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 그리고 삶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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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삶의 현실 댓글 0건 조회 857회 작성일 09-11-04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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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 이 칼럼에서 독일에서의 정치철학 논쟁을 소개한 바 있다. 이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어 찬반이 교차되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독일에서 사회국가라고 부르는 복지국가의 존재 방식의 문제이다.
 
슬로터다이크 교수가 사회국가의 근본적 변화 가능성을 말하여 화두를 열었다.
 
그가 사회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회의(懷疑)도 복지국가가 만들어놓은 공간에서 벌이는 놀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찬반의 어느 쪽이나 논의 전체가 이 공간의 여유로 하여금 가능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이 논쟁은 그 자체로 부러울 수밖에 없는 사치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것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반드시 이 문제를 되새기려는 것보다,
 
이 논쟁의 여러 관점들에 비치는 정치 행동의 의미를 우리 자신을 위하여 음미해보자는 것이다.

되풀이 하건대, 슬로터다이크 교수가 시사한 것은 복지비용을 세금이 아니라 기부로 충당하는 제도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것은 복지국가를 전복하려는 어리석고 위험한 제안이라는 것이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호네트 교수의 반박이었다.
 
미학자 칼 하인츠 보러러 교수는 다시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그의 글에 담긴 적지 않은 분노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철학자들이 보여주는 ‘우둔한 성실성’, 그리고 ‘좌파 순응주의’ 때문이다.

독일의 복지국가 존재방식 논쟁

그는 니체적인 활력-진부하고 일상적인 것을 넘어 높은 가치를 향하여 도약하는 투쟁의 삶을 좋아한다. 프랑크푸르트 철학자들이 혐오하는 불평등은 그러한 삶에서 자연스러운 부작용의 하나이다. 정치에서의 권력투쟁도 당연하다. 정치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자유는 평등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좌파순응주의는
도덕적 정당성,
보편성,
철학을 내세우면서,
삶의 방식으로
“파시스트적인 것보다는 따분한 것”을 선택한다.

보러러 교수는 이런 협소한 도덕주의에 대조하여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정치적 태도를 든다.
 
하이네가 좋아한 정치구호는 프랑스혁명의 지도자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의 말, “빵은 인민의 권리”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평등과 자유 사이에 존재하는 본래적인 긴장과 갈등을 잘 알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철학자들이 잊어버린 것은 이것이다.

그런데 하이네를 예로 드는 것을 보면, 프랑크푸르트식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지만 보러러 교수가 반드시 우파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것인지 어쩐지는 분명치 않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지 문화부의 파트릭 바너스가 이 글을 평하면서 밝히고 있는 것은 하이네가 열렬한 민중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하이네에 있어서, 생쥐스트의 “인민의 빵에 대한 권리”는 “인간의 신성한 권리”가 되고,
 
쟁취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신적(神的)인 권리”가 된다.
 
이 권리에 기초한 나라는 “모두가 똑같이 영웅이고 똑같이 성스러우며, 똑같이 지복 속에 있는 신들의 민주체제이다”.
 
부자가 빵을 나누어주는 것이 슬로터다이크의 베풂의 사회국가라고 하면,
 
거기에서 “부자가 주는 빵은 입에 쓰고, 자유를 손상할 것이다. 빵은 좋은…당연한 권리에 의하여 인민의 것이다”.
 
 빵은 일한 만큼 나누어 갖는 것이 아니다. “행복과 일이 일한 만큼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은 하이네의 생각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신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하이네는 그의 만년의 신문 기고에서,
그것이 반드시 이성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빵의 권리에서 나오는 혁명의 논리에 사로잡히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정열에 휩쓸리게 된다는 것을 말했다.
 
보러러 교수의 하이네 언급이, 위에서 말한 바과 같이, 그 혁명적 정열을 옹호하기 위한 것인지 어쩐지는 분명치 않다.
 
그가 옹호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삶의 정열이 여러 가지로-기업가의 의욕 또는 혁명적 상상력의 비상(飛翔)으로-여러 다른 정치 지향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그것이 따분한 일상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는 것일는지 모르지만, 삶의 질서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위에 언급한 기고에서 하이네는 공산주의 혁명의 도래를 예언하면서 그 철권 아래 모든 예술-대리석상과 꽃밭과 시가 파괴될 수 있다는 데 대하여 우려를 표명했다.
 
하이네에게 전형적인 혁명의 인간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생쥐스트였다.
 
생쥐스트는 많은 사람에게 정치와 삶의 착잡한 관계를 밝혀주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서 정치는 전적인 선의(善意)와 유토피아적 열망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가 논리와 정렬의 과정에서-그것은 극히 엄격한 금욕적인 것이었지만-완전히 그 반대의 것이 된다.
 
 이것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이 보여주는 생쥐스트이다.
 
생쥐스트는 인민이 빵의 권리를 향수하고 자연의 순진무구한 덕성에 의하여 살 수 있게 하는 정치 체제를 원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사회의 혁명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인생의 참 의미는 구체적 삶속에

그리고 이에 장해가 되는 자들은 가차없이 제거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공포정치와 단두대가 등장한다.
 
이것은 다수의 번영을 위하여 소수를 희생하기 위한 것이다. 생쥐스트의 계산은 아니지만,
 
단두대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의 수는 ‘27만3000명’이다. 정치의 아이러니는 생쥐스트 자신도 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카뮈의 생각으로는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논리를 만들고 철학을 만드는 것은 잘못이다.
 
인생의 참 의미는 추상적 계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김화영 교수가 요약하는 바로는,
 “행복의 욕구, 살고 사랑하고자 하는 열정,
그리고 태양, 바다, 우정, 연민”-이러한 것들에 있다.
 
 물론 사회와 역사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 속의 존재로서의 인간과 일정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카뮈는 이것을 어린 시절의 체험에 옮겨서, “가난이 나에게 불행이었던 것은 한 번도 없다.
 
빛이 그 부(富)를 그 위에 뿌려주는 것이었다”고 썼다. 가난이라는 사회적 조건과 태양이라는 자연 조건 사이에 놓인 것이 그의 삶이었다.

한국 사회에 넘치는 것이 정치적 정열이다. 문제가 많은 사회에 있어서 이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 작은 문제에까지도 이념과 당파적 정열이 동원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러다보면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이 시계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나의 아이디어와 정열이 풀어야 할 우리의 현실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이다. 보러러 교수는 프랑크푸르트 철학자들이 추상적인 개념을 추구하다가 사실의 사실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반드시 맞는 판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추상적 이념의 추구, 그리고 그에 이어져 있는 정열이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 이념과 정열이 범람한 가운데 정치에 대한 냉소적 태도가 커져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