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쓸쓸한 우리 시대의 ‘용(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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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용(龍)’ 댓글 0건 조회 743회 작성일 08-02-19 08:47본문
김하돈(시인)
20년 전쯤, 수원역 앞 골목에서였다. 좁고 허름한 가게 안에서 나이 지긋한 약장수 사내 하나가 한창 마이크에 침을 튀기며 약을 팔고 있었다.
그 사내가 팔던 약이 무언지는 지금 기억에 없지만, 어느 때랄 것도 없이 가게 앞을 빼곡 둘러서 사내의 ‘청산유수’에 혼을 빼앗기던 사람들의 군상이 세월의 실루엣처럼 남아있다. 막간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를 연발하던 ‘약장수 사내의 혀’는 모여든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지루하여 자리를 뜰 기미가 보이면 그때마다 커튼이 드리워진 뒤편 밀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장군아, 용 아직 준비 안됐냐?”
얘긴즉슨, 밀실 안에 동남아 밀림 어디선가 잡아온 거대한 용이 한 마리 있는데 곧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시계불알만한 왕방울 눈에 순록 같은 뿔이 달렸으며, 몸통은 코끼리 뒷다리만큼이나 굵고 비늘이 안경알만한하다고 했다.
길이가 몇 미터나 되므로 좁은 가게 안에서 다 보여 줄 수 없어 머리와 몸통만 잠깐 보여줄 참이란다. 영물의 생김이 그만하니 보여줄 채비 역시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지, 아무튼 그 ‘약장수 사내의 용’은 언제나 그렇게 ‘준비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게 앞은 사람들이 모박이를 하여 한 뼘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었다. 두어 식경 덧없는 기다림에 지쳐 “에이, 가세” 하고 몇이 앞자리를 비우면 뒷줄에서 다투어 그 자리를 메웠다. 이제인가저제인가 사람들은 용을 기다리고, 사내는 부지런히 약을 팔았다.
백두대간이 웃는다!
▲ 강의 생김은 한 그루 나무와도 같다. 강의 하구가 그 나무의 뿌리라면 그 나뭇가지 끝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원 샘들이 위치한다. 경상도 전체를 아우르는 낙동강은 백두대간 동쪽의 가장 큰 유역을 형성하여 예부터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이어왔다./김하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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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십년 세월을 꼬박 백두대간 현장에서 조사하고 글을 쓰며 보낸 나로서는 경부운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 말이 되돌려주는 덧없는 메아리를 그저 귓전으로 흘릴 수밖에 없었다.
백두대간에 배를, 그것도 2500톤짜리 바지선을 띄우겠다고? 우리 역사상 원정군을 이끌고 한강과 낙동강 사이의 백두대간을 넘는데 성공했던 딱 두 사람의 위대한 왕,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한바탕 너털웃음을 칠 일이었다.
백두대간을 인문학적으로 정의하자면,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동해바다와 서해바다로 갈라주는 산맥’이다. 동해바다와 서해바다 해수면에서 그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면 어김없이 모두 백두대간에서 만난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끊이지 않고 외줄기로 이어지며 바다와 바다를 가르는 한반도의 으뜸 산맥이 바로 백두대간이다.
땅은 산과 물로 구성되어 있다. 땅에는 산과 물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산 아닌 것은 다 물이요, 물 아닌 것은 다 산이다. 산천(山川), 산하(山河), 강산(江山), 산수(山水) 따위의 땅을 지칭하는 말들이 모두 이를 뒷받침한다. 땅을 구성하는 산과 물은 정 반대의 속성을 지닌다.
산은 나누고 물은 합친다. 산은 한 뿌리에서 출발하여 물을 만날 때까지 수십 수백 갈래로 끊임없이 갈라져 나가는 것이 그의 직업이고, 물은 반대로 수백 수천 갈래에서 저마다 발원하여 최후의 하나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합친다.
