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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철수 댓글 0건 조회 2,006회 작성일 06-12-17 15:18본문
‘남 잘되게 하는 공부’와 ‘스스로 종 노릇하기’
(1) 증산은 철저한 ‘이타주의’를 가르쳤습니다.
“우리 일은 남 잘되게 하는 공부니 남이 잘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우리 일은 되느니라. 전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되어 조선명부가 되었느니라”(대순전경 p323)
“종도(宗徒)들에게 항상 가라사대 ‘세상 사람들이 제 자손만 잘되어 부귀하기를 바라나 이와 같은 자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니라. 우리가 하는 일이 천하창생이 다 부귀하여 잘되게 하자는 것이니 너희들은 사사로움을 버리도록 하여 공변됨(fairness; justness; squareness)을 먼저 할 것이요, 사사로움을 먼저 하여 공변됨을 뒤로 함이 없도록 늘 힘써 천하를 공변되게 하려는 생각을 가져야 신명의 감화를 받아 일에 성공이 있으리라.’ 하시니라”(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75)
“선천에는 상극지리(相克之理)가 인간사물을 맡았으므로 모든 인사가 도의에 어그러져서 원한이 맺히고 쌓여 삼계에 넘침에 마침내 살기(殺氣)가 터져 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그러므로 이제 천지도수(天地度數)를 뜯어고치며 신도(神道)를 바로잡아 만고의 원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써 선경(仙境)을 열고 조화정부를 세워 하염없는 다스림과 말없는 가르침으로 백성을 화하며 세상을 고치리라”(대순전경 pp298-299)
이웃이나 타인을 향한 너그러운 마음가짐 정도를 말한 게 아닙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열어 사람 살기 좋은 천하를 만들자는 이야기입니다. 최소한 제 잇속과 제 주변의 행복만을 생각하지 말고 제가 사는 공동체 전체의 보다 나은 미래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전체를 변화시키고 우주전체가 뒤바뀌는 데까지 생각이 미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 잘되는 공부하라’는 말, ‘천하창생의 부귀를 생각하라’는 말을 한 마을에 꼭꼭 갇혀 살다 이름 없이 사라지는 그렇고 그런 백성들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자못 궁금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귀나 머리나 눈은 참으로 신묘하고 신통한 데가 있습니다. 영적인 존재들이기에 배우지 않고 보지 않아도 상상 외로 생각의 지평을 마음껏 넓혀 갈 수 있습니다.
누가 가르치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선각자들은 하나같이 ‘마음의 눈금을 높이 그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초월자들은 하나같이 ‘영혼을 눈 띄워 하늘나라를 바라보라’고 가르쳤습니다. 선각자들은 ‘사람자체를 변화시키면 세상이 변한다’고 보았습니다. 초월자들은 ‘하늘이 정하는 대로 따라 가고 따라 하는 것이 곧 사람 된 도리이고 세상이 존재하는 목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증산은 선각자이자 초월자였습니다. 말의 내용이 다르고 바라는 바가 달랐습니다. 당대의 시대정신을 앞지르고 당시 사람들의 이성을 아득하게 뛰어넘었습니다.
(2) 예수는 유대인의 최대명절인 유월절 식사를 최후의 만찬으로 삼았습니다. 목요일 저녁식사였습니다. 준비부터가 예수다웠습니다. 제자 중 둘을 예루살렘 성내로 보내며 ‘물 한 동이를 갖고 가는 사람을 뒤따라가 그 집 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 잘 될 거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기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마가복음 14.14-15; “The Teacher says, ‘Where is the guest room in which I may eat the Passover with My disciples?’ Then he will show you a large upper room, furnished and prepared; there make ready for us.”
열두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데 식사 도중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둘렀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씻겨주고 수건으로 손수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휘둥그래진 제자들은 엉겁결에 발을 내밀면서도 혹은 무척 당황해 하고 혹은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순서가 돌아왔습니다. 발을 씻겨주고 있는 ‘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실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제 발을 씻기시나이까?”(요한복음 13.6)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한복음 13.7)
“제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요한복음 13.8)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3.8)
“주여, 제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요한복음 13.9)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겨준 후 겉옷을 다시 입고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12-15; “Do you know what I have done to you? You call Me Teacher and Lord, and you say well, for so I am. If then, your Lord and Teac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also ought to wash one another’s feet. For I have given you an example, that you should do as I have done to you.”)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며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게 된다’는 이치를 가르쳐 주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무리 좋은 생각, 선한 마음을 먹어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몸소 가르쳐 주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더러운 배반자’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제자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겨주시다니, 이게 대체 무슨 까닭이실까? 아마도 굉장히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속 시원하게 알 길이 없으니 정말 답답한 일이구나!’라며 속을 무척 태웠을 겁니다. ‘사람의 모습이면 분명히 종 노릇일 테지만 하나님의 모습이기에 함부로 이리저리 생각의 나래를 펼 수 없다’며 무척 답답해 했을 겁니다.
