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지도자에게 바란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도자 댓글 0건 조회 795회 작성일 07-12-10 16:10

본문

 

news1197268348_93627_1_m.jpg
◇ 신성대(辛成大) 전통무예연구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장. 국군 전통의장대 무예사범
신(神)이 인간을 버렸는가? 아니면 인간이 신을 버렸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인들은 신들이 자연에 살도록 내버려두었었다.
 
아니, 모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산이나 큰 나무,
강이나 바다,
연못이나 우물,
뱀이나 소,
바위나 동굴,
심지어 뒷간이나 부뚜막에도 크고 작은 신들이 살고 있었다.
 
대지와 만물은 원래 하늘의 소유였다. 당연히 하늘에 사는 신(神)들은 언제든지 땅에 내려와 그가 원하는 곳에 앉아 인간들의 공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도 기분이 조금만 언짢으면 언제든지 인간들을 혼내 줄 수 있었다.
 
때문에 인간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신들은 하늘에서조차도 편히 쉴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들의 인지가 발달하면서 끊임없이 신들을 박해하였다.
 
 결국 과학은 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 추방해버렸다.
 
이제 신은 더 이상 자연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자연의 주인이자 지배자인 것이다. 자연은 더 이상 신의 것이 아니다. 이제 신은 인간의 자애로움으로 보살펴져야 할 가련한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간혹 홍수, 지진, 화산 폭발, 해일 등등 신의 분노에 놀라는 척하며 호들갑을 떨기도 하지만, 곧이어 혹독한 처벌을 내린다.
 
난폭한 신들은 내쫒고, 말 잘 듣는 신들만 골라 교당 안에 가둬두고서 천연기념물처럼 보호하고 있다.
 
이미 신은 자연과 더불어 인간의 개조물이 되어버렸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지만, 이제는 인간이 끊임없이 새로운 신을 만들어 내고, 길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도태시켜 버린다.

예(禮)란 원래는 신을 위한 단어였다. 고대의 예(禮)란 곧 제례(祭禮)나 의례(儀禮)를 말하는 것으로, 신과의 소통을 위해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정성의 표시였던 것이다.
 
 신에게 예(禮)를 바치는 과정, 즉 의식(儀式)을 통해서 통치자는 절대 권력을 확보하게 된다. 왕이 곧 신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에서는 공자(孔子)라는 인물이 나타나 통치권자들이 독점하고 있던 이 예(禮)를 민간에 퍼트렸다. 이후 신을 모시는 제례(祭禮)가 인간들이 사는 동네로 내려오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예절, 법, 도덕규범, 철학 등으로 분화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예(禮)만 퍼뜨린 것이 아니었으며, 주(周)대로부터 통치 계급의 자제들에게만 가르치던 육예(六藝)를 모두 내다팔았다.
 
 덕분에 그는 동양의 모든 나라에서 수천 년 동안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지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조선 5백 년 동안, 예(禮)는 창이나 칼보다 더 무서운 것이어서 끊임없는 피바람을 일으켰다. 이 예(禮)를 어기는 자는 벼슬은 물론 심하면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했다.
 
당연히 5백 년 내내 권력을 잡는 수단으로서의 예(禮)는 온갖 갈등과 한(恨)을 낳았다. 선비 혹은 군자가 지켜야 할 덕목을 오상(五常, 仁義禮智信)이다.
 
그런데 조선 유교 사회에서는 이 다섯 가지 중에서 유독 예(禮)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사실 개인이든 사회든 이 다섯 가지 덕목이 골고루 선양되었어야 공자가 꿈꾸던 이상적인 유교 국가가 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예전에는 사람을 판단할 때 예(禮)에다 그 기준을 두었다.
 
 “음, 뉘 집 자손인지 예의 바르구먼” 하는 소리를 들어야 사람대접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믿고 썼다. 어쨌거나 그 사회가 건전하게 잘 엮어지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信)이 있어야 하는데, 조선시대는 그 신(信)을 예(禮)가 대신했다.

하지만 조선의 멸망과 함께 갑작스럽게 서양의 온갖 문물과 제도가 밀려오면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뒤섞여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젊은이들은 재빨리 서양 신을 받아들여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반면에 어른들은 자연히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구세대의 전유물이었던 예(禮)도 퀴퀴한 냄새 때문에 뒷간 구석으로 쫓겨나 버렸다. 5백 년 이상 이 사회를 지탱해 오던 대들보가 미처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도 전에 뽑혀 나갔다.

해방 후, 신문화의 거센 해일에 예(禮)와 함께 염치마저 뿌리째 뽑혀 나가면서 신(信)마저 깨어져 버린 것이다. 피치 못할 역사의 소용돌이와 함께 불신(不信)의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뻔뻔하고 낯가죽 두껍고 파렴치한 인간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설치기 시작하였다. 상하가 뒤집어지는 개벽천지를 맞게 된 것이다.
 
좌우 대립, 6.25 전쟁, 독재 정권, 문민 정권, 국민 정부, 참여 정부... 모두가 잃어버린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정립코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예(禮)와 더불어 온갖 잡신들이 쫓겨나고, 새로운 해방군이자 점령자인 미국을 등에 업고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양신(洋神)이 무혈 입성하였다.
 
 먼 사막의 오아시스가 고향인 서양 종교는 태생적으로 배타적이어서 기존 종교와 융합하지 못한다. 결국 이 땅에서 종교의 첫째 기능인 사회적 통합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또 다른 갈등을 유발시키기도 하였다.

