得民心론과 失民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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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고라 댓글 0건 조회 771회 작성일 13-12-1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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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得民心론과 박근혜 정권의 失民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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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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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건국 년 한이 65년으로 아직은 나라역사가 짧다. 그나마 건국정부인 이승만 정권의 무도한 전횡과 이어진 독재정치는 나라의 민주주의를 빈사 상태로 만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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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정권의 만행과 전횡은 국민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국정을 농단 하다가 결국엔 정권 연장에 혈안이 된 나머지 3.15 부정선거라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라의 정체성인 민주주의가 허물어진 것이다.

 

결국 국민의 분노는 민중혁명으로 폭발 하였다. 지금의 60대 이상의 세대는 도심지 거리에서 민중의 그 분노를 생생히 목격한 세대이다.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열한 부정선거와 민주주의를 말살한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자는 인간들이 있다.

 

이 한심한 인간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종류가 다른 것이란 말인가?  독재정권 수구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민주주의, 편의주의적 민주주의 인식을 나는 경멸 한다.

 

4.19 민중혁명 당시 퇴계로 변에 살던 나는 수시로 동네 아이들과 혹은 혼자서라도 거리에 나가 시민들의 분노의 행진과 함성을 목격 하였다.

 

하루는 짧은 초봄의 해가 지던 어스름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벼락이 치는 듯, 함성과 함께 수십대의 타악기가 동시에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듯 거대하고 장엄한 소리가 동네의 지축을 흔들었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숙제를 하다가 총알 처럼 대문을 박차고 거리로 튀어 나갔다. 60대로 접어든 지금도 그 광경이 너무도 생생하다. 그것은 장엄한 민중의 교향곡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시뻘건 소방차 물탱크에 새카맣게 젊은이들이 붙어 앉아 작대기, 몽둥이 따위를 들고 일제히 구호와 박자에 맞춰 물탱크를 두드리고 있었다. 소방차는 서행 하고 거리의 시민들은 박수치고 환호하였다.

 

“독재정권 물러가라!!! 이승만은 물러가라!!!!”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말러의 천인 교향곡, 드볼작의 신세계 교향곡,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 등 그 어떤 장엄한 교향곡도 그 때 민중들이 퇴계로에서 만들어낸 4.19 민중교향곡의 감동에는 미칠 수 없다.

 

거리 민중의 함성과 소방차 위의 민중의 구호 그리고 수십 개의 막대기, 몽둥이가 물탱크를 두드리던 소리가 어우러져 퇴계로 거리는 장엄한 교향곡이 울려 퍼지던 역사의 공연장이 된 것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최근 영화 ‘레미제라블’의 프랑스 민중혁명 장면을 연상 해 보면 대충 그림이 잡힐 것이라 본다.  

 

그로부터 일년후의 일이지만, 군사반란을 일으킨 군사정권에서는 3.15 부정선거의 총책이던 ‘최인규’내무장관을 법의 심판대에 세워 교살 하였다.

 

그 때 최인규라는 이름 석자는 아이들에게까지 회자되어 다들 알고 있었다. 부도덕의 대명사처럼 불리웠던 것이다. 그런데 정치 집단은 왜 욕하면서 배워가는 것일까?

 

2년간의 군사정권 후에 수립된 박정희 정권에서는 이후 숫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 1971년도 대선에서는 3선 개헌 후 다시 도전한 공화당 정권이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던 김대중 후보와 싸우던 대선 판에서 7백 억 원가량의 선거비용을 썼다는 주장이 회자 되었다.

 

국민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다 정권의 실세들 입을 통해서 나온 얘기인 것이다. 1970년도의 국가예산은 약 6 천 억 원 가량 이었다. 그 대선에서 김대중후보는 90만표의 차이로 패했다.

 

군사반란을 원조로 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독재 수구주의자들은 흔히 ‘이성계의 쿠데타’를 내 세워 군사 구데타의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 하려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경상도  지방의 무슨 대학교수라는 者가 ‘시대는 군사 쿠데타를 부른다’는 글을 SNS상에 올려 사방에서 욕을 먹고 매도 당하는 일이 생겼다.

 

그 자는 명색이 정치,외교학의 교수라고 하는데, 그런 정도의 인식으로 대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참으로 한심한 교육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상한 것은 확실한 국가반란 조장발언에 정부여당과 친여 언론들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석기를 찜쪄먹을 수작에 그들은 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 아무튼 그런 부류들은 ‘왕조시대의 군사 쿠데타를 현대국가인 대한민국에 접목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이른바 군사 쿠데타의 당위론이다. 말도 안 되는 무식한 수작이지만 얘기가 나온 김에 한민족 군사 쿠데타의 원조인 ‘이성계’를 생각해 보게 된다.

