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세론의 함정과 김문수의 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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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개꿈꿔 댓글 1건 조회 1,039회 작성일 10-12-08 20:59본문
한 장 남은 2010년의 달력. 대포폰과 민간인 사찰, 천암함 폭침, 연평도 포격, 한미 FTA 재협상 타결, G20 정상회의 개최 등 유난히 숨가빴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내년이면 차기대선 레이스가 기지개를 켤 것이다.
박근혜 대세론에는 어떤 암초들이 있을까? 과연 박근혜는 그런 암초들을 피해 끝까지 순항할 수 있을 것인가? 박근혜 대세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은 또한 어떤 시대적 소명을 띄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주제의 글들을 구상하고 있고 새해에 올리려 계획하고 있다. 그 이전에 쓰여지는 몇 편의 글들은 본 편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 같은 것인데,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데 있어 하나의 전제론적 성격을 띄게 될 것이다.
이 글은 그 중 첫번째 꼭지로서 김문수 지사의 가당찮은 개꿈을 다룬다.
김문수 경기지사가 지난달 22일 대한민국 건국회 초청강연에서 한 발언. "전 세계에서 이명박처럼 도시계획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이승만, 박정희, 세종대왕, 정조대왕과 비교하고 반만년 역사를 돌아봐도 최고의 도시계획과 건설역량을 지녔다. 오바마, 간 나오토,후진타오 중 누가 이명박 대통령처럼 건설과 도시계획을 잘할 수 있느냐."
필자는 그래도 김문수 지사를 한나라당의 몇 안 되는 괜찮은 지도자 중 한 분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발언을 볼 때 경기지사 자리도 그에겐 과분하다. 두 가지로 나누어 그의 발언에 담긴 문제를 짚는다.
하나는 말 자체의 논리적 모순, 다른 하나는 그런 발언의 바탕에 깔린 시대착오적 의식 수준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극찬하든 폄하하든 그것은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명박이 언제 어디에 어떤 도시계획을 했으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훌륭한 결과물을 가져왔는지 근거를 가지고 말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명박이 무슨 도시계획을 했는지 도무지 알지 못 하는 것이 아둔한 필자뿐인가? 그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황당무계한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혹여 그리 생각하는 유일한 근거가 위장대운하, 4대강 사업을 번개불에 콩 구워 먹듯 강행하는 것에 감동 먹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거대한 보를 줄줄이 만들고 강바닥의 암반을 굴착하여 강을 누더기로 만드는 일을 유사 이래 그 누구도 하지 않은 위대한 일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주장만 있고 논거가 없는 이런 워딩을 태연히 하는 그의 사고수준이 나는 의심스럽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꿈꾸는 자라면 그런 고딩만도 못한 질 낮은 발언을 함부로 해서는 곤란하다.
더하여 그가 열거한 인물들은 동일선상에서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수원화성을 기획한 정조, 2백만호 주택건설을 추진한 노태우 정도면 역사상 도시계획의 비교 대상이 될 만하지만, 도무지 이승만, 세종, 오바마, 후진타오가 도시계획과 무슨 연관이 있어서 비교한다는 말인가?
서울대 씩이나 나온 사람이 요 정도 상식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무식찬란한 말을 할 때는 다른 의도가 있을 것.
그것은 아마도 도시계획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이명박 대통령을 극찬하기 위함에 방점이 있을 것이다. 그냥 대충 "이명박은 세종보다 위대한 인물이다",
그렇게 알아 먹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 물론 그 말은 대국민용이 아니라 저 높은 곳에 계시는 한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으므로.
그것은 그가 대통령의 눈에 들어 친이계의 구심점이 되고자 하는 야심, 그로써 한나라당의 다수파인 친이계를 등에 업고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전대표를 눌러 보겠다는 야망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보아 무방한 것이다.
친이계의 핵심인 이재오를 뛰어넘어 확실한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는 세종까지도 명박의 발 아래 깔아 주어야 대통령을 감동 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아유, 이쁜 내 새끼, 내 후계자!' 그렇게.
그런데 그런 발상 자체가 참으로 한심한 구시대적 발상이다. 대통령의 눈에 드는 것이 경선을 통과하고 대선에 당선되는 보증수표라는 생각. 국민을 대통령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장기판의 졸쯤으로 여기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그렇지 않다면, 김태호가 총리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그가 중국의 후계자 양성방식을 찬양했던 것에 비추어, 일당독재의 사회주의식 후계자 육성방식과 자유민주국가의 지도자 선출 방식을 크게 혼동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눈으로 확인한 사실 하나. 지난 탄핵정국에서 치른 총선 당시의 박근혜. 그리고 이번 지자체 선거에서 유시민과 김문수의 유세에 몰린 청중의 반응. 그 수의 크고 작음은 차치하고 열광의 정도를 비교해 본다.
박근혜의 그것을 백(100)이라 할 때, 유시민은 20 이상, 김문수는 1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박근혜는 몰려든 청중을 뚫고 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열광적 성원을 받았고, 유시민은 사인공세에 시달려 차에 오르는 데 많은 시간을 지체하였던 데 비해,
김문수는 그런 자발적 열광이 거의 없었다. 한편 지난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지지연설을 위해 박근혜가 다시 유세장을 찾았을 때, 시민들은 그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볼 따름이었지만.
무릇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국민들의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열광적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적 요소이다. 비록 지역적 편중이 다소 있긴 하였지만 선생이란 칭호로 추앙받았던 김대중이 그러하였고,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주고받게 한 노무현이 그러하였으며, 미국의 오바마가 그러하였다. 그 점, 이회창이 두 번이나 대선에서 고배를 마시게 한 중요한 원인이다. 이회창에겐 그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열광이 없었던 것이다.
나의 이런 지적을 가벼이 여기고 정치공학적 접근에만 몰두한다면 그것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아둔함이다. 김문수는 당내경선만 통과하면 대선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도 그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지난날 홍사덕과 박근혜가 당대표 자리를 두고 다투었을 때, 대의원들은 총선에서의 득표력에 초점을 맞추어 박근혜를 대표로 선출하였고 그 선택이 옳은 것이었음이 곧바로 드러났다.
이런 전례는 차기 대선의 당내경선에서 대의원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 강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물론 정치사찰을 동반한 갖은 방해와 정치공작을 자행하고, 지난 대선에서처럼 의원들을 줄 세우며 여론을 조작하는 따위의 일들을 벌이겠지만. 따라서 박근혜 대세론의 순항이 순탄치만은 않겠지만.
현재의 친이계라 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권력을 좇는, 권력 주위에 몰려 든 부나비같은 허상일 뿐. 김문수는 그 허상에 목을 메고 있는 것이다.
국민을 섬기는 정치. 국민을 감동 시키고 자발적 열광을 이끌어내는 정치가 아닌, 정치적 역학관계에 몰두하는 정치는 구름 위에서 노니는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다. 대선의 꿈은 한 줌도 안 되는 정치인들끼리의 조찬회동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국민은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앞서나가고 있다. 그대들이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든 말든, 국민을 하찮은 졸로 보든 말든, 국민들은 주판알 튕기기에 여념이 없는 그대들보다 훨씬 나라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는 말이다.
대통령을 향해 속 보이는 추파를 던지는 김문수, 말도 안 되는 얄궂은 워딩을 내뱉는 김문수, 국민의 마음에 잠재된 말 없는 요구와 기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김문수. 그대의 대선을 향한 꿈은 개꿈에 지나지 않는다.
좀 그림이 되는, 그런 경쟁자의 출현을 기대한다. 그래야 국민이 한나라당에 실망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래야 나라가 제 갈길을 갈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