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새끼 말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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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태자 댓글 0건 조회 1,488회 작성일 07-08-03 14:10본문
일왕부부 사진에 ‘소새끼 말새끼’ 썼다가 징역 1년 --------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이 글은 암울한 식민지시대를 살아 갔던 민초들의 수난을 생생히 전해 준다. 말 한마디 잘못 한 죄로 보안법 치안유지법 위반자가 되어 징역으로 끌려간 이름없는 민초들의 기록을 복원해 보았다.
해마다 3월이 오면 우리는 항일지사들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름난 지사들의 애국혼에 옷깃을 여미기도 하지만 이름없는 민초들의 항일투쟁과 수난에 대해서는 잊기 쉽다. 유명 지사들의 업적을 기림과 더불어 무명 민초들의 희생과 고통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창씨개명이 내려지자 어떤 사람은 성을 바꾸었으니 개자식이 된 단군의 손자라는 뜻으로 견자웅손(犬子熊孫)이라 제출하려다가 경찰에 붙들려가 혼쭐이 났는가 하면, 창씨개명 강요에 견디다 못해 견분식형(犬糞食衡:개같은 놈 똥이나 먹어라)이라 제출했다가 크게 문책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각급 법원이 소장하였던 각종 판결문을 살펴보면 역사책에도 기록되지 않은 민초들의 항일과 수난의 기록이 생생히 남아 있다. 이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몇 개의 사건을 골라서 민초들의 투혼을 살펴본다.
일왕은 소새끼, 왕비는 말새끼
조선총독부 대구 복심법원 형사부(재판장 田尻勝造 판사 오완수)는 1932년 2월 3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사는 농부 박해근(20)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하였다. 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피고인을 징역 1년에 처한다. 압수 물건 중 어존영(御尊影) : 소화 4년 복압(覆押) 제430호의 1)의 불량자 불량여 우자(牛子) 마자(馬子) 3천 구자(三千拘子)라고 기재한 부분은 이를 몰수한다”
판결의 주문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얼른 이해가 안갈 것이다. 판결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피고인은 소화 3년(1930) 구 3월경, 그의 실모(實母)의 친정집인 경남 산청군 산장면 대포리 성환목의 집 사랑방 안에서 이방 안의 책장 위에 나란히 세워 놓은 서적의 사이에 안치되어 있었던,
폭 9촌 세로 7촌 3푼의 대지(垈紙:두꺼운 종이)에 첨부한 천황 황후 양 폐하의 섭정전하(攝政殿下) 동비(同妃) 전과 당시의 어존영(증 제1호)을 꺼내어 그것이 양 폐하의 어존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양 폐하에 대하여 매언잡언(罵言雜言)을 할 의사로써 천황폐하 어존영의 좌측 상부에 불량자라 하고, 황후폐하 어존영의 우측 상부에 불량녀라고, 양 어존영의 중앙에 우자(牛子) 마자(馬子), 3천 구자(三千拘子)라고 각각 묵서하여 이로써 양 폐하의 존엄을 모독하고 불결한 행위를 한 자이다.
증거를 살피건데 피고인이 소화 3년 구3월 경, 판시의 장소에서 판시 어존영의 판시 부위에 판시한 바와 같은 자구를 묵서한 사실은 피고인의 당 공정에 있어서의 그와 같은 취지의 공술 기재,
그리고 압수한 어존영의 판시부위에 판시와 같은 자구의 기재가 있는데 비추어, 또 피고인이 어존영에 판시와 같은 문자를 기재한 결과 양 폐하의 존엄이 모독된 사실은
불량자, 불량녀, 우자, 마자, 삼천구자라고 자구 자체 및 피고인의 당 공정에 있어서의, ‘우자 마자 삼천구자라는 문서(文詞)는 조선에서 행해지는 욕이다’라는 취지의 공술에 의하여 각각 명백하다.“
쉽게 말하면 박해근이라는 청년이 일왕 부부의 사진 밑에 각각 ‘우자’, ‘마자’, ‘삼천구자’, 즉 ‘소새끼’, ‘말새끼’, ‘삼천마리 개새끼’라고 낙서한 것이 발각되어 1년 징역을 살았다는 내용이다.