최후에 합쳐진 하나의 물, 그것이 강의 하구이며 그 물줄기에 섞이는 모든 여울의 범위가 유역이다. 물은 그와 같이 영역을 규정하기가 좀 수월하지만, 산은 좀체 그 범위나 윤곽을 어림잡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예부터 산의 실상을 규정했던 말이 바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모든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른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 흘러 바다로 가는 까닭은 땅이 평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평하지 않은 것, 그것이 산이다. 논둑밭둑도 물을 나누므로 물론 산이다.
땅 위에 존재하는 산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그 산이 가르고 나눈 물줄기가 바다에 이르기 전에 다시 만나는 산과, 반대로 다시는 만나지 않고 각각 다른 하구로 바다에 들어가는 산이다.
그 산이 나눈 물이 끝내 다시 만나지 않고 서로 다른 하구로 바다에 들어가는 산줄기, 그것이 바로 산맥이다. 우리나라에는 15개의 산맥이 존재한다. 그 15개의 산맥이 나눈 물은 서로 만나지 않고 각각 다른 하구로 바다에 들어간다. 그 가운데 14개는 강과 강을 나누는 정맥이며, 나머지 하나가 바로 바다와 바다를 나누는 백두대간이다.
서기 400년, 신라의 지원을 받은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백두대간을 넘어 백제, 왜, 가야로 구성된 연합군을 정벌했다. 6세기 중엽 신라의 진흥왕은 백두대간을 넘어 꿈에도 그리던 한강유역을 손에 넣었다.
광개토대왕이 백두대간을 넘어 신라와 가야 땅을 정벌한 이후 5세기 후반 남한강유역의 상황을 정리하여 세운 비석이 바로 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이고, 진흥왕이 백두대간 반대편을 정벌했던 기념비가 단양 신라 적성비(국보 198호)다.
고려시대 백두대간을 넘는 길은 철령(685m)과 계립령(630m, 지금의 월악산 하늘재) 두 곳뿐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대관령(832m)이나 문경새재(642m), 육십령(734m) 같은 백두대간의 고개들이 새로 개척되고,
문명의 시대에 이르러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가 추풍령(221m)을 넘으면서 백두대간 동서 교류의 역사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토목공학이 발달한 요즘은, 터널이 전체구간의 무려 70%를 차지한다는 춘천-양양고속도로를 비롯하여 백두대간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가 속속 개설되고 있다.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가
임진년 조일전쟁의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600)는 자신의 선봉이 몇 일만에 문경새재를 넘을 수 있는가에 따라 조선 정벌의 승패가 달렸다고 믿었다.
그해 음력 4월 13일 현해탄을 건너온 그는 4월 28일 새벽 마침내 무주공산의 새재를 넘었고, 그날 오후 충주 탄금대에서 조선 최고의 용장 신립(1546-1592)의 기마병을 전멸시킨 뒤 5월 3일 한양을 점령했다. 조선의 맹장들이 필사적으로 가로막았음을 감안해도 상륙이후 백두대간을 넘은 것은 불과 보름, 한양을 점령한 것은 20일만이었다.
3월 26일 문경에 도착한 소서행장은 새재를 앞에 두고 이틀을 머뭇거렸다. 조선에도 싸움을 아는 장수가 있을 것이므로, 백두대간의 분수령 새재를 비워두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척후를 보내고 또 보내도 돌아오는 답은 새재가 비어있다는 믿기 어려운 보고뿐이었다.
