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신과 사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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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명 댓글 0건 조회 1,046회 작성일 08-01-3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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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은 사육신 묘가 잇는 곳으로 유명하다.  동작구 노량진동 185번지에 위치한 사육신 묘는 서울시 유형 문화재 제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육신이란, 세조 때 단종 복위를 꿈꾸다가 들켜서 목숨을 잃은 여섯 충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유성룡,유응부)를 가리킨다.  최근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 중의 한사람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있어,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는 사육신에 김문기를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일곱개의 무덤과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육신 묘에, 끝까지 단종을 받들려는 여섯 충신의 뜨거운 숨결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듯 하다.

 

1455년 6월 11일 단종 임금이 수양 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날이었다.  바로 조선 7대 임금인 세조 이다. 

 

  상왕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 힘을 합쳐 기회를 노리기로 하며, 박팽년과 성삼문은 서로 손을 꽉 잡았다.  동지중추원사인 유응부도 수양대군이 임금자리를 빼앗은 것에 분노를 느끼는 무신이었다.

 

  세조가 왕이 된 담음해 명나라에서 수양이 임금이 된것을 승인하기 위해 사신이 오게 되었다.  그 동안 성삼문과 뜻을 같이했던 사람들이 성삼문의 집에 모였다.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김질 등이엇다.  마침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별운검에 뽑혔다. 

 

별운검이란, 운검이라는 칼을 들고 특별한 행사가 있을때 임금을 호위하는 임시 벼슬이었다.  기필코 수양의 목을 베리라 마음먹었다. 

"신숙주는 내가 죽일 것이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신숙주는 성삼문과 함께 세종대왕과 문종의 총애를 받은 집현전 학사로 '한글'을 창제하는데 공헌하였으나, 지금은 달랐다. 

 

 세조로부터 두터운 심임을 받는 신하가 되어, 성삼문과는 적이 되어 다른 길을 가는 것이었다.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이 오게 되었고, 그들을 위한 잔치가 창덕궁 광연전에서 베풀어졌다.

 

  몹씨 더운날이었다.  한명회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하다가,  이튿날 연회장에 세우기로 했던 별운검을 갑자기 폐지하였다.  거사는 실패하였으며,

 

이때 옆에 있던 김질은 떨려서 더 이상 그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 나와 장인인 정창손에게 달려가 역모사실을 자세히 일러 바쳤으며, 

 

 정창손은 한명회에게 밀고를 하였고,  곧 세조에게 사실대로 알려졌다.  단종 복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잡혀왔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성승, 박중림(박팽년의 아버지), 권자신(단종의 외삼촌), 윤영손 등이 오라에 묶인채 사정전으로 끌려 왔다. 

 

유성원은 잡혀 오기 전에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깨끗한 충신의 몸이 더러운 놈들로부터 고문을 당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성삼문, 박팽연, 하위지, 이개, 김문기 등은 세조의 회유를 끝까지 뿌리쳤다.  세조는 그 들을 차혈형에 처하도록 하였다.(차혈형이란 두 대의 수레에 각각 다리를 묶고 수레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 몰믈 찢어 죽이는 것이었다.)

 

성삼문은 탄식을 하였다.  아버지 성승의 말대로 연회가 있던 날 거사를 밀고 나갔더라면 참담한 실패는 없었을 것이라는 후회가 되었다. 

 

너무 완벽하게 하려다 힘도 써 보지 못하고 배반자 김질의 밀고로 일이 끝난것을 후회하였다.

 

  김질은 밀고를 하면서 아무 상관없는 강희안 같은 사람도 끌어들였다.  평소 시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풀이를 하려 했던 것이다. 

  성삼문은 강희안은 아무 잘못이 없으며, 이 일에는 얼굴도 내민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나으리 강희안 같은 어진 사람을 죽이면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꾸려 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자신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 성삼문의 입에서 임금 소리를 듣고 용서해 달라는 말이 듣고 싶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 이개, 하위지, 김문기 등은 끝내 세조 앞에 굴하지 않았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등 단종을 새로이 임금에 앉히려던 충신들은 차혈형을 당하였다.  미리 자결한 유성원까지 합쳐 이 여섯 사람을 만고의 충신, 충신의 표본이라 하여 '사육신'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세조의 왕위 찬탈에 벼슬을 내던지고, 평생 절개를 지킨 또 다른 여섯 사람

 

김시습, 남효은, 이맹전, 원호, 조여, 성담수슬 일컬러 '생육신'이라 한다.

  세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육신으 가족 친지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1457년 단종을 노사군으로 강봉하여 강원도 영월땅으로 귀양보냈으며, 끝내 어린 조카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고 말았다. 

 

세조가 남긴 업적도 많았다. 하지만 정치를 잘했던 못했던, 불쌍한 어린 조카를 죽이고, 여러 충신들을 죽이면서까지 왕위에 오른 그의 행동은 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다.

 

 

  사육신은 죽임을 당하고도 한동안 땅에 묻히지 못했다고 한다.  세조의 노여움을 살 것이 겁나, 어느 누구도 장사지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해 지는 얘기로은 생육신중 한사람인 김시습이 승려로 있을때, 시체들을 매장해 지금의 사육신 묘가 생긴것이라고 한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유씨, 밖씨, 이씨, 성씨 지묘'라고 씌어진 네개의 무덤이 생겼고, 여섯명의 충신이 죽었다 하여 사육신 묘라는 마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다. 

 

  1679년 숙종이 노량진에 다녀간 후부터 사육신 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1681년에 사육신의 사당인 민절서원이 세워졌으나, 흥선 대원구에 의해 철폐되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1954년 서울시가 세운 6각의 육신 묘비가 서 있다.  이 묘비의 아래쪽에는 여섯 청신으 이르모가 그들이 지은 시가 각 면에 하나씩 새게져 있으며, 

 

그 뒤 1978년 노량진 묘를 성역화 시킬때, 네게의 묘에 하위지와 유성원의 묘를 새로 추가하였다.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중 한사람이라는 새 주장이 있어,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사육신에 김문기를 추가하기로 결정하고,  현재 일곱개의 무덤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