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운하는 청계천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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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계사 댓글 0건 조회 771회 작성일 08-01-0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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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대운하는 청계천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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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경 (화계사 주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경제'라는 말은 부적처럼 쓰인다. 대선 과정에서 제기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각종 의혹도, 이 말 앞에서는 장애가 되지 못했다. 마침내 이 말은 새 정부의 정책 입안이나 시행 과정에서 당연히 검토되어야 할 반대 의견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는 절대기준이 될 듯하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최측근이라는 이재오씨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기정사실화하며 "다음달 25일 당선자가 취임하면 바로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자연의 조화로 이루어진, 누천년을 이어온 국토의 근간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일을 마치 공깃돌 주무르듯 하겠다는 투다. 정권 실세 몇몇이서 국가의 먼 미래까지 좌우하겠다는 것인가? 대운하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서 오만불손으로밖에 볼 수 없는 언사다.

대통령 당선인 측근들은 지금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정권 인수가 아니라 국민들의 뜻과 국가의 미래까지도 접수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투표자의 절반에 가까운 지지와 530만이라는 표차에 대한 착시현상 때문인 듯하다. 사실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 선택은 노무현 정권의 실정(失政)에 대한 '국민적 징벌' 행위였다. 당선인 측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숫자만을 가지고 자신들의 공약에 대한 무한 승인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반도 대운하 공약의 저돌적 실천 의지다.

대운하에 대한 새 정권의 무모한 집착에는 또 다른 착시 현상이 작용하고 있다. '청계천'과 '대운하'를 같은 맥락에서 본다는 것이다. 청계천 복원과 대운하 건설은 규모뿐만 아니라 본질적 성격이 다른 사안이다. 청계천 복원은 개발독재 시절 강제로 가둔 물길을 연, 순리를 좇는 행위였다. 순천(順天)이었다. 하지만 대운하는 그 반대다. 거대한 역리이자 역천(逆天) 행위다. 환경 문제를 최대 현안으로 삼는 세계의 추세와도 반대로 가는 일이다. 경제성조차도 검증되지 않은 것들이다.

대운하 건설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180개 시민단체의 의견에 대한 반대 이유도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경부운하를 가지고 투표를 하자고 하면 앞으로 도로를 놓을 때마다 투표를 하자는 것인데 그건 과도한 얘기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추부길 당선인 비서실 정책팀장의 말이다. 대운하를 도로 하나 놓는 일로 여기는 것이다.

'국민투표'를 말하는 시민단체의 발상도 상당히 위험하다. 경제성장에 도움이 될 국책사업에 발목을 잡는다는 비난을 의식한 고육책으로 이해는 해 보지만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00년, 200년 후의 환경재앙에 대한 우려는 접어놓고라도 당장 투표권을 갖지 못한 다음 세대의 권리는 어찌 할 것인가? 만약 국민투표로 찬성 결정이 난다면 그 다음은 그냥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박정희 정권이 이룬 경제성장의 공(功)까지도 무색하게 하는 '유신헌법'도 국민투표로 확정됐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시라. 개발독재의 폐해는 민주화 과정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이지만 대운하는 다르다. 되돌릴 수 없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는 99.9% 가능하다고 해도 무의미하다. 0.1%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한 파멸은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의 오만과 독선이 과도한 '자기 확신'에서 비롯됐듯, 새 정부의 개발지상주의가 돈 되는 일이라면 못할 일이 없는 또 다른 독단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 고작 칠팔십 년을 살다 갈 인간이 어찌 누천년을 흘러왔고 또 흘러갈 국토의 생명줄을 함부로 건드릴 것인가. 자연에 대한 한없는 외경을 보여 온 한국 전래의 삶의 태도에 대한 모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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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입력 : 2008.01.06 2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