‘소화놈 즉위하는데 돈 낼 필요있나’
사숙(私塾) 교사 유시걸(23)은 1928년 11월 18일 친구 집에서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1년 징역살이를 했다.
경북 상주군 상주면 성하리 출신인 유시걸은 안동군 풍남면 하회동 유시종의 집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마을 청년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재소에 근무하는 순사 신광용이란 자가 면장의 위탁으로 소화 즉위식 봉축회 기부금의 명목으로 유시종의 집을 방문, 유씨가 50전을 지불하면서
“이번의 어대전(御大典)에 대하여 나는 금 2원을 지출하였다”고 말하자 유시걸이 “소화(昭和) 그놈이 즉위하는데 금 2원이나 낼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한 것이 징역 1년의 빌미가 되었다.
말 한마디 잘못한 죄로 주재소에 끌려간 유시걸이란 사나이는 예심 조서에 이런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일찍이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어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조선의 임금이 없어졌다.
그런데 일본의 천황폐하가 어즉위식을 거행하는데 즈음하여 조선의 현상을 생각하니
결코 기분이 좋지 못하여 재미가 없었던 바, 마침 신 순사와 유시종의 대화를 듣고 나의 평소 생각 때문에 불의에 판시와 같은 취지의 불경스러운 언어를 농하였다.”
조신환(22, 풍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과 김상만(19, 전남 강진군 강진면 평동리)은 1930년 4월 30일 화순읍내 남산공원에 세워진 신사에 들어가 이를 크게 파손시켰다가 발각되어 각각 1년 6개월의 징역살이를 하였다.
조신환은 광주지방법원 화순출장소 고용원으로 근무중이었고, 김상만은 경성사립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중 동맹휴학관계로 퇴학당해 일본으로 건너가고자 화순읍내 실형의 집에 다니러 왔다가 김상만을 만나서 신사를 파괴하기로 합의하고 거사한 것이다.
두 사람은 기독교신자로서 평소 일본의 산사에 대해 크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화순 경신(敬神)회원 6백여명의 건설로 신축된 신사 안으로 들어가 신전을 무너뜨리고 왜전나무 한그루를 뽑아버리고,
이틀 후 다시 신사에 들어가 신전을 파괴해버렸다. 일본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며 한국인들을 강제로 참배시키고자 곳곳의 명소에다 지었던 신사는 이처럼 우리 청년들의 손으로 도처에서 파괴되었다.
비슷한 사건이 고령군 다산면 좌학동에서도 벌어졌다. 정장홍(28)은 1941년 2월 만주에 이민하여 살다가 귀향하여 마을학교에 설치된 신사 봉재전을 밀어 넘어뜨리고 천조대신의 위패를 꺼내 찢어버렸다.
정장홍은 또 2월 25일 다산 공립심상소학교에 설치한 신궁 대마봉전에 들어가 천조대신의 위패와 신궁대마위패를 찢고 신궁을 넘어뜨렸다. 이로 인해 1년 징역살이를 감수했다.
김승국(40)은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상리에 사는 금융조합 이사로 있다가 ‘해군 형법 위반 및 불경죄’로 금융조합에서 쫓겨나 1년 징역살이를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1939년 12월 23일 강원도 양구군 북면 상무학리 소재 무학공립국민학교에서 개최된 애국반장대회에 출석하여 저축장려에 관한 강연을 한 다음 동일 오후 3시 30분경 동대회에 출석한
양구 경찰서 근무 광전용(廣田勇) 경부보 및 동서 북면경찰관주재소 근무 산본준홍(山本俊弘) 순사 등과 함께 자전거로 귀가 도중 동군 북면 공수리 무명천 부근에 이르렀을 때 이야기가 소화 16년 12월 8일의 하와이해전(진주만 폭격-필자)에 미치자 피고인은 전기 광전용 외 2명에 대해
‘옛날 전쟁은 서로 이름을 대고 일 대 일로 했는데 이번 하와이해전에 있어서의 일본의 태도는 무사도 정신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 즉 적 함대가 진주만에 정박하고 무방비상태로 있을 때, 그 틈을 타 아군은 불의의 습격을 했기 때문에 대전과를 거둔 것이다’”
경성지방법원 형사 제2부는 이 피고인이 이러한 내용의 발언으로 “적국인 미국에 동정하는 듯한 태도로써 소화 16년 12월 8일의 제국 해군의 하와이 공략이 비열하다는 듯한 언사를 농해 대동아전쟁에 있어서의 해군 군사에 관해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8월을 선고했다.
