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벽]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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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르트르 댓글 0건 조회 999회 작성일 07-10-04 12:56본문
196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는 문학의 쓰임에 관한 논쟁으로 지식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도 불붙은 듯한 격론에 휩싸였다.
당시의 논란을 촉발시킨 인물은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저술가로서 강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프랑스 지성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럽의 물질적 풍요와는 반대로 세계 곳곳에서 난민들이 발생하는 것을 목도한 끝에,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라고 고백했던 것이다.([구토]는 사르트르가 1938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이렇게 자신의 문학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이를 통해 문학의 효용과 지식인의 역할에 각성을 불러일으킨 이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장 폴 사르트르다.
사르트르의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그의 나이 34살에 발표한 [벽]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 중 감방에 수감된 파블로를 통해서 죽음을 앞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르트르의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그의 나이 34살에 발표한 [벽]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 중 감방에 수감된 파블로를 통해서 죽음을 앞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선 소설을 분석해 보자. 우리는 [벽]을 읽을 때 다음의 네 가지에 주목해야 하는데 그것은
첫째, 이 작품에 등장하는 파블로와 톰, 후앙은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는가?
둘째, 소설의 마지막에서 파블로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없이 웃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셋째, 이 소설은 왜 “벽”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가?
넷째, 소설을 쓴 사르트르의 철학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먼저 작품에 등장하는 세 인물을 분석해보자.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파블로와 톰, 후앙인데 이들은 다음 날 해가 뜨면 사형을 당해야 할 운명이다. 이들은 그동안 말로만 듣던, 머릿속에서만 그려오던 죽음이라는 개념을 직접 경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나 파블로와 톰, 후앙이 감방에 수감된 이유는 모두 비슷하되 죽음을 앞둔 이들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후앙은 가장 나이가 어리고 심성이 순수해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에 큰 공포를 느끼며 초조해하고 있다.
반면 파블로와 톰은 죽음에 대해서 의연하려고 하며 주어진 상황에 보다 객관적으로 대처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실 톰도 죽음 앞에서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그것을 내색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결국 오직 파블로만이 죽음에 대해서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종종 냉정하다 못해 냉소적인 모습마저 보여주는데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을 앞둔 톰과 후앙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입장에 가깝다.
따라서 감방에 수감된 세 인물의 관계는, 죽음 앞에서 대놓고 안절부절 못하는 후앙과 겉으로는 의연하되 마음속으로 혼란을 겪는 톰을 파블로가 냉소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번에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파블로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없이 웃는 장면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주의해야할 것은 자칫 이 장면이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 파블로의 허탈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파블로를 어떤 인물로 분석하느냐에 따라서는 이렇게 읽는 것도 가능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감방 안에서 파블로는 톰과 후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죽음조차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초월자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초월자적이고 냉소적인 파블로가 라몽의 죽음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면 이는 앞뒤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죽음과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파블로라면 그는 인생의 허망함조차도 냉소하고 초월해야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는 식의 과장된 웃음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파블로의 웃음에 다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죽기 직전 우연한 거짓말을 계기로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라몽이 살해당하고 자신은 사형을 면하게 된다는 이 장면은 파블로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어떤 힘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파블로는 죽음을 직면해두고 비로소 객관적이고 냉소적으로 삶을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파블로는 단 하루 동안이었지만 죽음과 삶에 대해서 초월자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어떤 힘, 그것이 우연의 법칙이든, 신의 섭리든 여하간에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에 파블로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보였을까.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의 웃음은 파블로가 운명과 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깨닫고 그에 비해서 한없이 초라하면서도 한없이 오만스러운 자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야유인 것이다.
이제 세 번째로 소설의 제목이 왜 벽인지 생각해보자. “벽”, 사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 전체의 주제와 지금까지 이야기한 각 요소의 의미를 연관지어 본다면 벽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계기, 혹은 극한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이제 세 번째로 소설의 제목이 왜 벽인지 생각해보자. “벽”, 사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 전체의 주제와 지금까지 이야기한 각 요소의 의미를 연관지어 본다면 벽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계기, 혹은 극한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이 소설에서 “벽”이라는 단어는 모두 7번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우리는 톰과 파블로의 대화에 등장하는 벽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톰은 사람이 총살을 당할 때는 등지고 있는 벽으로 파고들어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벽은 다시 그를 밀어낼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람이 죽을 때 벽으로 파고들고 싶다는 것은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벽이란 일종의 피난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벽이 다시 사람을 밀어낸다는 것은 피난처로 돌아가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때, 피난처로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사람이 하게 되는 가장 절실한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은 누굴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여기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영화 [타짜]의 전반부를 보면 주인공 고니가 도박판에 끼어들었다가 3년 동안 모은 돈을 한꺼번에 모두 잃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 영화 속에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라는 생각을 했다.”라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영화 속 이 대사의 의미가 바로 소설 속 톰의 대사에 등장하는 총살당하는 사람과 벽의 의미를 이용한 것이다.