 

잘 알려진 대로 이성계는 탁월한 무인이었다. 북으로는 여진족, 남으로는 왜구(일본족)들을 침략하는 족족 섬멸하여 고려왕조의 원로 최영장군과 함께 고려왕국 군사력의 양대 축이었다고 한다.

 

무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기민하고 영민하며 담대하여 무인으로 대성할 소질을 타고났다. 그는 국가의 지도자급 무인으로 손색이 없는 치적과 자질의 인물 이었다.

 

고려왕조의 충신이랄 수 있는 그가 흉중에 군사반란을 통한 정권 탈취의 꿈을 가꾸고 있었는지는 그 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다. 하지만 여러 사료를 종합해 분석해 보면 그는 최소한 후안무치한 정권 탐욕자는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쿠데타 세력들처럼 흉중에 정권 탈취의 꿈을 키워 오랫동안 후방의 요릿집 등 술집에 모여 국가반란을 위한 역적모의를 했다는 사료는 전혀 없다. 이성계의 쿠데타 동기가 된 요동정벌 정책에서 최영과 이성계의 견해가 엇갈렸다.

 

최영은 강직한 성품대로 요동에서 명나라를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 이었고 이성계는 현실적으로 명나라에 대적할 수 없다는 외교정책의 이견이 결국 이성계의 쿠데타로 이어진 것이다.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명을 어긴 국사범이 된 이성계가 택할 길은 군사 쿠데타 밖에 없었다. 한민족의 역사가 그의 피치 못할 선택을 긍정 했거나 용인 했는지는 학자가 아닌 내가 따져 볼 사안이 아니다.

 

왕씨 왕조 고려왕국 400년 차에 왕국은 쇄락의 길을 걸었다는 역사의 평가도 있기는 하다. 나는 일 국민의 입장에서 박근혜 정권 1년을 지켜보고 시나브로 실민심(失民心) 하는 정권에 너무 실망 하였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국민의 민심을 잃고 성공한 정권이 없었다. 당연한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왕조의 쿠데타 정권을 세운 후 늘 아들 방원을 비롯한 측근들에게 강조한 것은 득민심(得民心) 론 이었다.

 

동양의 정치철학은 이미 중국의 노장철학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이성계의 정치철학이 있다면 득민심(得民心)과 태강즉절(太剛則折)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정권은 백성의 민심을 얻어야 하고 지나치게 강하게 나가면 부러지는 것이니 늘 유연한 정치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아들 방원에게 주지시키고는 하였다.

 

이성계는 쿠데타 정권에 거슬리는 고려의 충신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죽이는 아들 방원에게 진심을 다 해서 득민심과 태강즉절을 이해시키고 타일렀다.

 

백성이 없이 국가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따라서 백성의 민심을 얻지 못하는 정권은 국가 경영의 동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결국 정권에 냉담한 백성 따로, 정권 따로 놀게 되어 국가는 망망대해의 일엽편주의 신세가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 이었다. 이것은 국민이 곧 국가라는 현대 민주주의 원칙론에 부합하는 논리인 것이다.  

 

일필휘지(一筆揮之)와 같은 맨탈의 소유자인 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백성 친화론이 우유부단으로 비춰질 수 있으며 이는 백성들이 정권을 만만하게 볼 소지가 있어 정권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론으로 정권에 비협조적인 인물들에 대한 과감한 척결을 주장하며 늘 이성계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같은 쿠데타 세력이지만 이성계와 아들 방원의 패러다임은 크게 차이가 있었다. 비록 쿠데타를 감행 했으나 이성계는 백성을 친화적으로 포용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정권을 지지하게끔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고 기왕에 잡은 정권의 동력을 잘 살려서 국가중흥에 이바지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백성들은 이성계 정권에 냉담 하였다. 특히 지식인계층인 선비계층에서 일절 협조를 거부하고 비폭력 저항주의로 나갔다.

 

이성계는 고려의 원로, 중진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자 수도 송도에서 과거시험을 치뤄 신진 선비들을 등용할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72명의 과거 응시자가 시험장에서 집단 퇴장을 감행 한 것이다.

 

몸소 시험장에 참관 했던 이성계는 아연실색하여 할 말을 잃게 되었다. 지식인들인 선비의 지지를 못 받는 군주의 비참한 처지로 내 몰린 것이다.

 

쿠데타 주체세력과 왕의 비서에 불과한 승지 따위들과 하급관료들만 데리고 나라의 중흥을 꽤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기라성 같은 인재들과 함께 나랏일을 도모 하려고 무한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고려왕조의 젊은 선비들까지 등을 돌리는 등 고려왕조의 충신들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상심한 이성계는 며칠씩 밤잠을 설치고 입맛을 상실하며 고민의 나날을 보냈다. 고려왕국의 대석학이며 나라의 큰 기둥인 목은 이색의 마음을 잡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으나 실패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색의 제자였던 강경파 기회주의자 정도전과 아들 방원에 의하여 이색은 독약을 탄 술을 마시고 여주로 향하던 나룻배에서 죽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성계의 울분과 상심은 그를 삼일씩이나 몸져눕게 만들었다.