마찬가지로 26일 충주에 도착한 신립 역시 새재로 척후병을 띄운다. 갑론을박, 새재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운명의 시간이 흘렀다. 적어도 시간적으로는 신립이 새재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하루 정도의 여유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립이 새재를 막지 않고 탄금대 들판의 배수진을 선택한 것은 아직도 논란이 그치지 않는 조일전쟁 최대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이다. 실제로는 새재에 진을 칠 시간적 여유가 채 부족했을 수도 있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징비록』 같은 당시의 기록에 보이듯 기마병을 위주로 하는 신립의 전술이 산악지형보다는 들판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조선군의 전투방식은 활을 위주로 한 기마전술이고, 왜군은 칼을 통한 단병접전이었다. 그러나 왜군에게는 조선군의 활의 위력과 말의 속도를 무기력하게 만든 조총이 있었고, 그 조총의 화력을 신립은 너무 가벼이 여겼다. 조선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최고의 용장과 최대의 정예군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아무튼, 조일전쟁의 초기 전개과정에서 문경새재가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었던 것은 새재가 바로 백두대간의 고개이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백두대간 조령 3관문의 지붕에 내리는 빗물이 한쪽은 한강으로 흘러 서울로 가고 다른 한쪽은 낙동강이 되어 부산으로 가기 때문이다.
새재 꼭대기의 물이 양쪽으로 흘러 각각 서울과 부산으로 간다는 조건이 있는 한, 부산과 서울의 관문은 오로지 문경새재뿐이다. 그 밖에 새재보다 더 높고 더 험한 지형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백두대간을 넘는 분수령 새재의 위용에는 결코 견줄 수 없는 것이다.
새재는 조선시대 초기에 새로 개척되는 고개이다. 이유는 기존의 계립령이 남한강의 황강나루(지금은 충주댐에 수몰된 옛 제천시 한수면 소재 나루)를 향하여 넘어갔기 때문에 문경에서 충주로 가는 길로는 한참을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새재의 이름은 그와 같이 옛길을 버리고 ‘새로 닦은 고개’라는 뜻과, 계립령과 이유릿재(지금의 이화령) 사이에 걸린 ‘사이 고개’란 뜻이 있는데, 나는 전자에 70%, 후자에 20% 정도의 비중을 두는 편이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그저 전설일 뿐 별다른 신빙성은 거의 없다.
돈이 된다면 부모도 내다 판다?
한강유역 하구에 위치한 한양을 점령하여 조선왕을 굴복시키려는 전쟁의 승패가 백두대간을 넘는 일에 달렸던 것처럼, 한강하구와 낙동강 하구를 연결하는 경부운하의 성패 역시 백두대간을 넘는 일로 판가름이 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번에는 넘으려는 주체가 사람의 발걸음도 자동차도 아닌 거대한 바지선이다. 마치 한편의 코미디 영화 대본 같지만, 조일전쟁 이후 400년이 흐른 지금, 때는 바야흐로 최첨단 공학이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21세기라는 점이 다르다.
오늘날 사람들의 공학에 대한 신뢰는 참으로 무한하다. 적어도 그 이론대로라면 인류는 이루지 못할 일이 거의 없어 보인다. 종교의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첨단기술이 속속 논란거리가 되기도 하고,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대규모 공사가 계획되고 추진된다.
그 배후는 물론 인류의 편리와 문명의 이기로 아무리 치장되었다고 해도 결국 자본의 금융논리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팔아서 돈이 된다 싶으면 상품으로 포장하여 내놓지 못할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라에서 쓸 돈이 부족하다고, 국민이 먹고 살기 어렵다고 바다를 팔고 산을 팔고 강을 판다.
문제는 간단하다. 팔아서 돈만 된다면 어머니 아버지도 내다팔 수 있다는 논리와, 제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여도 결코 시장에 내다 팔아선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논리의 충돌!
바야흐로 경제부흥에 목을 매고 신자본주의에 이르면서 한국 사회가 운명적으로 맞닥뜨려 넘어서야 할 총체적 담론의 대결구도가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경부운하의 출현은 다만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륙으로 이어지는 물길의 현장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향후 이 나라가 바라보고 나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가늠하는 총량의 화두임에 분명하다.
인공의 운하란 기본적으로, ‘물길의 운송수단’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강과 산이 지닌 생명, 생태, 생활에 필요한 그 모든 여타의 기능과 역할 일체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그만큼 그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운송수단의 필요성이 지극히 절박해야만 가능한 사업이다.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 올라보면 마치 거미줄처럼 도로교통이 극도로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하늘이나 바다의 운송수단을 펼치기에 탁월한 조건을 갖춘 우리나라에서 험준한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내륙 수운이 지금 그토록 절박하단 말인가?