즉 고니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는 순간은 도박판이었으며, 이것이 고니에는 “벽”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현실에서 자주 목격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시험기간에 실컷 놀다가 막상 시험이 가까워올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생각은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채 시험이라는 제도에 갇혀야 하는 자기 처지에 대한 자각이다.
또한 대학 졸업이 가까워 올수록 우리는 졸업을 유예하고 대학에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그럴수록 갑갑한 한국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된다. 즉 우리에게는 시험이나 졸업, 취업이 하나의 “벽”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철학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으며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고 싶지 않은 인간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생사(生死)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가장 민감한 문제이며 인간이 그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가장 확실하게 깨닫게 하게 문제이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생사에 대한 눈물겨운 탐구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철학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으며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고 싶지 않은 인간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생사(生死)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가장 민감한 문제이며 인간이 그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가장 확실하게 깨닫게 하게 문제이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생사에 대한 눈물겨운 탐구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삶과 죽음이란 제 아무리 잘난 인간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힘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그 힘 앞에서 우리 인간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생사의 문제에 담연하게 대처하며 “어떤 힘의 지배”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강한 정신력과 탐구정신, 생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 무엇보다 살아있다는 것의 고귀함을 옹호하고 인간 그 자체의 힘과 가치를 존중하는데, 우리는 이들을 일컬어 “휴머니스트”라고 부른다. 어떤 의미에서 서양의 역사는 휴머니스트들이 제자리를 찾고 인간의 가치를 전도하기 위해서 피눈물 나게 싸워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휴머니스트들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부터인데 여기에는 급격히 축적되기 시작한 과학지식과 이것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주의 철학이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휴머니스트들은 변질된 휴머니스트들, 즉 과학지식과 합리주의를 남용하는 자들에 의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도전받고 인류 문명 자체가 전복될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변질된 휴머니스트들이 저지른 가장 큰 만행을 우리는 세계대전이라고 한다.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자각하게 된다.
17세기 전후의 휴머니스트들이 생사의 고민과 그것을 주관하는 어떤 힘의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의 가치를 자각하기 시작했다면, 세계대전 이후의 휴머니스트들은 생사의 문제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는 것을 더하여 인간의 가치를 자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이들은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를 벗어난 문제 보다는 세계 그 안에서의 인간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휴머니스트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어떤 힘”이 종교였다면, 이들에게 “어떤 힘”이란 역사의 지배를 의미한다.
유년시절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서른 무렵에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사르트르는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난 새로운 휴머니스트들의 사고를 보여준다. 그리고 17세기의 휴머니스트들의 행동과 사고를 가리켜 인문주의라고 했다면, 우리는 세계대전 이후의 휴머니스트들의 행동과 사고는 실존주의라고 부른다. 결국 이 작품을 관통하는, 사르트르의 철학과 신념을 일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실존주의인 것이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파블로와 톰, 후앙이 죽음을 앞에 두고 벌리는 행동과 대화들은 “인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문제에 대해서 깊이 탐구하고 집착하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파블로가 운명과 세계를 지배하는 힘 앞에서 한 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굴복으로 보이지만 이는 사실 인간이 그 자체의 존재를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유명한 명언, “오직 핍박받아 본 사람만이 자유를 외칠 수 있다.”는 것은 운명과 세계를 지배하는 힘 앞에서 초라해진 파블로가 실존에 대해 자각하게 되는 과정을 매우 적확하게 비유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에서 파블로가 죽음을 통해 실존을 자각하게 되었으므로 죽음과 벽이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파블로가 실존의 문제를 탐구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사르트르는 세계대전을 통해 역사의 힘을 경험함으로써 실존의 문제를 탐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소설 속의 파블로는 사르트르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반영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벽]을 통해서 실존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르트르의 [벽]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았다. 우리는 이를 통해 사르트르의 철학이 무엇인지,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그것이 소설에서 어떻게 이미지화 되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다시 맨 앞으로 돌아와서 지식인의 세상에 대한 태도와 문학이 효용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사르트르의 [벽]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았다. 우리는 이를 통해 사르트르의 철학이 무엇인지,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그것이 소설에서 어떻게 이미지화 되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다시 맨 앞으로 돌아와서 지식인의 세상에 대한 태도와 문학이 효용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먼저, 지식인들은 세상에 대해서 어떤 태토를 견지해야 하는가. 단, 여기서 지식인이란 반드시 고급의 교육을 받고 수준 높은 어휘를 사용하거나 거창한 담론을 전개하는 사람만을 말하지 않는다. 진정한 지식인이란 세상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신념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설혹 시장에서 갈치를 팔고 있더라도 자유롭고 분명한 생각으로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그는 바로 지식인이다.