천황을 ‘그런 것’으로 지칭했다 하여 징역 1년
문인 김동인도 ‘불경죄’로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뤘다. ‘천황기관설’에 관한 발언때문이었다.
역사소설의 집필 등 저술에 종사하고 있던 김동인은 1942년 1월 19일 오후 2시경 서울 종로 2정목 91번지 잡지사 삼천리 사무실에서 동사 편집기자 박계주 및 사원과 잡담을 나누다가 변을 당했다. 판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황기관설이란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피고인은 천황기관설이란 ‘법률상 천황의 권한은 개인인 천황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천황이란 국가기관에 속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란 뜻을 설명한 다음 다시 말을 계속해서 ‘그런 것’(모욕적인 듯을 가진 호칭)은 기관에 불과하다고 방언하여 지존에 대해 ‘그런 것’이란 불경한 행위를 한 자이다.”
이수암(21)은 함경북도 길주군 길주읍 봉암동 출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중야고등무선전신학교에 다니던 학생신분이었다.
1940년 10월 폐렴으로 귀향하고자 29일 오후 경성역발 천진행 열차 3등 객창에 승차하여 전방 좌석에 앉아 있던 김영인 외 수명에게 “조선총독은 농민이 생산한 작물을 안가로 빼앗아
이를 다 소량씩 고가로 배급하고 있어 공산주의 정치와 다를 것이 없다”는 발언을 했다. 물론 옳은 말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징역감인데 그의 발언은 시간이 갈수록 강도가 더욱 높아진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피고는 ‘조선총독은 정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조선의 쌀을 대량으로 내지로 인출하고 있는데, 과거의 어떤 총독은 현재의 총독처럼 정부에 뇌물을 쓰다가 동경역에서 성명 미상의 대만인에게 살해 당할뻔한 일이 있고,
지금도 총독을 살해하려고 기도하면 동경역 같은 장소를 택하지 않고 금년 여름 총독이 남선 지방을 시찰할 때와 같이 시골에서 실행하면 쉽게 살해 목적을 달할 수 있다’는 말을 방언해서 정치에 관해 불온한 언동을 해서 치안을 방해하고,
‘일본군은 주간 전투는 용감하나 야간에는 지나군에 멀리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야간에는 하등 행동을 못하고 외출도 못하는 현상에 있고
또 일본군의 전사상자 숫자도 신문보도 정도가 아니고 내가 동경역 등에서 목격한 전사상자만도 심히 많아서 신문보도의 수배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는 방언을 해서 군사에 관한 조언비어를 한 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수암은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42조, 육군형법 제99조 등의 위반혐의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서울 도렴동 28번지에 거주한 문명진(32)은 당시 런던상회의 사무원이었다. 그의 죄목은 요즘식으로 표현하자면 ‘불온유인물 소지 및 배포죄’였다.