한강은 임진강을 아울러 한반도 전체의 5분의 1을 차지할 만큼 거대한 강이다. 낙동강은 백두대간 동쪽의 경상도 전체를 아우르는 장강이다. 한반도 전체 인구의 절반인 3천 4백만 명이 그 두 강물을 먹고 그 두 강물의 생명력에 기대어 살아간다.
강은 생명의 젖줄이다. 예부터 내남없이 입을 모아 강을 생명의 어머니로 규정지어 온 지가 어언 수천 년이다. 시장에 내다 팔린 어머니가 어머니의 기능과 역할을 포기하고 나면, 젖줄이 끊어지고 삶터를 잃은 뭇 생명들이 어찌 될 것인가를 다시 물어볼 필요가 있는가!
마침내 ‘용 그림’이 등장하다
▲ 우리나라의 산줄기는 바다와 바다를 나누는 백두대간과, 강과 강을 나누는 14개의 산줄기로 이루어져 있다. 산줄기와 물줄기를 이해하면 비로소 그 땅의 역사와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안목이 열린다./김하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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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산을 넘으려니 참 답답했던 모양이다. 용의 그림은 그렸으되, 용을 본 자가 아무도 없으므로 그림의 형상이 전부 다를 수밖에.
맨 처음 ‘경부운하라는 용’을 그린 것은 1995년 ‘세종연구원’이었다. 그들은 이전의 주장에 살을 붙여 처음으로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한강과 낙동강은 이미 강이라는 물줄기가 있으니 그래도 그림이 좀 수월했을 터이지만, 막상 그들은 태백산맥, 혹은 소백산맥이란 용어를 끌어다 넘고자 했던 백두대간의 실체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곳이 그저 다른 곳에 비해 현격히 고도가 높은 지형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충주댐의 콘크리트 옹벽 곁에 같은 높이의 갑문을 만들어 충주호 수면 위로 일단 바지선을 끌어올려놓고 보면 답이 나올 거라는 ‘단순한 용’을 선택했다. 충주호 수면과 이어진 송계계곡에서 월악산국립공원을 관통하는 수로터널을 뚫어 문경으로 이어진다면, 어떻게든 충주호의 물을 낙동강 유역으로 넘기고자 했던 숙원마저 더불어 해결되는 절묘한 그림이었다.
충주호에서 문경 모곡댐 상류까지 백두대간 월악산국립공원을 관통하는 수로터널의 길이는 20.5km였다. 석회암 지대이므로 방수시공까지 해야만 하는 터널이었다. 세종연구원의 이후 보강연구에도 충주호와 낙동강을 연결하는 터널지역은, ‘조선계 대석회암통으로 일컬어지는 석회암 지역이 분포하여 운하입지로 불리’하다는 진단이 수없이 등장한다.
또한 충주호 수면에 도달하는 갑문의 높이 조절을 위해 남한강 유역에는 여주 강천댐, 충주 동량의 2단계 댐이 추가로 건설되고, 낙동강유역에는 문경 모곡댐, 점촌 불정댐, 우지댐 등이 추가로 건설된다.
그들은 이 모든 갑문이 중단 없이 가동되기 위해 필요한 용수를 연간 14.4억 톤으로 규정했는데 이를 충주호와 문경에 새로 건설되는 모곡댐에서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강수량이 여름에 집중되고 갈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 현실 때문에 스스로 그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는 대목이 곳곳에 보인다. 아무튼 이 세종연구원의 연구를 토대로 이듬해인 1996년 신한국당 이명박 의원은 운하계획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였고 60명의 국회의원이 서명했다.
