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과 존중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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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다는 것 댓글 0건 조회 650회 작성일 07-10-02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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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래가 많은 네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교통신호제어기 옆에 있는 경찰관을 볼 때가 있다.
 
시간대에 따라 동서, 남북 어느 쪽이든 교통량이 많은 도로가 있게 마련인데 그 도로에는 직진 신호를 길게 주고 그렇지 않은 도로에는 짧은 시간을 배정하는 게 상식이다.
 
 

중앙의 교통신호통제센터에서 총괄해서 제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현장에 경찰관이 나와서 교통 신호를 직접 조작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서 있는 차선이 불공평하게 시간을 배정 받을 때 발생한다.

 

내가 가려는 방향의 신호는 3분이 지나고 4분이 다 돼가는 듯한데 붉은색에서 도통 바뀔 줄을 모른다.

 

 반대쪽 방향은 지나갈 차는 다 지나가고 없는 것 같고 이따금 총알처럼 달려오는 차가 한두 대 있을 뿐이다.

 

 

약속시간은 자꾸 다가온다. 정상적으로 간다면 충분한 시간이지만 이런 식이라면 제 시간에 갈 수 있을지 불안하다.

 

다음 교차로에 또 다른 경찰관이 버티고 있을 수도 있고 교차로마다 있을 수도 있다.

 

 자연스럽게 머피의 법칙을 떠올리게 되고 머피의 법칙을 떠올릴 이유가 없는데 머피의 법칙이나 생각하고 있는 내 처지가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잘못한 것도 없이 스스로가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한다는 게 한심스럽다고 느낄 때 겨우 신호가 바뀐다.

 

내가 지나가기 전에 신호가 금방 바뀔지 몰라서 마음이 급하다. 그런데 앞에 가는 차가 뭘 하는지 자꾸 꾸물거린다.

 

옆 차선은 벌써 다 지나가고 있다. 그렇다고 옆 차선으로 끼어들 수도 없는 것이 도로에 실선을 그어놓았기 때문이다.

 

신호 아래를 지나치며 경찰관의 얼굴을 확인한다. 제복을 입었고 무표정하지만 어쩐지 어려 보인다.

 

시간만 되면 그의 판단능력이나 권한에 대해 검증하고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신호를 지나치고 나서도 여전히 꾸물거리며 가고 있는 앞차에도 미친다. 도대체 뭘 하고 있어서 그러는지 성별은 무엇이며 나이는 얼마나 됐으며 생김새는 어떠하며……

 

자동차의 외양과 번호판처럼 드러나는 것만 가지고는 성이 차지 않는다.

 

 

차선을 바꿔 왕왕거리며 지나가면서 왼쪽 차에서 운전대를 껴안다시피 하며 운전하는 사람이 반백의 노인임을 알아낸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설득시킬 만한, 위안할 만한 논리를 만들어 내고서야 갈 길을 간다.

 

 

경찰관은 아직 젊어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것뿐이라서, 운전을 배운 지 얼마 안 되는 노인이니까 하고.

 

외국에서 운전을 하거나 길을 잘 모르는 지방 도시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그렇게 했을까. 아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는 일정한 범위의 상호존중이 있는 법이다.

 

나는 경찰관의 권한과 전문적인 판단능력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앞차 운전자가 빨리 가지 못하는 데는 내가 모를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

 

우리 모두 한국 사람이고 내가 다니는 곳이 서로 알 만한 사람끼리 어울려 살고 있는 곳이어서 지나가며 악착같이 고개를 빼서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알아낸 피상적인 자료를 객관적인 근거를 무시하고 공평성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데 사용한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왜 그렇게 요령이 없어?’라든가,‘왜 다른 사람 다 놔두고 나만 가지고 그래?’ 하는 식의 발상이 여기서 나온다.

 

혹시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이 이래서 생긴 게 아닐까.

 

예언자의 권능을 인정하는 편이 분명히 고향의 발전에 도움이 될 텐데도.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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