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말이 아닌 사소한 원칙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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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녀와의 약속 댓글 34건 조회 42,448회 작성일 18-03-14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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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에서 근무한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동안 눈팅만 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글을 써봅니다.

어젯밤 9시가 넘은 시각 여느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으니
신학기가 시작된 저희 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잔뜩 들뜬 목소리로 "아빠, 시간표 같이 작성해야 되니까 빨리 와" 하더군요.
저는 "일이 많아서 늦을 거 같은데 내일 같이 만들자" 라고 성의없이 답했습니다.
아이는 실망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제가 신경쓸까봐서인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알겠다더군요.

그리고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보니 아이가 자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게 덥석 안기고는 겨우 졸리는 걸 참았는지 이내 방으로 들어가 자버리더군요.
그리고는 물을 먹으러 냉장고 쪽으로 가니 아이가 혼자 만든 시간표가 보였습니다.

순간 물을 마시러 온 것도 잊은 채 가슴이 먹먹해져서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습니다.
"밤9시부터 10시까지 : 아빠와 재미있게 노는 시간(아빠 피곤하니깐 1시간만이야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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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과 가정의 양립", "워라벨" 그런 거창한 말 잘 모르고 잘 와닿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떤 슬로건이나 미사여구보다 중요한 것이 "정시출퇴근", "주말휴무" 등
사소한 원칙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최근 비상시가 아닌데도 권한대행께서 주말에 출근하여 민생을 챙기시고
여성공무원과의 "일과 가정의 양립 간담회"에서 열심히 소통하려 하는 모습들
잘모르는 일반인들이 보면 정말 보기 좋고 본인 스스로 뿌듯해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정작 평일에는 불필요한 대기성업무나 보고 때문에 아이와 한시간도 못놀고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주말에는 강제출근할 수밖에 없는 직원들,
그리고 그 가족들, 학교선생님과 지역사회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노조에서는 무엇보다 이런 병폐와 악습에 대해 근절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간부공무원 스스로도 거창한 말보단 사소한 원칙부터 지키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일과 가정의 양립", "워라벨"은 바로 이런 의지와 노력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