“관립영어학교의 졸업생으로 일찍이 조선독립의 희망을 품고 있던 자인 바 대정 8년 5월 13일경, 중국 상해에 건너가 동월 25, 26일경 그곳으로부터 경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곳 거주의 김보현이라는 자로부터
‘통유(通諭) 제1호’라고 제목한 이승만이라는 자 외에 수명의 명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천만 동포에게 유고(諭告), 우리 대한민족의 독립 시운이 도래하였으므로 종래의 학정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
총독의 명령을 거부할 것이며 또 의무에 복종하거나 납세를 하지 말라’는 내용의 정치에 대한 불온의 문사(文詞)를 기재한 인쇄물 수십매를 포장한 것을 교부받고 그것이 조선독립에 대한 불온의 문서임을 잘 알면서 이를 휴대하고 동월 31일 경성에 귀착하여
먼저 관헌의 주의를 피하기 위하여 지인인 김홍작이란 자에게 이를 맡겨두고 동년 6월 2일 동인으로부터 그 인쇄물 중 13매를 받아 그날부터 동월 7일경까지 사이에 경성부내에서 종로동 1정목 위익환 외 수명에게 배포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
문명진은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혐의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부곡리 거주 군농회 지도원 김수웅(25)은 1945년 2월 중순 자기 집에서 암촌무웅(岩村武雄) 외 1명에게 “어떤 사람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최근 부산 상공에 미국 비행기 B29가 내습하여 금년 4월에는 조선의 징용이 폐지된다는 선전비라가 다수 살포됐다”고 한다라는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여 징역 10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또 서울 서대문구 미근정 8번지에서 하숙업을 하던 윤상덕(53)은 1944년 11월 상순 시흥군 수암면 월파리 암촌충(岩村充) 집에서 암촌무웅 외 3명에게 다음과 같이 ‘정치에 관여하여 불온한 언동’을 하였다.
“일본은 일한 병합 후 33년이 지나면 조선을 원래대로 독립국으로 반환하기로 되어 있으며, 벌써 그 기한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조선을 반환하지 않는다는 것은 극히 부당하다. 그것을 생각하면 사이판 섬에서 일본군이 옥쇄를 한 것이 안됐지만 별 수 없다”
이러한 혐의로 그 역시 징역 10월에 3년간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정감록 인용하다가 징역 2년형
정승종(29)은 서울 영등포구 노량진정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교통국 경성공장 선반공이었다. 그는 일제의 패망을 정감록에 의해 예언(?)한 죄목으로 구속되어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을 살펴보자.
“전부터 동 공장의 급여 기타의 대우면에서 일본인과 차별하는데 불만을 느껴 제국의 조선통치에 대하여 반감을 품고 있던 중 소화 19년 봄부터 가정형편이 궁핍해지자 그 원인이 대동아전쟁에 인한 물가앙등에 있다고 생각하여
전쟁을 기피함과 동시에 사이판도에서 일본군의 옥쇄 기타 일본제국에 불리한 전화에서 제국의 패전은 필연의 사실이라 경시함에 이르고, 이 같은 경위로 하여 조선의 독립을 기도하기에 이르렀으며
정감록에 의하면 제국의 패전은 소화 20년 3월이 될 것이니 그때까지 미국군이 조선에 상륙할 것이며 조선은 그 기회에 미국의 원조를 얻어 독립을 실현할 것이다, 라고 망단하여
조선을 제국 통치권의 지배에서 이탈케 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한 범의를 계속하여 치안유지법 제5조, 형법 제55조에 해당하므로 징역 2년에 처한다.”
경기도 개성부 남산정에 주소를 둔 과일상 점원 임성동(17)은 1942년 7월 24일 경성지방법원 형사2부에서 징역 1년 6개월의 형벌을 받았다.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은 이 사건의 내용은 간단하다.
“소화 16년 12월 25일 오후 7시경 개성부 경정 228번지 앞 도로에서 친구 구천모, 평전창식, 김산구원 등과 회동했을 때, 우연히 김산구원이 전방도로를 통행중인 개성부 덕암정 1917번지에 사는 김산동연을 불러 서로 일본어로 담화하자
피고인은 이를 화내 동인들에 대해 조선어로 ‘일본말을 하는 놈은 백두산에서 목을 자르겠다’고 하여 내선일체, 일본어 상용에 관한 총독정치에 관해 불온한 언동을 해서 치안을 방해한 자이다.”
임성동은 이 한마디 때문에 조선형사령 제42조, 보안법 제10조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살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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