(3) 증산은 ‘나와 내 피붙이들’의 부귀영화만을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 없는 삶의 자세라고 질타합니다. 눈을 보다 높이 달아두고 전 인류를 향해 지극한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아예 ‘공부하라’고 명령합니다. ‘공부하되 가장 급한 것은 남 잘되게 하는 공부’라고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상놈’을 ‘양반’ 만들어 주려 애쓰듯이 그렇게 전 인류의 팔자를 백팔십 도로 뒤바꿔놓은 고민 좀 자청해서 하라는 겁니다. 한 줌의 제 주변 사람들만 챙기지 말고 ‘천하만민’을 다 피붙이로 여기고 상속받을 적자로 삼으라는 당부입니다.
모두가 사사로움을 완전히 버리고 공평무사한 심성과 행동으로 철저히 뒤바뀌어야만 물고 뜯고 죽이는 오늘의 ‘상극세상’이 서로 돕고 부추기고 이끌어주는 ‘상생세상’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성명이나 도장 찍기나 공표하기로는 어림도 없다는 겁니다. 마음 밭 자체, 생각 자체가 완전히 바뀌고 이제까지 해 오던 버르장머리가 모조리 바뀌지 않으면 아예 생각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냥 짐승들의 먹고 먹히는 그 정글의 법칙, 밀림의 법칙 위에서 희망하나 없이 멸망의 내리막길로 쏜살같이 내달리라고 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보송보송하게 닦아주며 ‘너희도 이처럼 종 노릇 하라’고 명령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다 뒤집어지고 몸이 또한 변화된 그 마음을 졸졸 따라나서 줘야만 될까 말까 한 일입니다.
예수의 삶 자체가 바로 교과서입니다. 예수가 보여준 3년여의 생활자체가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공표한 뒤 어리둥절해 있는 주위 사람들과 이름없는 뭇 사람들에게 그 증거를 하나씩 보여주고 심어준 겁니다.
마지막 저녁식사 자리였습니다. 함께 마주 앉아 조용히 대화 나눌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이 씻어준 발 중에는 자신을 은 삼십 량에 팔아 넘길 ‘피의 배신자’도 한 사람 섞여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였습니다. 예수 곁에서 얼마 안 되는 헌금을 관리하는 살림꾼이었습니다. 예수가 행하는 온갖 기적들과 치료를 누구보다고 많이 본 사람입니다. 예수가 들려주는 하늘나라의 비밀스러운 소식들과 지식들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반복적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이미 정해진 배신이지만 하필 그가 사탄에게 이용당한 것은 순전히 그의 누적된 과오와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회계 담당자로서 얼마 안 되는 헌금통에서 수시로 돈을 훔쳤던 자입니다. 도둑질만 한 게 아니라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위선자였습니다. 그의 위선적인 언행은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서 예수를 위해 잔치할 때’ 잘 드러났습니다. 베다니는 갈릴리 호수 북쪽으로 한 오리쯤 떨어진 도시로 베드로 형제와 빌립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헤롯 빌립 2세의 통치 하에 있던 곳으로 예수가 ‘잔챙이 생선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 준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무덤에서 살려낸 이후 무수한 사람들에게 기적과 신앙의 증거가 되었던(요한복음 12.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 이러라”) 나사로(Lazarus)의 집에서 파티가 열렸던 겁니다. 그의 누이들인 마르다(Martha)와 마리아(Mary)는 섬세하고 정성스럽게 잔치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예수의 공생애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던 여러 여인들도 양 팔을 걷어붙이고 성심 성의껏 거들어 주었습니다.
그 때 나사로의 작은 누이인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 한 근을 가져오더니 그걸 단숨에 깨뜨려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으로 향유가 철철 흐르는 예수의 고단한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었습니다. ‘향유냄새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요한복음 12.3; “Mary took a pound of very costly oil of spikenard, anointed the feet of Jesus, and wiped His feet with her hair. And the house was filled with the fragrance of the oil.”)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한복음 12.4-6; “But one of His disciples, Judas Iscariot, Simon’s son, who would betray Him, said, ‘Why was this fragrant oil not sold for three hundred denarii and given to the poor?’ This he said, not that he cared for the poor, but because he was s thief, and had the money box; and he used to take what was put in it.”)
300 데나리온이면 보통 일꾼들의 일년 벌이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렇게 깰 것이면 차라리 일찌감치 팔아서 빈민구제에 쓰게 해 주지 않았느냐?’는 단순한 힐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비싼 걸 왜 이제까지 꼭꼭 숨겨놓고 모른 척 시치미 떼고 있었느냐?’는 식의 공개비난이었습니다.
예수는 간결 명료한 단 몇 마디 말로 참으로 많은 것들을 단번에 암시해 주었습니다.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2.7-8; “Let her alone; she had kept this for the day of My burial. For the poor you have with you always, but Me you do not have always.”)
참으로 기가 막힌 말이 아닙니까? 처녀가 시집갈 때 가져가려고 혼수감으로 마련하는 것이 보통인데 예수는 ‘나의 장례식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이니 그냥 놔두라’는 겁니다. 부패한 시체에서 나기 마련인 악취를 가라앉혀 줄 ‘향유’로 돌려 말했던 겁니다.
