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구와 장관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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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1건 조회 1,493회 작성일 10-09-0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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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정의(正義`Justice) 열풍'이 거세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은 3개월 만에 32만 부가 팔렸다.
 
골치 아픈 책을 선호하지 않는 우리 독서 풍토에서 딱딱한 인문철학서가 불티나게 팔려나간 것은 뜻밖의 일이다.
 
정의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이 시대 상황이, '정의란 무엇인가'란 직설적 제목을 단 책을 독자들이 집어들게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시청률 40%를 넘은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인기 이면(裏面)에도 정의란 코드가 녹아 있다.
 
불륜에 의한 출생, 어린 시절의 불행 등 역경을 딛고 주인공 김탁구는 어엿한 제빵인, 탁월한 경영인 그리고 훌륭한 인간(人間)으로 성장한다.
 
 김탁구가 어머니와 스승 팔봉 선생으로부터 배우고 깨달은 교훈은 '마지막에는 착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신념이 있기에 주인공은 나쁜 인물들의 방해를 뚫고 삶을 개척해 나간다. '정의는 언젠가는 꼭 이긴다'는 드라마의 스토리 자체가 사람들을 TV 앞에 모이게 하는 것이다.
 
정의에 열광하는 이 시대의 흐름을 읽었는지, 이명박 대통령도 국정의 화두로 '공정한 사회'를 들고나왔다.
 
앞으로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공정한 사회라는 원칙이 확고히 준수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공정한 사회가 어떤 사회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이 시점, 대한민국에서 왜 정의에 대해 사람들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정의를 그 밑바탕에 깐 공정한 사회가 국정의 지표가 되는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한다면 이 시대, 우리 사회가 그리 정의롭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정의를 갈구(渴求)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샌델 교수가 진단한 것처럼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 정의에 대한 배고픔과 갈증이 있겠지만 2010년 대한민국은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더더욱 심하기에 정의에 대한 열풍이 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의 본질을 평등이라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 등 정의론(正義論)을 설파한 이들이 많지만 정의의 의미는 간단명료하다.
 
 '똑바로 세워진'(upright)이라는 이 말의 어원과 한자 바를 정(正)자에서 정의의 참뜻을 찾을 수 있다.
 
바르고 똑바로 세워지는 것은 정의가 이뤄지는 것이고, 바르지 않고 넘어지고 엎어지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는 말이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보면 최근 우리 사회에선 정의롭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위해 불`탈법을 저지른 인사들이 총리나 장관 후보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정의롭지 않다.
 
 사리사욕을 채우려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한 사람들이 높은 자리까지 오르며 '잘나간다'는 것은 정의가 아닌 것이다.
 
행정고시 폐지도 정의 실현이 공정한 사회의 요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많다.
 
 행정고시 대신 필기시험 위주인 5급 공채와 각종 자격증과 학위를 가진 외부 전문가를 상대로 서류`면접을 보는 '5급 전문가 채용시험'으로 바꾸겠다는 것은 공직사회 개혁이란 작은 성과는 거둘지 모르겠다.
 
 하지만 공정한 사회에는 역행하는 처사다. 자격증이나 학위, 전문 분야 경력을 충족할 수 없는 지방이나 돈 없는 서민층 자녀는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류층에 특혜를 주는 음서제(蔭敍制) 부활이란 따가운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평등을 정의의 본질로 파악한다면 행정고시가 '5급 전문가 채용시험'보다 훨씬 정의롭다.
 
1천여 년이 넘도록 과거제(科擧制)가 이어졌고, 이후 행정고시로 바뀌어 그 정신과 형식이 유지된 힘은 기회의 평등, 더 나아가 정의의 실현에 있다.
 
가난한 집안이지만 아이들을 열심히 공부시키면 출세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사다리 역할을 과거제, 행정고시가 했기에 오랜 세월 지속된 것이다.
 
그런 사다리를 없애겠다는 것은 정의롭지 않은 일이다.
 
사퇴한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채 사건은 현대판 음서제 부활의 신호탄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물론 정의가 뒷걸음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더욱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