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대통령과 한심한 청와대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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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1,374회 작성일 09-11-13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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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의 청와대 출입기자인 이승관이 쓴 ‘코리아에 반한 페루 대통령 출국연기’라는 뉴스를 봤다. 외국의 대통령이 ‘코리아’가 너무 좋아서 하루 더 묵고 간다고 하니 참으로 반가운 이야기다. 아직 남아있는 단풍 빛과 서울의 역동적인 모습들, 그리고 어떤 대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도도한 한강의 물결은 참으로 아름다우니, 그럴 만도 하다.
흐뭇한 미담기사(?)로 읽고 넘어갈 만도 한데, 나는 이 기사를 한번 좀 살펴보기로 했다. ‘정말일까?’하는 지극히 사적이며 루저(Loser)스러운 궁금증 때문에 말이다.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APEC 때문에 아태지역 정상들이 분주하게 발걸음을 놀리는 이때 한강이 좋아서 하루 더 유람하는 페루 대통령이라… 좀 어색하지 않은가?
할 말이 많은데, 해야 할 말들은 페루 대통령의 체류연장 건 뒤로 넘기고 바로 사실확인부터 시작하겠다.
먼저 페루 국영통신 안디나(Andina)가 한국시각 월요일(11/9) 밤 9:25에 송고한 기사 ‘앨런 가르시아 대통령 한/일/싱가포르 순방(President Alan Garcia begins trip to Japan, S Korea and Singapore)’이란 기사부터 보자.
[한국] 일본에서의 일정을 마치는 대로, 가르시아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빈방문을 위해 도쿄에서 서울로 출발할 예정이다. 대통령은 11일 수요일 청와대를 방문해 공식환영식에 참석하고 이명박과 오찬을 함께 할 예정이다. 대통령은 12일 목요일에 서울에서 한국국제협력단 박대원 대표를 접견하고 한국의 기업대표들과 간담회를 가질 예정이다.
[South Korea ] After completing his visit to Japan, Garcia will depart from Tokyo to Seoul to make a state visit to South Korea. On Wednesday, November 11, the Peruvian leader will be received with honors at the Presidential Palace Cheong Wa Dae. Alan Garcia will meet with his South Korean counterpart Lee Myung-bak, who will host an award ceremony and luncheon in honor of the Peruvian president. On Thursday, November 12, Garcia Perez in Seoul will hold a meeting with the president of the Kore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KOICA, Park Dae Won. He will also meet with entrepreneurs and executives of Korean corporations.
자, 원래 페루 대통령은 10일(화) 밤, 혹은 11일(수) 오전에 서울에 도착해서 ‘국빈방문’의 격식에 맞게 첫날 일정을 주로 청와대에서 정상회동과 오찬으로 채우고, 둘째 날은 기업인을 만나는 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날짜 기억해두자. 월요일까지만 해도 청와대에서 열리는 공식환영식은 한국시각 수요일 오전, 수요일 오전, 수요일 오전에 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음을.
그런데… 페루 대통령이 한국에 수요일 오후 다섯 시에 도착을 해버린다. 이유? 영문? 나도 모른다. 한국에 오기 전에 페루 대통령이 일본을 찍고 거기서 하토야마 총리도 만나고 일왕도 만났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에 11일, 수요일 오후 다섯 시에 왔단 말이다. 네가 다섯 시에 왔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한국 기자들은 워낙에 바쁘셔서 보도를 안 하시지만, 기특하게도 역시 페루 국영통신 안디나(Andina)의 기자 한 명이 아주 상세하게 자기 나라 대통령의 일정을 기록해둔 기사가 하나 있다. 한국시각으로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넘어가는 자정쯤 쓰인 기사를 한번 보자.
[한국시각 12일(목) 0:22] 페루 대통령 한국에서 바쁜 일정 소화 예정
일본에서 일련의 회동 후, 앨런 가르시아 페레즈 페루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개최되는 17회 APEC 회의 참석에 앞서, 한국 시각 수요일(11일) 오후 2:10 도쿄에서 출발해 오후 다섯 시 국빈방문을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도착 두 시간 후, 페레즈 대통령은 SK 등 주요 한국기업대표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간담회는 KNOC에서 주최했으며 한국 국회의원 이상득이 참석했다. 페레즈 대통령은 한국시각 목요일 오전 8:30에 언론인터뷰를 가질 계획이며 오전 10:10 현충탑에 헌화하고 10분 후 청와대를 방문해 사열 등 공식환영행사에 참석한 후 오전 10:45부터 이명박과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11 November, 2009 [ 10:22 ] Peru president has busy agenda in South Korea
[Andina ]After holding a series of meetings in Japan, Peruvian President Alan Garcia Perez departed Tokyo on Wednesday at 00:10 hrs (14:10 Japan time) and arrived in Seoul at 03:00 hrs (17:00 South Korea time) where he is paying a state visit prior to participating in the 17th 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Meeting in Singapore. Two hours after his arrival, the Head of State attended a meeting with CEOs of major South Korean corporations, including SK, Kores, Knoc, LS Nikko and Daewoo International. The event was organized by KNOC with the participation of Congressman Lee Sang Deuk. At 18:30 Peru time (08:30 on Thursday in South Korea) President Alan Garcia will offer an interview to the international press. Then, at 20:20 (10:10 South Korea time), President Garcia will participate in a wreath laying ceremony at the Memorial Cemetery Tower. Ten minutes later, the Peruvian leader will visit the presidential palace of Cheongwadae where he is to be received with full military honors. At 20:45, the Peruvian leader will attend a bilateral summit with his South Korean counterpart Lee Myung-bak.
