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은 대의로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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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큰 사람 댓글 0건 조회 699회 작성일 07-09-2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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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람은 대의로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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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아름다우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우?”
 
“우선은 틈이 나는 대로 글을 읽어라. 또 남이 하는 좋은 말은 가슴에 새겨두고 아침저녁으로 스스로를 닦는 데 힘써라.
 
네가 면경을 들여다보고 치장하는 데 쓰는 시간만큼만 글을 읽고 사유하는 데 쓴다면 능히 안팎의 아름다움을 함께 가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수련이 돌연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이고, 서방님! 팔자 좋은 소릴랑 작작 하시구려.”
한바탕 웃고 난 수련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찾아오는 손님도 다 받지 못하는 판에 글을 읽을 틈이 어디 있소? 아침에 일어나면 분칠하고 손님 맞기에 바쁘고,
 
밤에는 또 여흥과 주독에 만신창이가 되어 자리에 눕자마자 코를 고는 처지로 언제 무엇을 읽고 무엇을 닦으란 말씀이오?
 
그런 건 서방님처럼 한가롭게 말 타고 놀러 다니는 사람들한테나 가당한 소리고, 저는 어서 빨리 재물을 벌어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경사 한복판에 고래등 같은 큰 집을 짓고, 늙고 병든 양친과 남의 집에 살러간 여섯 형제들을 모두 데려다 옛날처럼 다시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오.
 
그 꿈을 이루려면 부모가 낳아준 이 몸뚱이 하나가 밑천인데,
 
이제 서방님 얘기를 듣고 보니 앞으로 더욱 악착같이 살아야겠소. 얼마 뒤엔 하나뿐인 이 밑천마저 사라진다니 그렇게 되기 전에 손님도 더 받고 더 열심히 벌어야 하지 않겠소?”
 
그날 이후 위화는 수련을 멀리했다. 무식하고 천박한 여자에게 정나미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 보지 않고 지내는 동안 위화는 자꾸만 수련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밤이고 낮이고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수련의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급기야 애가 타고 괴롭기까지 했다.
 
처음 얼마간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보지 않으면 차츰 잊혀지는 사람이 있고, 보지 않아서 오히려 더 생각나는 사람도 있다. 수련은 후자였다.
 
아침에 떠오르면 하루가 괴롭고, 저녁에 보고싶으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에 반해 수련은 위화와 헤어진 뒤로 단 한 차례도 그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무정하다기보다는 그만큼 바빴던 탓이다.
 
화려한 미색에 홀려 줄을 선 손들 때문에 잠자는 시간조차 부족한 수련이었다.
 
위화에게 일각이 여삼추라면 수련에게는 삼추가 일각이었다. 위화한테서는 지루하고 긴 시간이 수련에게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위화는 결국 그리움에 못 이겨 수련을 찾았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위화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만난 듯 다짜고짜 덥석 껴안으며 반가운 인사를 건네자 수련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어머나, 그렇네요. 그새 벌써 석 달이 지났군요.”
 
하며 웃었다. 위화가 스스로 크게 한탄한 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비록 중하나 실제로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도 그에 못지 않다.
 
세상에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름다움을 좇으려고 눈앞의 아름다움을 멀리했으니 어리석은 자는 수련이 아니라 바로 나다.”
 
나중에 위화는 법화에게 가서 수련과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요?”
 
위화의 질문을 받고 법화가 대답했다.
 
“아름다움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인데 그걸 구태여 구분하고 나누려고 했던 게 잘못이다. 무상(無相)은 무상(無常)일진대 아름다움이라고 다르겠느냐?
 
 세속의 잣대로 말하자면, 보이는 아름다움도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도 모두가 그저 아름다움일 뿐이지.”
 
위화와 수련의 관계는 자주 삐걱거렸다. 위화는 수련의 미색을 탐했고, 수련은 위화의 높은 지위와 그가 주는 재물을 탐했다.
 
