이를 중동 최고의 허브항으로 만들 야심찬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하지만 대부분 주민들은 반대했다. 고작 진주잡이를 주로하는 어촌에서
중동의 허브 항구는 세계인의 웃음거리가 될 참으로 비현실적인 공약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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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라시드 추장은"꿈꾸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굳은 신념으로 건설에 착수한지 5년 만에
소위 '두바이산 석유'로 불리는 엄청난 매장량의 원유가 발견되었다
마침내 착공 13년만에 그의 이름을 딴 중동최대의 '라시드항구'가 건설되었다.

그는 석유 이외 아무 자원도 없는 두바이의 미래를 위해서,
산업, 금융, 관광에 오일 달러를 집중투자하여
불모의 사막도시 전체를 리모델링해 버렸다.

1990년 32년간 두바이를 이끌었던 지도자 라시드가 사망하자
그의 셋째아들인 셰이크 모하메드가 뒤를 이었다.

그로 부터 벌써 16년째, 전 세계 크레인 중 20%가 두바이에서 사용 중이란
소문이 퍼질 정도로 두바이 시내는 아직도 '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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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즈 알 아랍'이란 별 7개짜리 유일한 '7星급' 세계 최고급호텔이 거기 있다.
그 호텔로비의 기둥은 황금으로 칠해졌고 복층구조 객실은 차라리 황궁의 침실이다.

전 세계 최고의 부호들이 오로지 돈을 쓰기 위해 전세 비행기를 타고 두바이로 몰려간다.
두바이 부족장의 지혜는 여기 있다.
그들이 돈을 쓰고 가도록 유인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 바로 두바이다.

섭씨 40도가 넘는 사막도시의 돔 스키장에서 언제든지 스키를 즐길 수 있는 곳.
지상 160층, 높이 700M가 넘는 세계최고층의 빌딩이 지금 이 시간에도 올라가고 있다.
마지막 높이는 비밀에 붙인 채...

2010년까지 계속되는 인공섬 공사가 끝나면,
70km에 불과한 해안선이 무려 1500km까지 늘어난다고 한다.

이 거대한 국토개조 현장을 본 사람들은
벌써부터 '세계8대 불가사의'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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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후 서울의 부촌 강남 특별구는..
장차 두바이항에 비하면 달동네 수준이 되리라.

작은 어촌의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의 꿈이
바로 이런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초고속 성장 가도를 질주하는 두바이가 10년 계획에서 제시한 목표를
불과 5년 만에 압축 달성하자 또다시 10년짜리 새 장기 비전을 내놓았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토후국 두바이 정부는
지난주 ‘두바이 전략플랜 2015’를 발표,
국내총생산(GDP)을 2005년 370억달러에서
2015년엔 1080억달러로 3배 가량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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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인당 국민소득은 1만달러(2005년 3만3000달러→
2015년 4만4000달러) 더 늘린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10년간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1%,
일자리는 88만2000개를 새로 만들어낸다는 야심찬 세부 계획도 함께 내놓았다.

이 같은 두바이의 새 장기 계획은 지난 2000년 발표된
‘10년 장기 비전’의 목표치가 5년 만에 모조리 달성됨에 따라
새로운 국가 발전 목표를 제시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4년 전 노무현 정부가 출범 때 약속한 연 7% 성장과
연간 50만개 일자리 창출 등의 목표가 거의 달성되지 못한 한국과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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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의 지도자 셰이크(부족장) 모하메드는 새 장기 계획을 발표하면서
‘두바이, 미래가 시작되는 곳(Dubai, where the future begins)’이라는 연설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도 성공했기에 미래에도 성공할 것이다”라는 대국민 메시지를 전했다.

두바이의 10년짜리 장기 비전은 2000년 수립됐다.
당시 2010년까지 달성할 장기 목표로 제시된 국내총생산은 300억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만3000달러였다.