처음에 소개한 기사와 지금 바로 위의 두 기사를 유심히 보면 페루 대통령의 첫날과 둘째 날 일정이 뒤바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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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초의 기사가 틀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첫날 행사와 둘째 날 행사가 뒤바뀌거나 말거나 하는데 별 관심도 없다. 그러나 이번 페루 대통령의 한국방문은 우리 정부에서 일 년에 서너 번밖에 받지 않는 ‘국빈방문’이라는 최고의 격을 갖춘 접대이므로 최초의 일정이 와전되었을 가능성보다는, 페루 대통령이 뭔가 어떤 이유로 일본에서의 일정이 지연되면서 한국 정부에 외교적 결례를 범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코리아가 좋아서 하루 더 묵고 간다”는 등의 립서비스를 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본다. 왜냐? 국빈방문을 1박2일로 하고, 그것도 저녁 만찬도 없이 오찬하고 가는 그런 국빈방문의 의전이 어디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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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영준의 외교이야기: 국빈방문 의전 바로가기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명박이 페루 대통령에게 외교적 결례를 당했다는 것을 떠들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이명박을 아무리 증오한다고 해도, 대한민국을 방문한 외국의 정상이 국가 간 약속된 일정 하나도 제대로 못 맞춰 결례를 범하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다.
문제는, 나도 이렇게 금방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도대체 왜, 연합뉴스의 이승관 기자는 정확히 확인도 하지 않고 청와대의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에만 의존해서 글을 써제끼느냐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왜 조용히 아무 일도 아닌 듯이 쿨~하게 넘어가면 될 것을 기사에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소위 짜고 치는 고스톱을 무슨 미담기사라도 되는 양 쓰느냔 말이다. 떠들고 말고 할 것도 없고, 페루 대통령이 계면쩍어서 그냥 내뱉은 말이겠거니~하고 넘어가 주면 될 일이지, 청와대 대변인 박선규의 “형제 같았다”느니 하는 말에 넘어가 이런 식으로 무슨 이명박의 지극한 예우에 감동이나 먹어서 하루 더 묵기로 했다는 식의 기사를 쓰느냔 말이다.
명색이 청와대 출입기자이면서, 그것도 제일 먼저 기사 뿌려야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 우라까이(기사 베껴쓰기) 할 수 있다는 걸 잘 아는 연합뉴스 기자란 양반께서, 대한민국을 국빈자격으로 방문한 페루 대통령이 해 떨어질 오후 늦게 한국에 도착해 간담회 하나 갖고, 자고 일어나 다음날 오전에 청와대에서 사열 받고 점심 오찬 직후 한국을 떠나서 싱가포르로 향하는 것을 ‘국빈방문’답다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을까? 누구나, 저녁 만찬으로 이어질 것이고, 밤늦게 싱가포르로 떠나거나, 원래 예정보다 늦게 온 결례를 만회하기 위해 하루밤 더 묵고 가는 이런 정도의 립서비스가 나올 거라고 정말 예상을 못 했을까?
정말 너무나도 사소한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는 진짜 이유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지지자인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히 청와대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대통령이 무슨 일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스토킹을 하고 있다. 예전 노무현 대통령님 때는 그냥 대통령님이 좋아서 했고, 지금은 이명박이 또 무슨 일을 꾸미나 감시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현재 청와대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들은 솔직히 말해 믿을만한 내용들이 별로 없다. 청와대 대변인의 말은 죄다 "오해입니다."로 이어져서 들으나 마나 한 것들 투성이다. 문제는 기자들에게도 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이동관/박선규와 무슨 궁합이 그리 잘 맞는지, 이명박 이미지에 도움되는 기사는 이런 식으로 써제끼면서, 이명박 이미지에 조금이라도 흠이 되는 기사는 입을 닫아버린다. 자, 이 사진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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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http://bit.ly/2PKgwn
지난번 이명박이 캄보디아에 가서 훈센 총리의 안내를 받아 ‘앙코르와트’를 둘러보면서 찍은 사진이다.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님 때 같았으면 4x6 실제 사진 크기로 떡 하니 신문 지면을 장식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제목은 아마도 “정상외교 하랬더니 유람여행간 노통, 채신머리 없이 V자 그리기?” 정도 되었을 거다.
그런데 이 사진… 한국 언론사에서 배포한 곳 있나? 대통령이란 사람이 외국의 세계문화유산 현장에 가서 머리 식히는 와중에 편하게 찍는 사진이라면 V자가 아니라 더 심한 것도 기분 좋게 봐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이명박/김윤옥은 훈센 총리 부부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거다. 아무리 훈센이 큰형님으로 모시는 이명박이라고 해도, 한 국가의 원수라면 다른 국가의 원수와 찍는 사진에서 V자 그려서는 안 되지 않을까? 킬링필드의 원혼들이 울고 있는 앙코르와트에서 저러고 있는 대통령이라니… 슬플 뿐이다. 로이터통신에서 볼 수 있는 사진을 한국 언론사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상황이 서글플 뿐이다.
제발, 청와대 기자들에게 부탁한다. 당신들이 불과 3~4년 전 들이댔던 그 날카로운 펜촉을 스스로 부러뜨리지 마라! 청와대를 향했던 당신들의 그 무서운 비판정신을 흐트러뜨리지 말아달라!

재밌는 사족 하나 더: 태국 총리를 하다가 부패 스캔들로 군부쿠데타에 의해 쫓겨난 탁신이 얼마 전 훈센 캄보디아 총리의 경제고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훈센의 경제고문 출신으로 그의 큰형님 대접을 받으며 한 나라의 수장이 된 기업인 출신 정치인이 한 명 더 있습니다. 바로… 이명박이죠. 역시… 초록은 동색… 맞습니다. 재밌는 인연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