서로 바라는 바가 다른 관계가 오래가기는 힘든 법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황제 비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비처제는 벽화후를 궁에 들인 뒤로 거의 날마다 젊은 황후와 어울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타계하자 좋지 않은 소문이 퍼져 벽화후의 처지가 많이 난처하였다.
 
“황제가 나이를 잊고 황후에게 너무 빠졌다.”
“젊은 황후가 색사의 재미를 안 게 화근이다.”
 
“두 지존의 춘추 차이가 너무 나서 황제가 수명보다 일찍 돌아가셨다.”
이런 말들이 벽화후의 귀에 실제로 들리는 듯했다.
 
황제가 붕어하신 날부터 국상 기간 내내 중신들은 물론 궁녀와 나인들까지 삼삼오오 모여서 쑥덕거리는 모습이 젊은 황후의 눈에는 한결같이 자신을 흉보는 것처럼 비쳐 벽화후가 마음고생을 톡톡히 했다.
 
비처제의 뒤를 이어 6촌 아우이자 부군인 육순의 ‘지증제’(삼국사기에는 지증왕이 64세에 위를 계승했다고 나온다)가 임금이 되었다. 비처제가 살아 있을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고 이변은 없었다.
 
지증이 새 황제가 되면서 국공 원종의 지위는 더욱 격상되었다.
 
그는 앞서 선혜후가 낳은 비처제의 외딸 보도공주와 혼인함으로써 스스로 황위 계승의 입지를 굳혔고, 이는 아버지 지증이 보위를 물려받게 만드는 데도 결정적인 쐐기가 되었다.
 
 황제가 된 지증은 장남 원종을 태자로 삼아 아들의 공헌에 보답했다. 그가 순탄하게 국통을 이은 공의 절반은 원종의 것이었다.
 
그러나 위화는 이와 정반대였다. 원종과 더불어 수위를 다투던 위화의 태산 같은 지위는 하루아침에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도 그럴 것이, 원종은 스스로가 높았으나 위화의 지위는 누이를 총애하던 비처제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비처제가 돌아갔으니 그 위세가 온전할 리 없었다. 땅에 뿌리를 박고 핀 꽃과 강물에 떠다니는 꽃의 수명이 어찌 같을 수 있으랴.
 
이런 사정은 위화의 아버지 섬신공도 매한가지였고, 심지어 황궁의 벽화후조차 앞날을 염려해야 할 만큼 입지가 흔들렸다.
 
본래 선제의 황후는 태후가 되어 별궁에 거처함이 마땅하나, 아직 대궐 물정을 익히지 못한 어린 나이에 태후가 가당찮고,
 
 그렇다고 자식이 있어 위에 오른 것도 아닌 데다,
 
새 황제의 사가(私家) 식솔들이 바깥에서 잔뜩 들어왔으니 여러 모로 사정이 곤란했다. 벽화후는 오직 새 황제의 처분만 바라는 지경이 되었다.
 
“이참에 그냥 날이로 돌아가서 살면 안 될까요?”
 
하늘처럼 믿고 의지해 온 남편을 잃고, 극심한 마음고생에 거처마저 불확실해진 벽화가 아버지 섬신공을 만나 울먹이자 섬신 또한 별 묘책이 없어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쉬었다.
 
그 역시 자신을 백안시하는 조정대신들의 달라진 태도를 온몸으로 느끼고 불안해하던 터였다. 한참만에 섬신은 맥없는 어투로 대답했다.
 
“위화가 국공과 친하니 그쪽으로 말을 넣어 새 황제의 뜻을 타진해보겠습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소서.”
 
집으로 돌아온 섬신은 위화를 불러 앉히고 벽화후의 곤란한 처지를 의논했다.
“태후께서 그 일로 심기가 몹시 미편하니 뵈옵기조차 민망하더라.
 
해서 말이다만 네가 국공에게 은밀히 청하여 대궐에 별궁 한 채를 마련해봄이 어떠한가?
 
태후뿐 아니라 우리 집안의 세도가 모두 궁에서 나오는
데, 태후께서 출궁하시고 나면 언제 다시 지금과 같은 복록을 누리겠느냐?”
“잘 알겠습니다.”
 