종교가 주도하는 사회적 통합은 신을 매개체로 한, 절대적이면서 또한 간접적인 믿음이다. 즉 네가 믿는 신과 내가 믿는 신이 같으니까 너와 나는 서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믿음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한 국가에 한 종교여야 전체적인 통합이 가능하게 된다.

그 바람에 이 땅 사람이면 벗어날 수 없는 혈연, 학연, 지연이 신(信)의 대용품으로 애용되었다. 연(緣)은 정(情)의 줄기이다. 연이 닿는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같은 성씨, 같은 학교, 같은 고향 사람이면 믿을 수 있고, 그 외에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것이다. 정(情)과 신(信)을 구별하지 못한 데서 오는 어리석은 소치이다.
 
그나마 그런 끈도 없는 사람끼리는 같이 술먹고, 목욕하고, 오입해서 연정(緣情)을 쌓아야 한다. 막말로 한통속이 되어 어거지 신(信)을 만드는 것이다.

연 없으면 구호품 빵 한 조각 얻어먹기 힘들었다. 하다못해 교회에라도 나가서 신을 중매자로 한 연을 만들어야 했다. 연이 없는 사람을 채용할 때에는 사주나 관상을 보고 판단했다.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고, 어느 집 처마 밑에라도 붙어서야 안심입명의 근거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근 1백 년 이래 굴곡의 역사가 반도의 자손들에게 이같이 구차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거창한 이야기가 우리의 고질병인 지역주의까지 내려왔다. 사람들은 모두 지난 군사독재 시절 박정희의 탓으로 돌리지만, 보다 깊은 원인은 신(信)이 깨어진 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신(信)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지역불신’이라 하지 않고 ‘지역감정’이라 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는 병이다. 정(情)은 정(情)이고, 신(信)은 신(信)이다. 이 둘을 구분할 줄 알면 고칠 수 있다. 정(情) 때문에 신(信)을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정(情)을 위해 충(忠)하는 것은 신(信)이 아니다. 그건 그냥 애정(愛情)일 뿐이다. 충(忠)이 연(緣)을 따라서는 안 된다. 신(信)을 따라야 한다.

이 주장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그다지 머지않은 과거시대를 살다간 훌륭한 인물 몇 분을 떠올려 보라.
 
김구 안중근 윤봉길 안창호 주시경 신채호 이준…… 등등. 아니면 이순신 장군, 또는 당신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를 생각해 보라.
 
당신은 그분들이 어디 출신인지 아는가? 혹시 알아보고자 했던 적이 있는가? 타지방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싫어질까?

물론 그러한 일은 없을 것이다. 진정 훌륭한 사람에게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그것만큼 졸렬한 짓도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천하의 나쁜 짓을 한 인간을 알고 보니 고향 사람이라 해서 덜 밉거나 용서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던가? 절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더 불쾌할 것이다. 옛사람이든 지금 사람이든 출신 지역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훌륭한’ 또는 ‘존경스런’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기가 망설여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과실이 바로 이 지역적 편협성이다.
 
 안타깝게도 영원히 공평치 못했던 인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공명정대(公明正大)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무인답게 이 연(緣)줄만 깨끗하게 끊었더라면, 장기 집권의 흠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위대한 대통령을 가졌었노라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지금도 출신 지역을 기반으로 정치나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한 이들이 많다. 하지만 제아무리 큰 업적과 성공을 거두었다 해도 결코 훌륭하다는 말은 듣지 못할 것이다.
 
시중에서는 그저 하기 좋은 말로 이러한 이들을 존경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부럽다는 뜻일 게다.
 
 제일가는 재벌이라 해도 부러움 혹은 시기의 대상일 뿐이다. 설령 노벨상 10개를 받아 와도 결코 훌륭한 인물로는 남지 못한다.

더 이상 신(神)의 말씀만으로 신(信)을 세우기에는 인간들이 너무 똑똑해져 버렸다. 그렇지만 사람(人)의 말(言)에는 믿음(信)이 있어야 한다. 신(信)에는 마음(心, 忄)이 없다.
 
그것은 오직 행동(行動)으로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 명분이 뚜렷하면 대의(大義)가 되고, 인(仁)의 인도를 받으면 정의(正義)가 된다.
 
 대의든 정의든 협의(俠義)든 신(信)이 받쳐야 굳건히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신의(信義)라 하여 이 둘은 항상 붙어 다녔다.

모름지기 뱉은 말(言)에 책임을 져야 하고, 의(義)를 위해선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신(信)과 의(義)를 위하여 아낌없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영웅호걸들을 알고 있다.
 
그들로 인해 역사가 빛나고 있는 것이다. 신(信)과 의(義)는 무덕(武德)의 대들보이다. 무예(武藝)를 되살리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대선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지역주의가 맥을 못 추고 있다. 원인이야 어디에 있든 참으로 다행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부디 이대로 사라져 다시는 이 땅에 솟아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대선의 결과가 감정의 앙금으로 남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다음 지도자에게 바란다.
낙동강의 기적,
금강의 기적,
영산강의 기적을 이룬다 해도
한강의 기적을 넘어 설 수 없고,
 
한반도대운하라 해도 경부고속도로를 넘어 갈 수 없다.
 
통일을 이룬다 해도 그 공적의 대부분은 전임자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다.
 
동서남북노소의 화합을 이루는 자만이 박정희를 넘어 진정 훌륭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신의가 바로 서는 사회라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진정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다./
 
 데일리안 경기 신성대 경기 데일리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