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사상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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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명 댓글 0건 조회 781회 작성일 10-07-12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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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명 조식의 생애
조식은 1501(연산군7) ~ 1572(선조5)년의 사람으로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건중(榩仲), 호는 남명(南冥), 생원안습의 증손으로, 승문원 판교 언형의 아들이다.
①한양거주시대 : 기초학문 학습 및 과거 준비 시기 / 26세 이전
②산해정 시대 : 성리학에 침잠하던 시기 / 30~ 45세
③뇌룡정 시대 : 성리학을 자기화 하던 시기 / 48세 ~ 61세
④산천재 시대 : 남명학을 완성하던 시기 / 62세 ~ 72세
남명은 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거기에서 5, 6세 정도까지 자라다 부친이 과거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하게 됨으로써 한양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한양에서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를 보냈다. 26세 때 부친상을 당해 고향 삼가에서 삼년상을 치른 뒤, 서울로 가지 않고 의령 자굴산 명경대 밑의 암자에 들어가 1년 남짓 글을 읽었다. 그러다 처가가 있는 김해로 내려가 약 15년 동안 학문에 깊이 침잠하였다. 그리고 45세 되던 해 모친상을 당하여 역시 삼가에서 삼년상을 치른 뒤 김해로 가지 않고, 삼가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강학하며 약 13년을 보냈다. 그리고 61세 때 다시 현산 청군 시천 면으로 이사를 하여 그곳에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2년을 살았다. 최석기 - {나의 남명학 읽기} - 경인문화사, 2005 .(P 37, 38, 39)


2. 남명 조식의 제자들
남명은 그 당시 한심한 나라의 형편을 크게 걱정하고 어떻게 하면 왜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할 수 있을 것인지, 그 방안을 말해 보라는 시험을 제자들에게 내었다.
제자들이 말하고 써내는 방책을 보고 충성스런 마음을 격려했다. 남명이 염려했던 대로 왜란이 일어났다. 남명의 제자들은 벌 떼같이 일어났다. 하나같이 목숨을 바칠 각오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의 대부분이 남명의 제자였다. 그 숫자는 수십 명에 이른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분은 홍의장국 곽재우다. 장군은 의령출신이며 남명의 외손서(외손녀의 남편) 이기도 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가면 자신이 대장임을 알리기 위하여 늘 빨간 옷을 입었는데, 그래서 얻은 별명이 홍의장군이었다.
김 면은 공을 세워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전쟁 중 죽었다. 그 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남명의 제자 중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 중의 하나에 정인홍이 있었다. 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곧 성주에 쳐들어가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3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함안 일대를 방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