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과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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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용과 이념 댓글 0건 조회 723회 작성일 08-03-06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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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은 ‘실용’이란 말을 무척 좋아한다. 취임사에서도 “우리는‘이념의 시대’를 넘어‘실용의 시대’로 나가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대통령이 실용을 내세우는 까닭은“협력과 조화를 향한 실용정신으로 계층갈등을 녹이고 강경투쟁을 풀고자 합니다”라는 취임사의 구절로 설명된다.
 
 '우리가 지닌 이념들을 버리고 실용을 원리로 삼으면, 계층들 사이의 갈등이 풀리고 투쟁적 행위들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즉 실용을 모든 사회적 갈등들을 푸는 묘약(panacea)으로 제시한 것이다.

원래 취임사에는 수사적 표현들과 선언적 주장들이 많이 들어간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수준을 훌쩍 넘는 특이한 주장이다. 과연 실용은 그렇게 큰 뜻이 담길 만한 개념인가?

일상에서 흔히 쓰이지만, 실용이란 개념은 들여다볼수록 모호해진다. 모든 사람들이 늘 실용을 추구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실속 없고 허황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실용을 추구한다고 믿는다.
 
실용이냐 아니냐 판단하는 기준도 모호하다. 무엇보다도, 실용이란 개념엔 개인들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려가 들어있지 않다.

실용이란 개념을 깊이 살피고 엄격하게 정의하려면, 우리는 철학 이론의 하나인 ‘실용주의(pragmatism)’를 참고하게 된다.
 
실용이란 개념과 실용주의란 개념 사이의 관계가 긴밀하거나 뚜렷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둘이 뒤섞여 쓰이고, 실용주의의 후광이 없었다면, 이 대통령이 실용이란 말에 그렇게 중요한 뜻을 담지 않았을 것이다.

실용주의는 원래 인식과 의미에 관한 철학 이론이다. 샌더스 퍼스(Sanders Peirce)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지적 개념들의 뜻들을 결정하는 방법 (a method of determining the meanings of intellectual concepts)”이다. 사회의 조직과 운영을 다루는 ‘사회 철학(social philosophy)’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실용주의는 구체적 경험과 개별적 결과를 중시한다. 자연히, 추상적 추론과 일반적 명제를 멀리하는 경향을 지녔다. 불행하게도, 이런 경향은 실용주의를 아주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대표적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그것은 진실이기 때문에 된다 (It works because it is true)’와 ‘그것은 되기 때문에 진실이다 (It’s true because it works)’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진리에 대한 적극적 탐구를 포기한 것이다.

이처럼 실용주의는 사회의 조직과 운영을 다루는 사회 철학이 아니며 탐구의 자세에서 소극적이다. 따라서 실용은 새로 나라를 이끌게 된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과 꿈을 담아내기에는 여러 모로 미흡한 느낌이 드는 개념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실용이라는 개념이 자신을 계량하는 척도를 지니지 않았다는 점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누구도 자신의 태도, 이념, 또는 정책이 비실용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실용성의 척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실용을 사회의 으뜸가는 원리로 삼는다면, 실용성을 따질 기준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실용성을 따지는 기준이 바로 사회 철학 이론들이다. 실용은 정의나 평등과 같은 사회적 가치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으므로, 사회 철학 이론들은 그런 가치들을 나름으로 측정하고 조화시키는 방안들도 마련해 놓았다.
 
그런 이론들은 흔히 이념이라고 불린다. 즉 실용은 이념이라는 기준으로 측정될 수밖에 없다. 다른 기준이 없다.

그러나 여러 이념들은 모두 자신이 가장 정의롭고 실용적이라고 주장한다.
 
고대 문명이 일어난 뒤 몇 천 년 동안 서로 다투었지만, 그 이념들은 화해한 적이 드물고 앞으로 화해할 것 같지도 않다. 실용을 따르면, 이념적 갈등이 풀리리라는 얘기는 근거가 없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실용을 추구하는 길은 옳은 이념을 고르는 것이다. 그 길밖에 없다.

“이념을 넘어선 실용”이라는 구호는 그저 내용이 부실한 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구호를 정색하고 따르면 사회는 방향을 잃게 된다.
 
 이념은 사람의 천성에 대한 여러 가정들에 바탕을 두고 많은 가치들을 조화시키는 과정들에 대한 이론들로 이루어진 방대한 지적 체계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나 사회도 이념의 도움 없이 목표를 잡고 방향을 유지할 수 없다.

서로 경쟁하는 이념들은 사람들의 선택을 통해서 진화해왔다. 그런 진화 과정을 통해서 가장 낫다고 판명되어 가장 널리 퍼진 이념은 자유주의다. 바로 우리 사회가 채택해서 헌법으로 구체화한 이념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시민들로부터 받은 위임사항(mandate)은 지난 10년 동안 좌파 정권들 아래서 많이 훼손된 자유주의 원리를 회복하라는 것이었다.
 
 '경제 회복’이라는 구호 아래에 있는 진정한 위임사항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대통령은 “작은 정부, 큰 시장”과 “기업친화적 정책” 같은 표현들을 통해서 자유주의를 충실히 따르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굳이 이념을 폄하할 까닭이 없다. 아니, 대통령은 헌법의 기본 원리인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떠받들 책무가 있다.
 
 지금 새 대통령이 할 일은 ‘지난 10년 동안의 경험은 자유주의가 얼마나 좋은 이념인가 새삼 증명해주었다’고 선언하고 천대 받은 헌법의 정신을 높이고 충실히 따르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함께 잘 사는 길임을 늘 시민들에게 일깨우는 것이다.

정치적 고려라는 측면에서도, 실용을 너무 내세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실용은 큰 뜻을 담기에는 너무 모호하고 소극적이다. 만일 어떤 심각한 사회적 논점을 두고서, 반대파가 진리나 정의를 외칠 때, 실용이라는 구호로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실용이라는 말은 ‘낡은 명분에 사로잡히지 않고 복잡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소박한 뜻으로 쓰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