그런 지식인의 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일평생 견지해야할 것은 바로 “진보”다. 왜냐하면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고 그 시간들이 모인 거대한 집합체를 역사라고 부른다면, 인간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지식인의 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일평생 견지해야할 것은 바로 “진보”다. 왜냐하면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고 그 시간들이 모인 거대한 집합체를 역사라고 부른다면, 인간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진보란, 진보와 보수가 어떻고, 좌파와 우파가 저떻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러하다는 식의 정치적이 진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는 점이다. 물론 그런 의미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세상에는 가짜 진보, 어설픈 진보, 민중을 현혹하는 포퓰리즘적 진보, 이념과 사상에 현혹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진보가 득세하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더 근본적이고 순수한 의미의 진보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지식인들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부단히 연마해야할 진보의 원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성을 억압하는 기득권에 대한 저항이며, 기득권자에게 억압당하는 약한 자에 대한 배려이며, 잘못된 것에 대한 엄격함이며, 타인에 대한 관용이다.
잘못에 대한 엄격함과 타인에 대한 관용은 언뜻 보기에 대치되는 것 같지만, 잘못에 대한 엄격함은 잘못 그 자체여야 하지 잘못을 저지른 인간과 그 인간성에 대해서는 관용스러워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식인 견지해야할 태도인 진보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가치이며 그것은 인본주의와 개인주의로 귀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살아 숨쉬는 심장에 진보라는 이름을 아로새긴 지식인의 문학은 어떠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문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시나 소설 등을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문학이지만 그것은 문학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문학을 한자로 풀이하면 “文學”이 되는데, 요즘이야 “文”이 학문, 글 등의 의미로 쓰이지만 본래 “문”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글자이며, “學”은 이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살아 숨쉬는 심장에 진보라는 이름을 아로새긴 지식인의 문학은 어떠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문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시나 소설 등을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문학이지만 그것은 문학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문학을 한자로 풀이하면 “文學”이 되는데, 요즘이야 “文”이 학문, 글 등의 의미로 쓰이지만 본래 “문”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글자이며, “學”은 이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색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이 후에 종이와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오늘날의 종이문학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해야 하며, 여기에 지식인의 가치인 진보를 더한다면,
문학이란 결국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본주의와 개인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생각해보면 사르트르가 견지한 실존주의 자체도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 아닌가.
이야기를 현실에 조금 더 적용해보자. 요즘 세상에는 문학 아닌 문학이 판을 친고 지식인 아닌 지식인이 넘쳐난다. 유치한 자신의 감정을 이리저리 나열하고 자신도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어려운 단어들을 나열한 것을 가지고 시(詩)라고 거창하게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금방 떠오른 생각을 아무런 심사숙고 없이 전개해 놓고는 소설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조금만 유명해지만 TV에 출연한 뒤 책을 쓰고, 이 책, 저 책에서 베낀 것을 짜깁기해서 그것이 제 생각인 양 책을 쓰는 것이 요즘의 행태이다. 그런가하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도 형성되지 않은 채 나라와 민족의 이름을 팔아 국민을 오도하는 정치인들이 판을 친다.
무비판적으로 정보가 넘쳐나고 그것이 마치 진실인양 둔갑하며, 남에게 들은 이야기,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마치 제 생각인 이야기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며 세계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인데, 이것을 사르트르가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물론, 나는 사르트르의 빠돌이가 아니다. 나는 사르트르의 가치관을 무조건 옹호하지도 않지만 지금의 세태에는 분명 반성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요즘 세상에는 과거처럼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간혹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부도덕한 일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물론, 나는 사르트르의 빠돌이가 아니다. 나는 사르트르의 가치관을 무조건 옹호하지도 않지만 지금의 세태에는 분명 반성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요즘 세상에는 과거처럼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간혹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부도덕한 일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그래서 참 다행이지만 그 대신 인간성이 사라지고 개인주의가 변질되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의 고귀함이 자본과 물질의 교환수단의 전락해서 인간성이 상실된 이 시대에 인본주의가 필요하며,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방종과 집단주의로 변질된 시대에 진정한 개인주의의 자각이 필요하다. 우리가 [벽]을 통해 생각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1930년대에 쓰인 [벽]을 2007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읽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