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다툼만이 역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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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력다툼 댓글 0건 조회 857회 작성일 07-04-0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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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역사적 결단`이 그리 많은지.
대선의 해라 그렇겠다.
정치인들이 툭 하면 `역사적 결단`을 하는 바람에 국민들은 어리둥절하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한나라당 탈당을 두고 지지자들은 역사적 결단이라고 평가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적 결단을 시리즈로 내놨다.
대통령이 재신임을 묻겠다며 국민들을 놀라게 했을 때 청와대는 이를 역사적 결단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노 대통령 스스로 열린우리당 창당이 새 정치를 위한 역사적 결단이었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숱한 결단들이 있었다.
노태우ㆍ김영삼ㆍ김종필 주연의 3당 합당 때는 구국의 결단이라는 표현이 동원됐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대선 주자들의 역사적 결단이 쏟아질까.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말도 정치인들의 상투적 표현이다.
나름대로 큰 결정을 했는데 지지율이 신통찮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역사적 결단과 역사의 평가는 사가(史家)들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전매특허가 된 듯하다.
국민들은 난감하다.
고뇌에 찬 표정과 비장한 목소리로 역사를 말하는 정치인들을 어떻게 봐야 하나. 그들의 결단은 참으로 역사적인 것인가. 그들은 역사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역사가의 눈으로 한번 살펴보자. 평생 역사를 탐구한 학자가 아니라도 좋다.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 상식만으로 족하다.
역사는 과거의 모든 사실을 단순히 나열한 게 아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조그만 루비콘강을 건넌 사람은 헤아릴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전을 앞둔 카이사르가 이 강을 건넌 사실만 기억한다.
이 강을 건넌 모든 이를 기록한 역사는 의미가 없다.
정치인들의 결단을 다 역사에 싣는다면 그 기록만으로도 도서관이 꽉 찰 것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결단이 핵폭발처럼 연쇄반응을 일으켜 역사를 뒤바꿀 것으로 믿는다.
이는 과대망상이나 논리의 비약일 경우가 많다.
특히 역사의 인과관계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많다.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린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코 때문에 세계사가 바뀌었다는 논리는 터무니없다.
정치인들의 결단은 거의 예외 없이 그들만의 권력투쟁에 관한 것이다.
국민들의 참살이와 역사의 진보를 위한 게 아니라면 아무리 일생일대의 결단이라 하더라도 역사성을 부여할 수 없다.
국민들의 삶은 누가 어느 당을 들고 나는지보다 물가와 금리와 일자리와 교육의 기회에 더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은 정말로 중대한 역사적 결단은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지을 교육체계를 개혁하거나 경제적 자유와 기회의 평등을 확대하거나 품격 있는 문화와 정신을 고양하는 문제에 대해선 눈을 감고 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역사를 보는 관점은 많이 달라졌다.
정치체제 변화에 한정됐던 역사는 경제ㆍ사회의 밑바탕에 주목하고 그 문화까지 이해하려는 역사로 진화했다.
그러나 우리 정치인들은 아직도 권력투쟁만이 역사라고 생각하는 걸까.
역사는 진보라는 사가(史家)들의 믿음은 뿌리 깊다.
(오해 마시길. 여기서 진보는 어떤 정파가 독점함으로써 심각한 오해와 무조건적 반대를 낳고 있는 그런 진보를 뜻하는 건 아니다 . 더 나은 삶, 더 살 만한 사회로 나아간다는 본래 의미의 진보를 말한다 .)
그러나 정치인들은 무엇을 역사의 진보라고 보는지 아무런 단초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들의 결단이 진정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인지 가늠할 길이 없다.
물론 무엇을 진보로 보느냐는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환경운동가들이 핵발전을 막는 것은 진보적인 것인가. 영국 역사학자 폴 존슨은 이 통념을 거부한다.
핵발전을 막으면 화석연료가 많이 쓰여 지구촌은 더 오염되며 이는 진보가 아니라고 본다.
정치인들은 어떤 진보를 추구하는지, 그 진보를 위한 정책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이처럼 몇 가지 초보적인 물음만 던져도 정치인들의 결단이 얼마나 역사성을 갖는지 쉽게 드러난다.
역사적 결단을 이야기하려는 정치인들은 먼저 자문해보기 바란다.


내가 믿는 역사의 진보는 무엇인가. 나의 결정은 우리 모두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나의 결단은 참으로 역사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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