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에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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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위원장님께 댓글 12건 조회 9,912회 작성일 17-03-2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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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건립하면서 만든 소공연장(경찰청사 옆)에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건의합니다.
비용은 노조에서 일부 분담하고 직원성금을 모아서
순수한 도청직원의 힘으로 건립을 했으면 합니다.

도내에 하동, 통영, 거제를 비롯해 몇 군데 건립이 되어있지만
공무원이 직접 돈을 모아서 소녀상을 건립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직원들의 마음을 모아
뜻있는 일을 2017년에 해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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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들은 패전 이후 위안부들을 죽이거나 아무런 대책 없이 먼 타국 땅에 그대로 남겨 두고 철수하였다. 사진은 1945년 8월 14일 미얀마의 미이토키나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힌 한국인 군대 위안부들(왼쪽)과 위안소에서 탈출하다 잡혀 온몸에 문신을 당한 위안부 출신 할머니(오른쪽)이다.

우리가 처음 나눔의 집을 찾은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수요 집회에서 처음 할머니들을 뵙던 순간,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그 무엇이 우리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역사관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분들이 겪어야만 했던 죽음 같은 고통들이 너무나도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자들에 대한 분노…….

하지만 오늘은 다른 이유로 나눔의 집을 찾았다. 한 달 내내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간사 선생님을 찾았다.

문 : 이 참혹한 사실이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까닭을 알 수 없었어요.
답 : 위안부의 실상이 널리 알려진 것이 1990년 무렵이니, 일제가 패망한 지 무려 45년이 지나서지요. 일본은 이를 감추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고, 우리 정부도 이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였기 때문이지요. 할머니들이 직접 증언에 나서지 않았다면 여전히 일본은 이 사실 자체를 감추고 있었을 거예요.

문 :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과연 그 일을 알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할머니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과거였을 테니까요.
답 :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군은 자신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 위안부를 집단적으로 학살하기도 했잖아요? 그래서 이분들이 살아서 이 땅에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부터가 고마운 일이지요. 이분들이 곧 역사가 아닙니까?

문 : 이분들의 해방 이후 삶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요.
답 : 우리 모두는 이분들이 겪은 수난을 위로하고 보상해야 옳았어요. 그리고 살아서 돌아와 일제의 죄악을 규탄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를 드려야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요. 심지어 정조를 잃어버렸다고 그들을 멀리하기까지 했지요. 많은 분들이 정조를 잃었다는 생각에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온 분들도 자신의 과거를 밝히지 못한 채 어려운 삶을 살았어요.

문 :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여러 해가 흐른 뒤 어렵사리 결혼을 하긴 했는데, 위안부 생활이 드러나 파혼당했다.'라는…….
답 : 그래요. 참 가슴 아픈 일이지요. 위안부 문제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겼던 잘못된 남성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잘못된 남성 문화가 전쟁이라는 상황과 결합되어 빚어진 일이지요. 그래서 학생 같은 남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네이버 지식백과] [여성과 역사] 군대 위안부, 아물지 않은 상처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012. 4. 9., 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