하지만 지난 2005년 국내총생산은 370억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3만3000달러를 기록,
목표치를 5년이나 앞당겨 큰 폭으로 초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실제로 2000~2005년 사이 두바이가 기록한 연간 평균 경제성장률은 13%.
세계의 성장 엔진이라는 중국(9%), 인도(6%)를 크게 넘는 수준이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새 장기 계획 발표 연설에서
“우리는 시간과 경주를 벌였고, 이겼다”며
“이제 새로운 경주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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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특히 “투자와 기업 환경을 개선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인식한
정부가 리더십을 잘 발휘해줬기 때문”이라고 공직자들에게 공을 돌렸다. '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는 두바이 공직자들의 기본급을
20% 인상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만약 다른 이들이 ‘두바이 전략플랜’을 준비하고 계획했다면
실현 불가능하다는 의심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셰이크 모하메드가 직접 얘기한 것이기에 우리는 믿을 수 있다

두바이 정부가 새로 내놓은 ‘2015 장기 비전’에 대해서도
현지 언론은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90년대 중반 셰이크 모하메드 등장 이후 그는 두바이의 미래 비전을 내놓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반드시 실천하는 능력을 통해 국민과 언론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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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뢰 잃은 한국의 장기 비전

반면 두바이가 ‘전략플랜 2015’를 발표한 지 이틀 뒤인
지난 5일 우리 정부가 내놓은 장기 비전 ‘인적 자원 활용 2+5전략’은
야당과 여론으로부터 “대선(大選)용 선심 정책”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현 정부가 출범 당시 발표한 100대 과제와
성장·일자리 약속이 거의 지켜지지 않은 데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장기 비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경제연구원 배상근 박사는
“정부가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한 장기 비전을 내놓아도
국민들이 이를 환영하지 않는 것은 정부가
그동안 내놓은 정책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 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도
“정부가 신뢰를 얻는지 여부에 따라서 정부의 장기 비전은
전혀 다른 대우를 받는다는 점을 두바이와 한국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꿈꾸는 지도자’가 나라를 살린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나라와 기업과 조직과 사회의 운명을 통째로 바꿔놓을 수 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리더들의 혁명이 숨가쁘게 진행 중이다.
그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아랍의 한 부족장에게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그는 “경제인은 정치적 진보를 만들 수 있지만,
정치인은 경제 문제를 풀 수 없다”며 스스로를 ‘사업가’로 부른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12월 그를 ‘올해(2006년)의 사업가’로 선정했다.
두바이의 지도자 셰이크 모하메드(57) 얘기다.

셰이크(Sheikh)란 아랍 족장에 붙는 칭호.
허허벌판 사막의 두바이를 ‘중동의 뉴욕’으로 바꾼
그의 ‘리더십 마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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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것은 항상 옳다”

1968년 영국의 몬스군사학교. “모하메드 생도! 줄을 맞춰야지.
왼쪽으로 2보 이동해!” 교관의 날 선 호령이 날아왔다.
“옛써(Yes Sir)!” 모하메드는 크게 소리쳤다.

“부대, 오른쪽으로 2보 이동!” 부대는 다시 그를 중심으로 정렬했다.
교관은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그가 사실상 부대의 리더였기 때문이었다.

그해 그는 최우수 외국 사관생도로 졸업했다.
그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광(狂)적이었다.

두바이의 첫 축구 클럽팀을 만든 것이 그였고, 가라테 검은 띠를 땄다.
그의 ‘열린’ 세계관을 말해주는 일화는 많다.

중동의 여성 차별 속에서도 딸을 가라테 국가대표 선수로 키웠고,
딸은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땄다.

그는 1949년 셰이크 라시드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의 권력승계가 일반적인 중동에서 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아닌 큰형이 그를 1995년 계승자로 지목한 것이다.
형제들도 그가 대권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데 이견을 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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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과 돈으로 줄다리기

2000년 9월 이스라엘 군의 총격으로 팔레스타인 소년이 숨졌다.
사건이 터지자 그는 ‘어린 순교자 무함마드 알두라에게’라는 시를 발표했다.

‘침탈에 맞서 힘없는 아이는 도우는 이도 없이 뒷걸음질 쳤다네’로
시작되는 시는 아랍세계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팔레스타인의 영화에도 삽입돼 전 세계로 퍼졌다.