 

이성계가 쿠데타 정권 수립 후 백성의 민심을 얻으려던 눈물겨운 노력은 결과적으로 백성을 짝사랑 하는 식이 되어 갔다. 그가 폭압 무도한 인물이었다면 그쯤에서 현대판 캄보디아의 독재자 폴포트와 같이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식하고 무도한 인물이 아니었다. 왕조시대에도 국가의 주인이 백성임을 인식한 군주였다. 그는 타고난 무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높은 지성의 지식인 이었던 드골과도 같은 인물 이었다는 것이 나의 분석이다.

   

이성계는 당시 노인으로 접어드는 나이인 54살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나이 44살의 젊은 군인 이었던 박정희 소장과는 십년의 세월을 격하고 정권을 잡은 것이다.

 

나는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이성계가 정권욕에 사로잡혀 기획하고 의도한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는다.  

 

젊은 육군소장 박정희는 무혈쿠데타에 성공 하였다. 나름대로는 힘들었다고 할지 모르나 서부전선(그로부터 십년 후 내가 근무했던 전선이다)의 해병 2여단이 김포를 거쳐 한강대교를 넘어 오므로서 무혈 쿠데타는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육군참모 총장 장도영의 좌고우면 했던 기회주의와 대통령 윤보선의 암묵적 동의가 쿠데타 성공의 큰 요소가 되었다. 여기서 쿠데타 세력의 이른바 5.16 혁명론의 허구성을 잠시 짚고 넘어 가고자 한다.  

 

혁명과 쿠데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부류들은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포장 한다. 군사반란이기 때문에 혁명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또한 아이들 말로 혁명이라 포장하면 좀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혁명과 쿠데타는 본질적,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구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혁명은 국가체제의 변혁이고 민중의 의사를 선취 혹은 후취할 수 있어야 한다. 쿠데타는 체제의 변혁 없이 체제 내의 정권 탈취 행위이다.

 

이성계의 난이 현대적 관점에서 쿠데타일 수밖에 없는 것은, 고려왕조를 폐하고 조선왕조를 바로 세우지 않았다는데 있다. 이성계는 쿠데타 성공 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 하였다. 체제내의 정권 탈취인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운 것을 그로부터 4년 후의 일이다.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윤보선의 대통령직을 보장 하였다. 그렇다면 민주당 정부의 정통성은 유지된 것이다. 다만 장면 내각을 사퇴 시키고 국가재건 최고위 내각을 세웠을 뿐이다.

 

나는 이른바 5.16 쿠데타 옹호론자들에게 이점을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라역사는 결코 왜곡되거나 곡필 될 수 없는 염연한 역사적 사실만을 기록해야 한다. 왜인들처럼 아이들 교과서에서부터 무문곡필을 하다보면 그 나라 역사는 허구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정작 이 토론 글에서 논하고 싶은 것은 정권의 득민심론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어떠하였을까? 박정희 정권은 무혈 쿠데타에 성공하였다.

 

피가 튀고 살이 난분 하는 유혈 쿠데타가 아닌 담에야 민심을 얻기 위해서라도 쿠데타 세력의 성격이 과격해야 할 필요성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은 관대하지 않았다.

 

피가 튀고 살이 난분하지는 않았으나 혁명과업의 이름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민들이 법의 이름으로 교살 당하거나 감옥에 처 박혔다. 우선 생각나는 인물이 민족일보를 창간 운영한 자금을 조총련에서 가져 왔다고 허위의 혐의를 씌워 32살의 장래가 촉망되던 나라의 인재를 교살 시켰다.

 

그는 사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들은 100억 원에 가까운 국가 배상금을 받았다. 진주 지방 출신의 나라 인재의 목숨과 돈 100억 원과 맞바꾼 셈이 되었다.

 

남북의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논설인이 십년의 징역을 받기는 다반사였다. ‘우리의 소원은 평화 통일’이라는 동요도 있고, 박정희 유신정권은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며 ‘우리 민족끼리의 평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제반 조치로 유신변혁을 한다고 공언 하였는데 5.16 당시 군사정권에서는 용서가 안 되었으니 나는 그들의 일관성 없는 귀걸이 코걸이 식의 기준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5.16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일대 검거, 체포 선풍이 불었다. 유족회원들(전쟁 중에 행불된 시신을 찾기 위한 유족들 모임), 교원노조원(교사들 노동조합)들, 혁신계 정치인들, 민주당 국회의원들. 전국의 감옥은 아연 만원사례가 되었다.