두 번째로 용의 그림을 그린 것은 1998년 ‘국토개발연구원’이었다. 그들은 세종연구원의 충주호 노선에 대하여 두 가지 방법의 우회노선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 첫 번째 코스는, 남한강에서 달천을 경유,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보고서에는 ‘주봉리’로 오기)에서 문경 가은읍 원북리로 5.3km의 수로터널을 뚫는 방안이었다. 이 터널은 연풍에서 희양산(999m)을 관통하여 조계종 종립선원이 있는 봉암사 계곡으로 빠진 다음 낙동강 지류 영강에 합류하는 그림이다. 두 번째 코스는, 역시 문경 주진리에서 이화령 밑으로 6.5km 터널을 뚫어 문경 각서리로 빠져나가는 방안이다.
이 보고서는 세종연구원의 충주호 노선을 1안, 주진리-원북리 노선을 2안, 주진리-각서리 노선을 3안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장단점과 실현 가능성을 나름대로 면밀하게 분석하였다.
제 1안의 경우 몇 가지 방법을 추가로 모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충주댐에 운하 갑문공사를 강행할 경우 댐의 붕괴 우려, 석회암 지대를 관통하는 수로터널 입지의 부적격성, 주운 용수 전량을 충주호가 부담하는 문제 등등을 예로 들어 기술적인 가능성이나 공사비, 공사기간의 측면에서 현실성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 보고서가 2안과 3안의 대안노선을 제기했던 가장 큰 이유는 20.5km의 백두대간 통과 수로터널 때문이었다. 그 터널공사에만 1조원 이상이 들어갈 것이고 공사기간 역시 15년을 넘길 것으로 예측했다. 따라서 이들이 제시한 나머지 두 가지 대안노선의 특징은 백두대간을 최대한 짧은 거리의 터널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2안과 3안 역시 1안 못지않은 약점이 있었다. 터널의 고도를 높여 길이나 공사비가 4분의 1로 줄어든 대신 새로운 댐건설이나 인공수로 구간이 곱절로 늘어났다. 2안의 경우 댐 건설로 인한 공사비나 수몰지에 대한 민원을 가장 염려했으며, 3안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도시 시설물이 밀집한 문경을 통과해야 하는 점을 숙제로 꼽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고서가 선택한 최선의 노선은 연풍에서 봉암사 계곡으로 빠져나가는 2안이었다.
국토개발연구원의 연구보고서는 비록 ‘경부운하라는 용’의 그림이라고는 하되 비교적 객관성 있는 연구 자세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어느 정도 엿보인다. 보고서의 결론은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이런저런 조건상 내륙주운이 필요치 않으며, 더구나 경부운하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용이 필요한 사람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20세기의 마지막을 보내고 21세기로 넘어와 또 몇 년이 흐르는 동안 그 누구도 더 이상 ‘경부운하라는 용’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시간은 그러한 종류의 용이 필요한 사람들의 시간이 아니었다.
2006년 무렵, 대선이 1년 반쯤 남은 시점에서 잠들었던 ‘경부운하라는 용’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인 이명박 씨가 경부운하를 대선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사람들 사이에 더러 경부운하 이야기가 회자되기 시작했지만 그저 모두들 뜬구름 잡듯 단 한 번 구경도 못한 용의 형상을 상상하려고 무던히도 더운 여름을 보냈다. 단지 그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이 이렇게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리라곤 꿈에도 믿지 않았다.