식당에서 술을 팔고 정부 묵인 아래 매춘도 이뤄지는
‘타락’한 도시국가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에서 안전한 까닭이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테러집단도 두바이의 금융계좌를 이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중동의 화약고 속에서도 ‘말(言)과 돈’으로
미국과 이슬람 양쪽을 교묘하게 줄타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9월 20일, 그는 두바이를 방문한 한명숙 총리를
에미리트타워의 자기 집무실에서 만나기로 돼 있었다.
이날 그는 직접 승용차를 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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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본 기자들이 “혼자 다니는 게 위험하지 않으냐”고 묻자
그는 “지도자인 내가 혼자 다니지 못한다면
투자자들이 어떻게 안전하게 두바이에 투자하겠느냐”고 받아쳤다.

유명재 LG상사 상무는 “그를 보좌하는 싱크탱크 그룹이
최대 2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2004년, 쿠웨이트의 한 기자가 셰이크 모하메드에게
“당신이 아랍의 지도자라면 어떻게 아랍을 발전시키겠는가”라고 물었다.
대답은 ‘사업가’를 자처하는 그다웠다.

“아랍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등의) 일은
겉보기에는 정치문제 같지만 사실은 모두 경제 문제다.
각 분야의 리더를 정치인이 아닌 경제인으로 채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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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선 1500㎞를 만든 상상력

“두바이의 해변(65㎞)은 너무 짧아서 관광지로 개발할 해변이 부족해요.
(인공)섬을 디자인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봐요.”
'97년 어느 날 셰이크 모하메드가 두바이항만공사 술탄 빈 술레이엠 사장에게 내린 말했다.

얼마 후 빈 술레이엠 사장은 약 7㎞의 해변을 가진 둥근 섬의 디자인을 들고 갔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나는 7㎞가 아니라 70㎞짜리 해변을 원해요”라고 받아쳤다.

두바이의 명물이 된 ‘팜(Palm·야자수)’ 인공섬은 이렇게 탄생했다.
야자수 가지 모양으로 설계해 해변을 최대한 늘린 것이다.
3개의 인공섬과 세계 지도모양의 ‘더 월드’의 해변 길이는 무려 1500㎞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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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2배 크기의 작은 도시국가가
지도자의 상상력에 의해 대국(大國) 못지않은 해안선을 갖게 된 것이다.
인공섬 ‘팜주메이라’의 빌라는 한 채에 500만달러가 넘는 초고가로 분양됐지만
영국·러시아 등의 부자들이 앞다투어 사들이면서 분양 사흘 만에 ‘매진’됐다.

두바이는 요즘 사막 위에다 디즈니랜드의 8배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테마파크
두바이랜드를 건설 중이고 세계 최초로 바닷속 20m 깊이까지 내려가는 수중호텔을 짓고 있다.

뉴욕 JFK 공항과 런던 히드로 공항을 합친 규모의 거대한 공항도 만들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셰이크 모하메드가 구상했거나 외부 컨설팅을 받아 추진을 결심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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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항상 주민에게 꿈을 제시한다

우리의 Vision은 생활의 안락함과 성공의 핵심을 제공하는 최고의 도시를 창조하는 것이다.
두바이 공무원들이 보내는 모든 이메일에 붙어있는 문구다.
최고위층부터 말단공무원까지 모두가 이 꿈(비전)에 따라 움직인다.

물론 셰이크 모하메드의 비전이다.
그는 입버릇처럼 “아직 나는 내가 꿈꿔 오던 것의 10%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국민들에게 꿈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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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그가 “2011년까지 두바이 경제의 석유의존도를 0%로 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조소하면서 모두 ‘꿈’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현재 두바이 국민총생산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겨우 4%에 불과하다.

그의 비전은 경제에만 그치지 않고 챠도르를 걸치고 차별대우를 받는 여성에게도 미친다.
지난해 12월 18일 열린 두바이의 사상 첫 국회의원 선거.
셰이크 모하메드는 투표를 마친 뒤 “여성이 없는 사회는 영혼이 부족한 사회와 같다”며

“우리는 전문성과 리더십을 가진 여성들이 당선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개인적으로는 여성 후보를 지지한다.”라는 대국민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여성차별이 극심한 아랍국가에서 여권신장을 위해 그렇게 꿈을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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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는 아랍에미레이트 연합의 7개 연방 중 1주에 해당한다

아랍에미레이트의 특징은 7개 에미리트[아랍 토후국이다.
토후라면 이해가 안되실지도 모르는데 족장을 뜻합니다.
국호에 에미리트라는 말은 족장을 뜻하는 에미르의 연합이라는 뜻입니다.