늘 그렇듯 위화의 대답은 수럭수럭했다. 섬신은 위화가 곧 원종을 만나 일을 해결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위화한테서는 아무 기별이 없었다. 애가 탄 섬신이 위화에게 다시 말을 꺼냈다.
 
“국공을 뵈었느냐?”
“아직 뵙지 못했습니다.”
 
“명 짧은 사람은 그새 여럿 나자빠졌겠다. 만사 제쳐두고 어서 그 일부터 마무리를 지어라.”
“네.”
 
그러고 또 며칠이 지나갔다. 섬신은 위화가 바깥에서 들어오기만 하면 이제나저제나 무슨 응답이 있을까 눈치를 살폈으나 위화는 그런 아버지의 타는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줄곧 딴전만 피웠다.
 
견디다 못한 섬신이 하루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위화를 보는 순간 다짜고짜 버럭 역정을 냈다.
 
“이놈아! 아비 말을 귓등으로 듣니, 똥구멍으로 듣니? 근 열흘이 지나도록 어찌하여 한 마디가 없느냐!”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호통소리에 깜짝 놀란 위화가 고개를 늘어뜨리며 잔뜩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섬신은 이제 숫제 분통이 터졌다.
 
“저런, 저 빌어먹을 놈을 보게! 아비와 누이는 하루하루 애간장이 단 불에 던져 넣은 마른 장작처럼 타들어 가건만, 무슨 말씀이냐고?
 
에라, 이 설삶은 말대가리 같은 놈아, 이놈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섬신은 도성 관가에서 힘들게 배운 체통도 잊고 옛날 시골에서나 하듯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들고 위화를 쫓아갔다.
 
혼비백산한 위화가 섬신의 매질을 피해 마당을 두어 바퀴 돌고 그대로 대문 밖으로 달아나니 섬신이 도주하는 위화의 등뒤에다 대고,
 
“국공을 만나 담판을 짓기 전엔 아예 들어올 생각도 말아라, 이놈아!”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위화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우선은 원종이 태자가 되어 예전처럼 만만히 어울릴 수 없는 데다,
 
어려운 부탁을 하자고 대궐에까지 찾아간다는 것도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태자가 된 이후로 부제(父帝)를 보필해 정사를 살피느라 평소 즐기던 늦잠조차 자지 못한다는 다른 마복자들의 전언(傳言) 또한 위화를 무춤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 해도 위화의 속마음이었다.
 
“어떻게 하시려구요?”
 
수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글쎄, 순리에 따라야지.”
 
“순리가 무엇이오?”
“가만히 두면 저절로 되는 것이 순리일 테지.”
 
“서방님은 참 속도 편하시오.”
수련이 찬인지 흉인지 모를 소리를 퉁명스레 내뱉었다.
 
위화는 며칠동안 수련의 거처에 머물며 밥 신세, 잠 신세를 톡톡히 졌다.
 
 집에 가지 못하니 돈이 있을 리 없고, 돈이 없으니 수련이 원하는 바도 채워주지 못했다.
 
비록 빈털터리라도 과거엔 위세 하나는 있었는데, 황후가 흔들리는 판에 황후의 오라비가 영이 설 턱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련은 위화의 면전에 대놓고 공공연히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허구한날 방구석에만 틀어박혀서 밥이 나옵니까, 국이 나옵니까? 바깥에라도 좀 나가보시오!”
 
“이젠 너마저 나를 괄시하느냐?”
 
“괄시고 뭐고, 이러다간 정말로 산 입에 거미줄 치게 생겼소. 끈 떨어진 연 신세 같은 서방님을 믿고 사느니 차라리 남산 돌부처를 믿지.
 
여러 말이 다 시끄럽소. 어쨌든 나는 내일부터 주가에 나가 돌아오지 않을 테니 그런 줄 아오.”
 
“어허, 그놈의 인심 한번 고약하다. 그처럼 막보다가 내가 다시 끈을 얻어 하늘로 올라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오. 날짜도 까마득한 잔치에 먹자고 미리부터 굶을 수야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