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인간'과 '일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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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는 인간' 댓글 0건 조회 741회 작성일 07-11-2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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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로 IMF사태가 난 지 꼭 10년이 된다. 대선을 앞두고 정쟁 차원에서 지난 10년이 잃어버린 10년이라느니,아니라느니 떠드는 것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
 
 그보다는 IMF 10년에 한국사회가 얻은 가장 큰 병은 무기력증이라는 어느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한 문학평론가는 최근 IMF 이후의 한국문학을 분석한 글에서 IMF 이후 한국사회의 인간형은 둘로 나누어진다고 하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놨다.

'노는 인간'과 '일하는 인간'(혹은 '바쁜 인간')이 그것인데, 2000년대 젊은 문학은 오히려 노는 인간에서 그 출구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다.
 
 제목만 봐도 젊은이들의 실상이 대충 짐작되는 '갑을고시원 체류기'나 '백수생활백서' 같은 소설들에 그런 젊은이들의 모습이 비친다.

이런 소설의 주인공들은 결코 암울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많이 벌어서 많이 먹으면 되잖아'라는 바쁜 인간들의 논리에 '조금씩 먹잖아'로 응수한다." IMF가 가져온 무한경쟁의 정글사회에 대한 자발적 무기력이다.

전쟁과 혁명, 그리고 수십년의 군사독재가 한국의 젊은이들을 '광장'으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면, IMF 이후의 젊은이들은 고시원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
 
고시원은 2000년대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아마 가장 많이 작품의 배경으로 사용하는 공간일 것이다. 서울에 새로 생긴 동굴들인데, 한 젊은 여작가는 '서울동굴가이드'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뼛속을 빼고는 관 속처럼 아늑하여라/ 창문없는 내 방이여'(차창룡의 시 '고시원에서').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인간조건의 가장 정직한 반영"(평론가 신수정)이다.

이들 젊은 작가의 세대보다 윗세대의 한 시인은 몇 년 전에 이미 IMF로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이들에게는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정희성의 시 '세상이 달라졌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는 것이다.
뼈다귀 하나 물고 꽁무니 사리는 개처럼 한국사회는 무기력하다.

요즘 한창 회자되고 있는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끔찍하다.
 
20대의 95%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 하에 그들은 평생 세전 소득으로 88만원에서 119만원 사이의 임금밖에 못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승자독식 게임을 받아들이는 세대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선배인 386세대처럼 바리케이드에 짱돌을 들고 나설 것인지 한국사회는 그 갈림길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88만원 세대'가 예고하는 것은 식민지시대의 독립투쟁도, 독재시대의 민주화투쟁도 아닌 신자유주의시대의 세대투쟁 가능성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사회가 젊은 세대에게 '희망 고문'을 하고 있다며 그 고문을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IMF 10년, 한국사회 젊은이들의 초상이 고시원을 배경으로 한 88만원 세대의 모습이라니. 이번 대선에서 그들의 선택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