에미르의 연합국가가 바로 아랍에미리트라는 영어화 된 것입니다.
7개의 토후국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열하면 아부다비(Abu Dhabi),
두바이(Dubay), 샤르자(Sharjah), 아지만(Ajman), 움알카이와인(Umm al-Qaiwain),
라스알카이마(Ras al-Khaimah), 푸자이라(Fujairah)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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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9개였는데 이중 2개인 카타르와 바레인은 분리 독립하여 현재는 7개입니다.
아랍은 부족중심의 나라라 족장이 모든 권한을 우선합니다.
7개중 대통령과 부통령은 2가문이 거의 독차지합니다.

즉 강대한 가문 2개가 차지한다는 겁니다.
그곳은 바로 앞서 나열한 곳인데 아마 수도인 아부다비와
석유생산지로 유명한 두바이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겁니다.

이 두 곳의 에미르가 전나라를 통치한다고 보면 됩니다.
나머지는 소국이지요.... 말은 공화국이지만...
아랍에 공화국은 거의 전무합니다.
부족장의 나라라 생각하면 금방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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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는 아부다비이고 지금은 무지 현대화된 도시로 변모해있습니다.
기후는 사막지대라서 건조하지요.

위치 아라비아 반도 동부이고 면적 8만 3600㎢ 인구 381만8000명(2003)
인구밀도 45.7명/㎢(2003) 수도 아부다비 정체 연방공화제 공용어 아랍어

통화 아랍에미리트 Dirham
환율 3.67DH = 1$(2003.9)
1인당 국내총생산 1만 9945$(2003)
인구밀도는 45.7명/㎢(2003)이다.

정식 명칭은 아랍에미리트연방(United Arab Emirates)이다.
동쪽은 오만, 남서쪽은 사우디아라비아,
북서쪽은 카타르와 접하고 북쪽으로 페르시아만(灣)에 면한다.
원래 9개 토후국이 있었으나 카타르와 바레인은 분리, 독립하였다.

아랍에미리트의 자연은 열대는 아니지만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를 제외하고는 매우 고온다습한 사막지대이며,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심하고 연강수량은 60∼100mm밖에 되지 않는다.

영토의 동단은 라스마산담곶(串)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있는 하잘산맥이지만,
그밖에는 평탄하며 아라비아만(페르시아만) 연안에는 조그마한 섬들이 많다.
여름 기온은 연안지역이 46℃, 사막 내륙은 49℃
또는 그 이상이고 1월 평균기온은 1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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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토 중 초원이 2%일 뿐이고 산림지대나 경지는 거의 없다.

아랍에미리트의 주민은 카와심족(族)에 속하는 아랍인이 주를 이루나
파키스탄인·인도인의 이민과 노예의 자손인 흑인도 많다.

각국의 인구는 반수 이상이 국명과 같은 지명의 주도(主都)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밖의 인구는 해안지방의 도시와 내륙의 오아시스에 산다.

사막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베두인족도 인구의 약 10%를 차지한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데, 수니파(派)가 80%, 시아파가 20%를 차지한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며 영어도 통용된다.

아랍에미리트의 카와심족(族)은 해양민족으로 예로부터 어업과 해운업에 종사해 왔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의 배가 이 해안에 내항하였으며,
17세기부터 네덜란드와 영국 해군이 인도양의 제해권을 다투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해상에서의 전통적인 생업에 종사할 수 없어 해적으로 전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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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에는 와하비(사우디아라비아의 모체)의 보호하에 들어가
유럽 세력에 대항하는 해적행위를 격화시켰다.
영국은 1806년부터 무력으로 해적을 격파하기 시작하였다

1918년에는 해적의 본거지 라스알카이마항(港)과
당시 ‘해적해안’이라고 부른 연안 항구들을 정복하였으며,
1920년에는 각 에미르(首長)와 평화조약을 맺어 해적행위와 노예무역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조약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1935년에 6개월 기한으로 해상휴전협정을 체결하였으며,
그후 다시 기한을 갱신하여 이 지역을 ‘휴전해안’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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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협정은 1953년 항구적인 해상휴전조약으로 바뀌었다.
이 조약으로 각 에미리트는 실질적인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지만,
영국은 토후국끼리의 육상교전에는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1920년에 5개국이었던 토후국들은 흥망과 집산을 되풀이하였다.