 

자유당의 이승만이 결재를 미루고 있던 사형 대기자 80여명은 말끔히 처형 되었다. 그들은 수립된지 불과 10개월짜리 장면 신생정부의 무능과 무질서를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주장 했지만,

 

막강한 독재 권력을 행사하던 군사정권 2년 동안 국민은 식량이 없어 도탄에 빠지고 그들은 새나라 자동차 사건, 워커힐 빠징꼬 사건, 증권 파동 사건 등 파렴치한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을 저질렀다.

 

그러고도 득민심을 할 수 있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들은 실민심(失民心)을 개의치 않았을 정도로 무도한 정권 이었다.  

 

박근혜 정권 수립 일년이 다가 온다. 그들은 국가경영의 기본이 되는 득 민심(得民心)을 위하여 그동안 무슨 일을 한 것일까? 나는 그 노력을 알지 못한다.

 

이명박 전임 정권의 마구잡이 대선개입 사건에 대하여 우유부단하게 대처 하다가 일 년 간이나 나라가 시끄럽지만 아직도 단호한 결단은 보이지 않는다.

 

경제 민주주의, 국민 대화합, 의회중심의 정치, 각종 공약의 이행의지는 약해져 가기만 한다. 이 와중에 이른바 북한을 빌미로 집권당에서 종북몰이가 시작 되었다. 

 

정론을 펴는 몇몇 언론에서는 신종 매카시즘으로 규정하고 저항하지만 역부족이다. 결국 이 움직임이 국민적 거부감으로 발전할 소지가 보이자 집권당은 일단 종북몰이를 잠복 시켰지만 언제 다시 그 전가의 보도를 휘두를지 국민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북한은 세습독재 수구집단인데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 북한을 따른다는 종북 혐의를 받는다는 것은 국민적 모욕이고 치욕이 아닌가?

 

정권이 국민의 민심을 얻지는 못할망정 하늘 같은 국민을 종북분자로 모욕 주고 있는 것이다. 득민심(得民心)은커녕 민심 이반만 하고있는 것이다.

 

하늘같은 국민을 그렇듯 모욕하고 어떻게 민심을 얻어 성공하는 정부를 만들어 갈 것인가? 무망한 노릇이다.

 

국민은 살기가 고달프다.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자영업자는 업자들대로 엄청난 가계 빛에 쪼들려 있는데다가 천문학적인 국가채무, 공기업채무가 정서적인 압박을 준다. 학생들은 그들대로 취업 걱정에 시름 한다.

 

시중경기는 이명박 정권 이래로 바닥만 기고 있다. 생활의 근본이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는 보람과 재미가 있을 턱이 없다. 이런 국민의 심정도 모르고 집권여당은 국민이 신경과민에 걸릴 지경으로 안보 스트레스만 가중 시키고 있다.

 

개인생활도 골치 아플 판에 모든 친여 매체를 동원하여 하루 종일 장성택이의 처형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면서 국민에게 불안을 가중 시키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국민이 한다리 건너 북한의 장성택이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북한 정권의 권력 투쟁의 결과인 장성택이의 실각과 처형이 대한민국 국민들 일상에 무슨 영향이 있다는 것인가?

 

나는 작금의 친여 매체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분명 제 정신이 아니다. 정작 국민은 박정권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다. 

 

“국가안보는 정부가 책임지고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안심하시고 일상을 즐기며 생업에 종사(安居樂業) 하십시오!” 

 

지난 대선에서 박후보는 자신의 정치 지향점이 국민의 안거낙업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집권 한 후 국민은 안거낙업은 고사하고 좌불안석이 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왕의 말이 곧 국법인 왕조시대에서도 백성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민심을 얻지 못하는 군주는 성공할 수 없었다. 백성위에 군림하던 군주였지만 한편으로는 백성을 두려워하고 민심을 얻기 위한 정사를 펴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 했던 것이다.

 

정치는 국민의 마음을 얻는 일에서부터 시작 되는 것이다. 민심을 얻지 못하고 외면 받는 정권은 성공할 수 없다. 정권의 실패는 국민의 도탄으로 이어지고 이는 국가의 불행이 되는 것이다.

 

작금 국민 불안을 가중시키는 종북몰이의 홍위병 역할을 하고 있는 집권당에서부터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다면 박근혜 정부의 득민심(得民心)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그 다음엔 정권의 실패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공화국 민주당 정부 장면 총리의 민주정부론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고자 한다. 

 

“ 국가의 공권력을 쥐고 있는 정부가 국민을 무섭게 다룰 수는 있다.

탄압 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이 소리 내면 귀를 기우려 들어야 한다. 요컨대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가 아닌가.” -2공화국 총리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