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부와 졸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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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장부 댓글 0건 조회 804회 작성일 09-10-27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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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용사는 좀스러운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영적 전쟁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용사는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는 좀생이 같은 졸장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벤뎅이 마냥 쪼그라든 쪼짜 인생, 퇴짜 인생이 아니라 넉넉하고 여유 있고 배포가 큰 대장부의 안목을 가져야 승리의 삶을 경주할 수 있다.

 

흔히 졸장부는 서로의 차이와 간격을 증오와 배타와 편견과 경쟁의 구실로 막무가내 또는 마구잡이 재단을 한다. 즉 나와 너 사이의 거리를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이해하여 미움, 다툼, 분열의 상극을 초래하는 옹졸한 자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대장부는 나와 너 사이의 간격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이해하는 넓은 안목이 있다. 즉 서로의 간격에 다름이라는 여백을 두어 그 여백을 이해와 사랑과 연합으로 매 꾸어 궁극적으로 다름 안에서 조화를 창출해 낸다.

 

‘어느 날, 몸 지체들이 비상회의를 열었다. 그때 갑자기 코가 일어나 말했다. “여러분! 지금처럼 경기가 어려운 때에 우리 중에 혼자 놀고 먹는 못된 백수가 한 놈 있습니다. 바로 저하고 제일 가까이 사는 입이라는 놈인데, 그 입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는 혼자 다하고, 먹고 싶은 음식은 혼자 다 먹습니다. 이런 의리 없는 입을 어떻게 할까요?" 그 말에 발이 맞장구를 쳤다. "저도 입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 주인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 무거운 몸으로 몸짱 만들겠다고 뛰니 발이 아파 죽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 입이 혼자만 많이 먹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때 손도 말했다. "게다가 입은 건방집니다. 먹을 때 자기 혼자 먹으면 되지 않습니까? 개나 닭을 보세요. 그것들은 스스로 먹을 것을 잘 먹는데, 입은 날 보고 이거 갖다 달라 저거 갖다 달라 심부름을 시키고 자기만 먹습니다. 정말 메스꺼워 견딜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말했다. "이렇게 비판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합시다. 앞으로는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절대 보지도 말고, 냄새 맡지도 말고, 입에게 가져다 주지도 맙시다."


그 제안이 통과되어 즉시 입을 굶기기 시작했다. 사흘이 지났다. 손과 발은 후들후들 떨렸다. 눈은 앞이 가물가물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코는 사방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로 미칠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조용히 있던 입이 말했다. "여러분! 이러면 우리가 다 죽습니다. 제가 저만 위해 먹습니까? 여러분들을 위해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입술도 깨물고, 혀도 깨뭅니다. 그러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서로 협력하며 삽시다." 그 말에 다른 지체들도 수긍하고 예전처럼 자기의 맡은 일을 해서 건강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사람은 다양하다. 재능도 다르고, 성품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양성에 대한 이해는 곧 공동체 정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100명이 모이면 100개의 문화가 공존한다. 하나부터 백까지 나름대로의 개성과 인격과 배경과 환경 등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단지 다르다는 그 다양성의 이유로 배척이 아닌 수용, 미움이 아닌 이해, 다툼이 아닌 화해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용사된 대장부의 바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다름을 그름이나 틀림으로 곡해하여 종국에는 너도 죽고 나도 죽어 패망하는 졸장부적 사고방식은 연자맷돌을 달아 깊디 깊은 태평양에 수장시켜 버려야 한다. 오히려 다름을 상호간의 차이나 다양성으로 해석하고 창조적 발전의 또 다른 동력으로 삼아 종국에는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엑기스를 추출해 내는 대장부의 믿음을 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졸장부는 대개 나를 속 빼내놓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면 금방 삐친다. 전화가 없으면 금새 토라진다. 받는 것이나 건지는 것이 없다면 신경발작 환자가 되기도 한다. 지적을 받으면 바짝 움츠려 들거나 화병이 돋거나 반사적으로 앙갚음을 하기도 한다. 또한 동료가 잘하고 이웃이 잘 되면 배탈로 분풀이를 해대기도 한다. 주위의 눈총에 몰입하다 보니 나를 포장하여 드러내는 가식의 모습을 한다. 반면에 대장부는 나를 속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면 그들만의 좋은 교재가 되길 바라는 여유가 있다. 전화가 없으면 먼저 전화하여 감정을 반전시키는 적극성이 있다. 받으려는 좀생이적 사고 보다는 베풀려는 넉넉함이 묻어있으며 지적을 받으면 겸허히 수용하여 자기점검, 수정, 보안의 호기로 삼아 지속적 성장을 위한 추진력으로 삼기도 한다. 동료가 잘되고 이웃이 잘 되는 것이 내가 잘 되는 상생의 길이라 생각하며 주위의 시선 보다는 한결 같으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안목이 있다.

 

놀부의 좁쌀만한 심장을 가슴 깊이 숨기고 쩨쩨하고 쫀쫀하게 살다가 쪽박차고 종국에는 쫄라당 종치는 졸장부의 인생은 미련하고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흥부의 호박만한 심장을 가슴 깊이 품고 넉넉하고 풍성하게 살다가 대 박을 치고 종국에는 벌러덩 성공하는 대장부의 인생을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크신 하나님께 마음의 중심을 모아야 한다. 세상의 변덕스러운 시선에 이목 집중한다면 결단코 대장부의 넉넉한 인생을 살아 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한결같으신 하나님에 비해 세상은 복 주머니의 양질에 따라 변신과 변심과 변절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크신 하나님께서는 속이 깊은 것에 관심을 두시지만 세상은 얄팍한 겉 모습에 환호하기 때문이고 크신 하나님께서는 내용에 관심을 두시지만 세상은 화려한 형식에 박수치기 때문이며 크신 하나님께서는 실속을 보시지만 세상은 재미에 최고의 관심사를 두기 때문이다.

 

작고 사소한 일에까지 일희일비하는 좀스러운 졸장부의 종치는 인생이 아니라 만유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함으로 언제나 넉넉하고 대범한 대장부로 종국에는 승리의 면류관을 쟁취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