2006년 9월 어느 날, 수십 명의 학계 각 분야 전문가가 충주댐에 모였다. 정치인이나 언론인도 몇몇 끼어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선이 아직 1년 넘게 남아있었고, 경부운하를 공약으로 내건 이가 대통령 후보가 될 확률도 희박했던 때였으므로 아직 더 지켜보자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다만 몇몇 전문가들은 충주댐 높이만큼 갑문을 만들어 바지선을 끌어올리는 일도, 송계에서 문경까지 20.5km에 이르는 터널을 뚫는 일도 현재 공학기술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분명히 했고, 나중에야 경부운하를 찬성하는 핵심인사로 밝혀진 모 교수만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의견을 되풀이했다. 나머지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도대체 그런 일들이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의 범위 밖에서 난감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그 동안 백두대간 현장을 누비고 다닌 경험을 토대로,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한다면 당연히 문경새재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이곳 충주댐이 현장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말에 어떤 이가, “어차피 선거용으로 쓰려는 것일 텐데 구체적인 장소가 중요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또 누군가 “충주댐 인근이 석회암 지역이라 경부운하 갑문공사를 강행할 경우 댐이 붕괴할 우려도 있다”는 국토개발연구원의 보고서를 상기시켰고, 연이어 “만약 경부운하를 선거용으로 사용한다면 충주댐 붕괴 우려”로 맞서면 그만이라고 매듭을 지었다.
신통한 일은, 이 일이 있은 직후부터 이른바 ‘조령터널 통과방안’이 거의 전면으로 급부상하고 이후 대선국면까지 1년 남짓 세종연구원의 충주호 노선은 아예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누구도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혹시라도 누가 다시 들먹일까 싶어 부랴부랴 파기해버린 문서처럼 감쪽같이 꼬리를 감췄다. 아마도 누군가 ‘경부운하라는 용’과 ‘충주댐 붕괴라는 용’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선거용으로 위력이 있는지에 대한 검토를 신속히 끝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배가 산을 넘으려니
▲ 백두대간 정상의 조령관문. 관문을 경계로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각각 한강과 낙동강으로 갈라져 서울과 부산으로 간다. 따라서 문경새재는 서울과 부산을 오갈 때 넘어야만 하는 가장 높은 분수령이자 ‘하늘 문’이었다./김하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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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씨의 한나라당 대선후보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면서 경부운하는 마침내 대선의 향방을 좌우할만한 강력한 ‘용’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이 경부운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백두대간 통과방안에 대한 뚜렷한 그림은 아직도 없다.
다만 ‘조령터널로 통과하는 정도’ 수준의 2006년 가을부터 ‘한반도대운하연구회’에서 모두 5가지 노선의 백두대간 통과방안을 정리하는 2007년 초여름까지, 그때마다 임기응변으로 방안이 재생산되는 과정을 역력히 확인할 수 있다.
운하의 백두대간 통과 방안이 충주호에서 문경 새재로 옮겨 온 이후부터 경부운하의 터널은 바야흐로 그 누구도 아는 이 없는 숫자놀음으로 변해 버렸다. 정체불명의 숫자들이 난무하고 누가 어떤 숫자를 어떻게 쓴다 해도 누구도 이견을 낼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조령터널이라는 조건에 세종연구원의 충주호 터널 길이 20.5km가 따라다니기도 하고, 또 어디선가는 20km, 24km, 25km 따위가 등장했다. 장소도 모르고 방식도 모르는데, 다만 조령터널이란 이름과 정체불명의 길이와 규모만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현장의 눈으로 보았을 땐 이랬다. 집을 지을 때는 일단 터를 먼저 잡고 그 터의 생김에 따라 지을 집의 종류와 형태가 결정되고, 설계도면이 나오고 건축비와 건축기간이 산출되는 것이 순서이다.
그러나 경부운하라는 집은 거꾸로 그 이전의 과정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는데, 공사비나 공사기간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거나, 나중에 그 집에 몇 명이나 들어가 살 수 있을지 논쟁이 벌어지고, 또한 그 집을 팔면 돈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는가에 온 통 혈안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내가 내린 결론은, 터를 잡거나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에는 관심도 없이 오로지 그 집의 쓰임새와 가치에만 목을 매는 목수는 결코 집을 지을 생각이 없는 것이듯, 이 경부운하 역시 구체적인 실제 건설계획이 없다는 확신이었다. 마치 먼 산천 어디 유령 같은 땅 사진을 걸어놓고 일단 투자자부터 모집한 뒤에, 정작 투자자들이 그 땅에 가보면 전혀 집을 지을 수 없는 땅이어서 투자금만 날리는 일처럼 말이다.