1992년 영국 이외의 나라들과의 자유로운 교섭을 금지당하자
아랍의 다른 지역과 관계를 잃게 되어
경제적으로 영국령 인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1948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이 결정되는 한편
이 지역에서 석유자원이 발견되었다.
영국은 1952년에 자국 장교가 지휘하는 ‘휴전 오만대(隊)’를 이 지역의 군대로서 창설하였다

두바이에 주재하는 영국인 정치고문을 의장으로 하는 휴전 에미르 평의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석유 산출로 부유해지기를 꿈꾸는 에미르들은 정치적 통합에는 관심이 없었다.

1955년 아부다비와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 일어난
부라이미 오아시스의 영유분쟁은 석유에 얽힌 영토분쟁이었다.

1958년에 아부다비의 석유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65년에는 영국이 바레인·카타르·아부다비에게 출자하도록 하여
휴전제국 개발기금을 창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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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아랍연맹에 아라비아만(灣) 에미리트 문제 상임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당시에는 바레인과 카타르도 포함시킨 에미리트 연합국이 구상되었다.
1966년에는 ‘연합국 헌법제정 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영국은 아덴을 대신할 군사기지를 샤르자에 설치하였으나
1968년 초에는 이 지역의 군대를 1971년 말까지 철수하겠다고 발표하고,
그때까지 에미리트 연합국을 실현시킬 방침을 정하였다.

같은 해에 바레인과 카타르를 포함한 9명의 에미르가 참석한
제1회 에미르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상호불신과 대립으로 인하여 원활한 교섭 진전이 없었으며,
결국 1971년 여름 바레인과 카타르가 단독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해 11월 말 영국군이 철수하자 때를 같이하여
이란이 호르무즈해협의 샤르자와 라스알카이마령의
작은 섬을 군사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샤르자는 이란과의 협정에서 연합국에의 참여를 승인하였으나
라스알카이마는 거부하였고, 12월 초에 샤르자를 포함한
아랍에미리트가 독립하였을 때도 라스알카이마는 참가하지 않았다.
라스알카이마는 1972년 2월에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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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는 1971년 12월 독립과 동시에 체결된 잠정헌법에 따르면,
연방 최고기관은 각 토후국 군주들로 이루어진 연방최고평의회(수장회의)이다.

모든 사안에 대한 결정은 5명 이상의 찬성으로 이루어지는데,
가장 큰 토후국인 아부다비와 두바이의 군주는 거부권을 가진다.

각 토후국은 자치권을 가지며 내부문제에 대해서는
해당 토후국 군주가 모든 권한을 가진다.

1996년 5월 연방최고평의회는 정식헌법을 채택하고
아부다비를 연방수도로 공식 확정하는 등
독립 25주년을 계기로 연방으로 안정되어가는 추세이다.

연방 대통령과 부통령은 토후국 군주들 중에서 선출하는데,
1971년 이후 계속 대통령은 아부다비의 자이드 국왕이,
부통령은 두바이의 라시드 국왕이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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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총리와 내각을 지명한다.
의회는 각 국왕이 임명한 의원들 구성되며, 임기는 2년이다.
의원수는 토후국별로 정해져 있는데 아부다비 8명, 두바이 8명,
샤르자 6명, 라스알카이마 6명, 아지만 4명, 푸자이라 4명,
움알카이와인 4명으로 총 40명이다.

정당은 없으며, 사법권은 연방대법원에 속한다.
종교관련사건은 샤르아 법원에서 헌법 대신 이슬람 정신을 근거로 재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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