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판사는 그런데 이 대목에서 고민한다.
"검사 때 경찰이 90% 이상 처리해 넘겨주는 송치 사건만 처리하는 검사,검사실과 집만 왔다 갔다 하는 검사를 '바보 검사'라고 욕했다.
그런 검사는 세상 물정을 모르게 되고,무엇이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바보다.
그런데 판사가 된 후 나는 사무실과 집만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허 판사는 세상물정을 파악하기 위해 친구들을 만나 세상이야기를 전해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허 판사가 알고 싶어하는 '세상물정'은 법조계 전문용어로 바꾸면 '구체적 타당성'이다.
판사들은 법적인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면 개별 소송 당사자들의 구체적인 사정에 가장 적합하게(구체적 타당성 있게) 법조문을 해석·적용해 판결을 내리려고 애쓴다.
판사들이 밤늦도록 서류더미와 씨름하는 것도 알고 보면 '구체적 타당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세상물정'이나 '구체적 타당성'이 사시공부처럼 머리싸매고 공부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시험성적 순대로 판사에 임명되는 현행 시스템 하에선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허 판사가 '조직의 치부'를 털어놓은 것도 고민을 함께 풀어보자는 의도에서일 게다.
현행 법관임용 시스템을 개선하자는 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긴 하다.
일정기간 변호사 경력을 갖춘 사람에 한해 판·검사로 임명하자는 내용이다.
이와는 별개로 로스쿨법안에도 유사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제 허 판사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법을 국회가 다룰 차례다.
김병일 사회부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