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을 바라는건 사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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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그들에게 댓글 1건 조회 1,079회 작성일 10-05-0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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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장…그들에게 청렴을 바라는건 사치일까?
`내맘대로 권력` 비리DNA는 구조적인 문제
민선4기 10명중 4명꼴 기소…수법 점점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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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위조 혐의로 검거돼 조사받고 있는 민종기 당진군수. 아래는 2011년 준공 예정인 당진 신청사 조감도.
"최근 잇달아 불거진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비리 문제는 이미 15년 전에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지방자치제도가 견제 및 감시장치 마련 등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시행됐기 때문이다."

1995년 당시 내무부에서 지방자치제 도입 업무를 담당했던 행정안전부 공무원 A씨의 고백이다. A씨는 "일단 광역단체에 시범적으로 도입해 문제점 등을 충분히 점검한 후 기초단체로 확대하는 것도 늦지 않다고 담당 공무원들이 끊임없이 보고했으나 정권 핵심부가 철저히 묵살했다"면서 "정당공천제 폐지 등 단체장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다양한 대책도 실무선에서 논의됐으나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A씨는 "YS정부 시절 시대적 분위기가 지방자치제도의 부작용은 돌아볼 틈도 없었고 무조건적인 시행이 `절대 선`처럼 여겨졌다"고 말했다. 성급한 제도 도입은 결국 많은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지자제가 시행된 지 15년이 됐지만 단체장 비리사건은 더 증가하고 수법도 점점 대담해지고 있다.

실제 뇌물 수수 등 혐의로 기소된 기초단체장은 민선 4기에만 94명(전체 230곳 단체장 가운데 40.9%)에 이른다. 기초단체장 10명 중 4명에 해당한다. 민선 1기 23명, 2기 59명, 3기 78명에 이어 큰 폭으로 증가한 수치다. 심지어 경북 청도군과 청송군, 경남 창녕군, 충남 연기군에서는 민선4기 때 각 2명의 군수가 연거푸 비리 혐의로 퇴진해 지역주민들이 세 번 선거를 치르기도 했다.

지방행정 전문가들은 이 같은 파행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몰고 가서는 안된다고 분석한다. 이들의 독주를 컨트롤 할 수 없는 현 시스템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 아무도 못 건드리는 무소불위 권력

단체장들은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은 채 인허가권, 인사ㆍ조직권, 예산집행권, 단속권 등 4대 권한을 휘두르면서 어느 순간 `지역 대통령` `지역 영주`로 군림하고 있다. 인허가권은 그들 권한의 중심에 있다. 건축 허가, 토지용도 변경 등 부동산 관련 핵심 인허가권을 모두 기초단체장이 갖고 있다. 최근 뇌물 수수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위조 여권으로 출국을 시도하다 체포된 당진군수는 건설업체에 36가구를 추가로 건축할 수 있는 특혜를 주고 아파트를 받았다.
 
예산 집행권도 막강하다. 단체장들은 주로 지자체 예산으로 관급사업을 발주하면서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해남군수는 군이 발주한 26억원 규모의 땅끝마을 관광지 야관경관 조명 공사를 특정 업체가 수주하도록 해준 대가로 이 회사 대표에게서 1억5000만원을 받는 등 3곳에서 현금 1억9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경찰수사를 받고 있다. 한술 더 떠 영양군수는 자신이 대주주인 건설사에 27건 30억원 규모의 공사를 몰아준 혐의로 적발됐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 인사권 쥐락펴락…대놓고 매관매직

승진을 앞둔 모 기초단체 6급 직원 B씨는 단체장의 개인 집사나 마찬가지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온갖 궂은일을한다. 이것도 모자라 자신의 부인까지 단체장 집안 일을 돕는 데 동원하고 있다.

지자체 공무원들은 단체장 눈 밖에 한번 나면 승진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하고 사업소 등을 전전해야 한다. 서울 한 구청 공무원은 "인사에 대한 전권을 단체장이 쥐고 있는데 지자제 시행 이후 지자체 간 인사 교류마저 끊겨 구청장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한다"면서 "기초단체 공무원들은 `아전(衙前)` 신세"라고 했다.

선거 때만 되면 공무원들의 줄서기 행태도 매번 되풀이된다. 돈다발을 갖다 바치는 것은 가장 손쉬운 일이 됐다. `사무관 승진=5000만원 상납`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와 관련해 박성철 전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 "6급 공무원이 5급으로 승진하기 위해 단체장에게 행정직은 5000만원, 기술직은 1억5000만원의 돈을 건네는 `매관매직`이 지자체에서 성행하고 있다"고 폭로해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 "내 돈 드나…" 과시성 행사에 돈 물쓰듯

직원 봉급 줄 돈이 없어 빚을 내는 형편인데도 청사 치장에 돈을 물 쓰듯 하고 단체장 치적을 알리기 위해 낭비성 행사에 예산을 쏟아부어도 마땅히 제재할 방법이 없다. 실정법을 어기지 않는다면 견제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온갖 추문으로 지탄을 받아도 임기는 끝까지 보장된다. 경남지역 기관장 4명이 기업인들에게 접대 골프를 받은 사실이 드러나 이 중 3명이 옷을 벗었지만 유일한 지자체장인 창원시장은 아무런 징계 없이 현직을 유지하고 있다. 단체장을 감시하는 지방의회는 자질 시비에다 잦은 비리 연루로 제 코가 석자다.

이런데도 단체장 권한은 국가사무 지방 이양을 통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행안부에 따르면 지자체 사무는 2002년 말 기준 광역과 시ㆍ군ㆍ구가 각각 2365개, 2370개에서 2009년 말 각각 3854개, 3888개로 크게 증가했다. 또 정부의 예산편성지침과 정원승인제도 사실상 무력해져 단체장 멋대로 예산을 쓰고 인원을 늘릴 수 있는 구조다. 여기에다 3연임을 법이 보장하고 있어 표만 얻으면 내리 12년간 독주를 할 수 있다. 3연임을 한 단체장은 민선 4기까지 무려 39명에 이른다.

★ 비리 한술 더 뜨는 정당공천제

단체장에 대한 유일한 견제수단인 정당공천제는 되레 `비리 왕국`을 부추기는 주범이 되고 있다. 전례 없이 돈뭉치 추문이 잇따르고, 지역마다 `제 사람 챙기기`에 `낙하산 논란`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후보자 난립에 따른 과다 선거비를 억제하고 후보의 사전검증이라는 애초 제도 취지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최근 이기수 여주군수가 자신의 지역구 국회의원인 이범관 한나라당 의원에게 현금 2억원이 든 쇼핑백을 슬쩍 건네려다 이 의원의 신고로 현행범으로 체포된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방의원까지 돈 챙기기에 혈안이 됐는데 C지방의원은 시장입후보 희망자에게 조직운영경비 명목으로 5000만~1억원을 요구해 경찰이 수사에 나서 발각됐다. 여의도에선 기초단체장 공천을 위해선 `7당(當)6락(落)`(7억원 공천, 6억원 낙천)이란 말까지 나돌고 있다. 익명의 정부 관계자는 "지방자치제도의 후퇴라는 일각의 반발도 있지만 다소간 견제시스템을 갖춘다고 지자제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청렴성을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