가룟 유다는 운명적인 희생양이 아니었습니다. 한걸음씩 예수로부터 멀어지고 한 방울씩 예수의 피를 몰래 빨아들였던 겁니다. 자신의 마음을 세상 쪽으로 가까이, 더 가까이 붙이고 자신의 욕망을 더러운 데로 차츰차츰 밀어냈던 겁니다. 알곡으로 곳간을 채우는 대신 타고 남은 숯덩이와 재로 가득히 채워 넣었던 겁니다. 죄악도 질병입니다. 시름시름 앓다가 영영 못 일어나고 말듯이 조금씩 죄악의 구렁텅이로 다가가다가 나중에는 벼랑 끝에서 중심을 완전히 잃고 마는 겁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곁으로 점점 다가가 나중에는 예수의 발에 향기 기름을 쏟아 붓고 삼단 같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흐르는 기름을 예수의 발에 골고루 발랐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 곁에 늘 붙어있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항상 세상의 음침한 골짜기 쪽으로 한 발, 한 발 겁 없이 다가갔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느냐가 생애 전체를 다르게 만듭니다. 어느 쪽으로 다가가느냐에 따라 사람 자체가 달라지고 영혼마저 판이하게 차이가 나고 맙니다. 예수는 이를 두고 하나는 천국 열쇠를 쥔 쪽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노예가 되어 지옥 불구덩이에 떠밀려 들어가는 쪽이라고 말했습니다.
증산은 제 잇속과 제 가족의 잘됨만 생각하다가 사사로운 데에 쏙 빠져들어 상극 세상에서 상생 세상으로 끝내 못 넘어가고 말 한심한 부류라고 했습니다. 상극 세상의 연장, 확대가 바로 지옥입니다. 상생 세상의 출현과 군림이 곧 선경(仙境) 세상이고 후천(後天) 오만 년입니다.
증산의 ‘이타주의적 삶과 공평무사한 정의 사회’가 바로 21세가 화두입니다. 예수의 ‘남의 발 선뜻 씻어주기, 배신자(가룟 유다)마저 한결 같은 마음으로 발 씻어주기’가 곧 21세기 한민족 구원의 신작로입니다. 21세기 화두(話頭)는 애매모호한 고승(高僧)의 화두 잡기, 화두 찾기가 아닙니다. 엄청난 정보의 홍수와 윤리적, 정신적, 육체적 단련 강요에 맞설만한 대단한 초월적 화두, 종교적 화두가 꼭 필요합니다. 대중의 눈높이는 한없이 높아지고 소위 지도층이라는 이들의 눈 높이는 상대적으로 무섭게 낮추어지고 있습니다.
대중이 지도하는 세상이 바로 21세기 세상입니다. 학생이 선생을 가르쳐야 하는 희한한 세상입니다. 대중이 지도층을 인내해 주고 관용해 줘야만 그 자리, 그 월급, 그 영향력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학생이 스승을 눈 감아주고 맞서지 않아야 가까스로 교육현장과 교육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소비자가 기꺼이 사주고 마지못해 써줘야만 공장이 돌고 상인이 돈을 벌고 시장이 제대로 열려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정신연령과 정신력이 가일층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이름 없는 이들의 사고력과 정보력이 이름 난 이들의 그것보다 더 많고 깊고 멉니다. 더 이상은 남녀노소, 사농공상, 고학력 저학력 따위로 사회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20세기까지 유지되어 온 수천, 수만 년의 화두가 완전히 뒤바뀌고 있습니다. 이미 어른 잡는 아이, 남자 이기는 여자, 부모 앞지르는 자식, 선생 그림자 밟고 또 밟아 아예 흔적조차 없애버리는 제자가 즐비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나이가 치욕이나 무능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월의 의미마저 달라지고 있습니다. 나무는 자라나고 굵어지지만 사람은 낡아가고 힘없어지고 쓸데 없어 지는 겁니다. 많아질수록 골치 아프고 농사 망치는 풀 더미와 같습니다. 일거리나 만들고 수확이나 줄이는, 그야말로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잡풀에 그치고 맙니다.
웬만한 것으로는 어느 누구의 심성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대중이 이미 꽹과리와 북을 칠 줄 알고 대중이 이미 나발과 피리를 신나게 불 준비가 다 되어있기 때문에 별 것 아닌 것을 들고는 좀처럼 주목 받을 수 없습니다. 감동을 준다는 것은 아예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고리타분한 쓴 소리 몇 마디로 어른 노릇 자처하던 때는 이미 전설의 고향에서 숨이 끊어진지 오래입니다.
증산의 가르침으로 통일한국을 대비해야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으로 세월이 갈수록 갈라지고 찢어지는 민족성과 한민족 에너지를 찰떡처럼 다시 붙여놓아야 합니다. 멈추거나 지레 사위지 않는 ‘봉홧불 이어 붙이기’로 다시 활활 불태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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