무렵에 전혀 새로운 노선, 이른바 ‘하늘 노선(Sky-Canal)’이 등장했다. 터널을 뚫지 않고 백두대간 꼭대기를 노천으로 넘어가겠다는 발상이었다.
아이러니였다. 추진 주체 스스로 백두대간의 수로터널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대한 미궁과 두려움을 노출시킨 셈이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긴 수로터널(1963년 폐쇄)의 길이가 불과 7.1km에 불과하니 그럴법한 일이었다. 그나마 나중에는 그래도 좀 그럴듯한 그림이 나오긴 했지만 맨 처음 나온 하늘 노선은 참으로 실소를 금치 못할 수준이었다.
해발 300m의 백두대간. 서울과 부산을 물길로 연결하려면 불가불 피해갈 수 없는 문경새재 부근 백두대간의 위용에 가로막힌 나머지 상대적으로 백두대간의 낮은 고도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남한강과 낙동강에서 가능한 그 고도를 향해 막연한 접근을 시도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전체 백두대간 구간 중에 고도가 가장 낮은 곳은 상주 화령(320m)에서 김천 추풍령에 이르는 구간이다. 이곳은 백두대간이 동서를 나누는 천연산성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에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전쟁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낮은 화령을 수월하게 넘어온 신라는 보은 삼년산성, 옥천 관산성, 황간 금돌산성, 청주 상당산성 같은 교두보를 개척했다. 그런 영향은 오늘날까지 내려와 경상북도 상주시를 따르는 6개 면(面)이 백두대간 서쪽으로 넘어와 있는 곳이다.
더욱 웃지 못 할 일은, 그곳이 한강유역이 아니라 금강유역이라는 점이다. 막상 백두대간의 낮은 고도를 찾아 어떻게든 물길을 그냥 넘겨보고자 하였으나, 한강유역에서 그곳에 접근하려면 화령 부근의 백두대간보다 훨씬 높은 한남금북정맥을 넘어 금강유역으로 넘어가야 한다.
하늘 노선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리를 피하려다 범을 만난 꼴이다.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금강을 거슬러 오르는 충청운하와 연계가 쉬워졌으니 오히려 더 잘 된 일이라고.
서막을 연 ‘용 그림 전시회’
새 대통령 당선자의 취임을 불과 보름 앞둔 지금, 고도를 한껏 낮추어 조령산(1017m)과 백화산(1063m)을 관통하는 21.9km, 4km짜리 터널 두 개로 백두대간을 넘는 방안과 달천 하구에서 상주 화령까지 충청북도 내륙을 관통하는 인공수로로 백두대간을 넘는 방안을 놓고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그 두 가지 방안이 가지는 구체적인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내는 일 자체가 거의 무의미하다. 그만큼 한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명성과 함량에 비해 경부운하의 실체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글을 쓰면서 지금까지 내가 찾아낸, 공공연히 떠도는 경부운하의 백두대간 통과방안만 해도 모두 13가지이다. 내가 미처 접하지 못한 것도 분명 있을 터이고, 막상 시중에는 그 13가지 방안이 자기들끼리 합치고 나누어져 또 다른 유령으로 떠돌고 있기도 하다.
‘한반도대운하연구회’ 홈페이지에 실린 글들마저도 오락가락하기는 마찬가지이고, 언론사 기사나 운하에 대응하는 시민단체들도 뒤죽박죽된 실체 없는 방안과 숫자를 아무렇게나 끌어다 쓴다. 한반도 대운하 계획을 총괄했다는 한반도대운하연구회의 대표마저도 최근 인터뷰에서 거론한 백두대간 수로터널에 대한 규모나 수치가 그때마다 다르다. 어느 것도 틀린 게 없고 또 어느 것도 맞는 게 없으니 참 기가 막힌 일이다.
어찌되었든 경부운하를 제 1공약으로 내걸었던 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확정되지도 않은 전 노선에 걸쳐 부동산 바람이 몰아치고, 해당 지자체에선 이미 관련 부서나 담당 모둠을 신설하여 들뜬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어떻게든 이런 정도의 공약일망정 믿고 ‘몰표’를 찍어준 국민들은 그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으니 바야흐로 아슬아슬한 곡예처럼 오금이 저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서 ‘없는 용’을 꺼내 보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무기도 못되는 구렁이 한 마리를 용으로 꾸며 내놓기라도 하는 날엔 그나마 아직은 살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우리 강산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터널을 줄이자니 인공수로가 길어지고, 인공수로를 줄이자니 터널이 길어진다. 터널을 피하자니 인공수로가 무섭고, 인공수로를 피하자니 터널이 두렵다. 백척간두! 한발 내딛을 수도 한발 물러설 수도 없다.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터무니없는 억지 춘향을 화두로 끌어안고 온 나라가 난리 법석을 피워야만 하는가.
나는 정치나 경제는 잘 모른다. 그러나 모름지기 이 땅 위에 태어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내가 이미 운명적으로 이 나라의 정치나 경제와 무관한 존재일 수 없다는 것쯤은 안다. 사람만이 그런 게 아니라, 나라 산천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의 구름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나 바람까지도 그렇다.
그 정치와 경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산과 강이, 구름과 공기와 바람이, 이 땅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지금 불안해하고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바라는 세상은 단 하나,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날이 새면 일터로 가고 저물어 돌아와 하늘과 바람과 나무와 강물과 더불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
부디, 돈이 목표인 한 무리의 사람들을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여 산과 강을 죽이지 마시라! 살아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경제는 일한 만큼 벌고, 그 번만큼으로 비굴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일한 만큼만으로 당당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세상이다. 살아 있기 위하여 자기 신체를 팔고, 살아 있기 위하여 국토의 산과 강을 죽이는 그런 나라가 결코 아니다.
운하 예정지 르포 글을 시작한다. '한국작가회의', 현실주의 작가네트워크 '리얼리스트100, '문화연대' 등은 한반도 운하 예정지를 답사하며 운하 건설로 훼손될 주변의 문화와 자연을 시와 산문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작업을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운하 건설의 폐해와 환경.문화 훼손을 알려내고자 하며 1월 23일 오전 11시에 문화연대 강당에서 답사 출정식을 가졌다. 운하 건설의 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와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은 각각 자동차와 자전거로 경부운하 예정지를 답사하였으며, 그 결과물을 책으로 만들어 출판기념회까지 열었다. 그러나 너무 멀리, 너무 빠른 속도로 대부분의 구간을 지나친 추친 측의 답사는 현장의 사실과는 달랐다는 지적이다. ‘리얼리스트 100’과 문화연대는 보다 가까이서 강 주변을 답사하며 운하 예정지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문화와 자연,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르포 형식으로 풀어내게로 했다. 자동차와 자전거로는 볼 수 없는 우리 강의 진짜 모습과 그 강에 기댄 생명들의 삶을 담아낸 글들이 될 것이다. 참여 작가는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면서 현실주의 작가네트워크 ‘리얼리스트 100’의 회원인 김하돈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 작가를 중심으로 소설가 안재성(『장편소설 파업』, 『경성트로이카』, 『이현상 평전』), 소설가 윤동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 소설가 이인휘 (『활화산』, 『내생의 적들』, 『날개달린 물고기』), 시인 박일환(『시집 푸른 삼각뿔』), 시인 문동만 등이다. 작가들은 운하예정지를 답사하며 시와 산문을 써서 발표할 예정이며, 이 작업은 김하돈 작가를 중심으로 작가회의 회원들과 ‘리얼리스트100’ 회원들이 각 지역에서 결합하는 형식으로 함께 글을 연재하게 된다. 이 기획연재는 인터넷신문 프레시안과 오마이뉴스, 민중언론 참세상에 동시게재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