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형 인간’, 누구나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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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멍부 댓글 0건 조회 1,319회 작성일 08-03-13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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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의 새벽형 업무 스타일이 화제와 반감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대표적 새벽형 인간 중 하나이니 새벽형 인간의 조건을 쓸 자격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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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벽형 인간이 된 이유는 이명박 대통령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새벽형 업무 스타일은 ‘건설 현장이 새벽부터 시작된다는 이유, 그리고 CEO로서 조찬회의가 많다는 배경’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내가 새벽형 인간이 된 것은 완전히 다른 이유다. 유학 중 한참 박사 논문을 쓸 때 둘째 아이를 낳고 난 후다. 도대체 잠 안자는 갓난쟁이와 씨름을 하다가 드디어 비결을 깨달았다.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비결이다. 밤 11시 쯤 자고 새벽 4~5시면 일어나는 아가는 잘 자고 나서는 혼자서 ‘헤부작 헤부작’ 잘도 놀았다. 나는 옆에서 일하면 되었고. 

아기가 자라고 유학에서 돌아와 본격 일을 하며 지금까지도 이 버릇이 계속된다. 무척 좋다. 새벽 2~3시간 동안 엄청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전화도 안 울리고, 내 시간을 빼앗으려는 사람들도 없다. 주변사위가 고요하니 집중도 잘되고 아이디어도 잘 떠오른다. 이렇게 새벽에 일해 놓고 나면 낮 시간이 시간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여유로운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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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새벽형 인간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낮 시간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24시간 일 대기형인 ‘못 말리는 워커홀릭’이지만 낮 시간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입장이다. 기본 업무를 처리해주는 스태프들도 있고 낮 일정을 내 재량으로 짤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 또는 극소수다. 

둘째, 낮잠과 토막잠을 잘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한다.

나는 낮잠을 꼭 잔다. 밤잠 시간이 5~6시간 정도니 낮잠은 필수다. 오후 3시 전까지 40분 정도(짧으면 15분이라도) 낮잠을 자지 않으면 오후에는 맥을 못 출 정도다. 차를 많이 타니 이동 중에 토막잠을 잘 수도 있다. 옆에 누가 있건 짧고 깊게 잔다. 그런데 1시간 점심시간 안에 맘 놓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셋째, 9~6 업무에 몰입해야 하는 조직원이면 곤란하다. 

그래서 이른바 중하위직은 새벽형 인간이 되기 무척 어렵다. 조직원이라면 이른바 ‘간부’ 급이 되어야 ‘새벽형 인간이 되는 사치’를 부릴 수 있다.(공직이라면 국장급, 민간이라면 임원급 이상? 언제 잘릴지 모르는 처지이지만.^^) 하지만 직접 자신이 문서를 작성하고, 기획하고, 집행하고, 복사하고, 전화하고 또 받고, 멜 체크하고, 영업하고, 회의하고, 수시로 현장을 드나들어야 하는 중하위직, 게다가 족히 1시간 이상의 출퇴근에 시달릴 이 사람들에게 새벽형 인간이 되라고 하면 그야말로 ‘어이쿠!’다.    

그러니 누구나 새벽형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출 수 없다. 물론 새벽부터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벽 노동 시장에 나와야 하루벌이를 하는 일용직, 택시 기사, 건설 인부, 새벽 증권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등 하지만 그들이 자청해서 생활리듬을 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벽형 스타일을 나 자신을 위해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남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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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아셔야 한다. 대통령이 새벽부터 회의를 주재하고 주말까지 일하면 ‘반짝 열기’는 붙겠지만 종국에는 총체적 생산성이 떨어질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대통령이 새벽부터 일하시는 것은 좋다. 하지만 홀로 해야 할 일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팀원들에게 퇴근할 때 당일 자료를 내 책상 위에 놓고 가거나 웹에 올려놓으라고 한다. 새벽에 그 자료들을 검토하고 생각을 정리하여 아침 9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하다 보면 남들 챙겨주는 일에 홀로 끙끙 대는 나 자신이 처량 맞을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해야 일이 효과적으로 잘 굴러가고 오버타임 없이 팀원들이 낮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전체적으로 생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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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이른바 부지런하다는 민간 CEO들이 조찬회의를 즐기는 것은 서로 스케줄 맞추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낮에는 사교 모임도 가야하고, 로비도 해야 하고, 현장에도 가봐야 하고, 손님도 맞아야 한다. 이런 CEO들에게는 수많은 참모와 보좌진들이 붙어있고 그들에게는 오버타임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한다. 또 말할 것도 없이 CEO들은 낮 시간에 토막잠을 자건, 시장에 가건, 친구를 만나건, 비밀모임을 가지건, 행사에 가건 마음대로 일정을 짤 수 있다.
  
하지만 장관들은 결코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다. 장관이 아침 8시에 대통령 주재회의에 참여하려면 참모 공무원들은 그야말로 죽는다. 대통령 앞에서 보고하거나 회의에서 의미있는 발언을 하려면 얼마나 준비를 해야 하는지... 보나마나 실무자들은 몇날 며칠 걸려 지난 밤 늦게까지 브리핑 자료를 만들어 장관 수행 참모에게 전달해주었을 터이고, 보나마나 아침 7시부터 장관 차에 같이 타고 가며 직접 브리핑을 할 공산이 크다. 집에서 새벽 6시에는 출발했을 것이다. ‘오버타임(overtime)’과 대기하는 ‘루즈타임(loose time)’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한 사람만 하나? 장관 한 사람에 국장, 팀장, 사무관, 주무관 등 몇 사람들이 따라 붙을 것이다. 그런 보고 수발 들다가 오히려 공무원으로서 꼭 해야 하는 일은 뒤로 밀릴 수 있다. 공무원들에게는 상급자 보고가 업무 1순위이기 때문이다. 빈정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실이다. 생사여탈권을 가진 상급자에 대한 보고에 공무원은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어떻게 안 그러랴. ‘철밥통 공무원’이라지만 민간인처럼 이직도 쉽지 않은 ‘철밥통의 비애’인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공무원은 머슴이 되어야 한다’, ‘불황이라도 잘릴 위험도 없고 월급도 나오니’라고 발언했는데, 마치 ‘공무원들은 오버타임에 시달려도 사표내고 도망가지 않으리라 싶어서 함부로 대해도 되는 머슴처럼 여긴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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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봉급직이 9~6 동안만 일해도 충분히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가능하면 ‘오버타임’ 월급이 나가지 않도록 하는 조직이 최고의 시스템이다. 가능하면 업무 혼선과 공연한 보고 체계로 대기하면서 시간 죽이는 ‘루즈타임’을 줄이는 조직이 최고의 시스템이다. 민간은 그나마 경제적 보상으로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지만, 공무원 조직은 ‘끈기 있고 체계적인 일처리’가 더 중요하다. 공무원은 국가 시스템의 허리이기 때문이다. 허리가 약하면 결국 꺾어진다.
  
공무원이 ‘9~6 몰입업무’ 풍토를 만드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관료주의’나 ‘보신주의’는 깨야 하지만, 몰아붙인다고 깨지지도 않는다. 어떻게 ‘몰입업무’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시중에 떠도는 속어 중 아주 괜찮은 말이 있다. 좋은 리더는 ‘똑게’가 되어야 한다고. ‘똑똑하면서 게으르라’는 말인데, 쓸데없이 밑의 사람을 몰아치거나 리더가 나서서 모든 일을 하면 결국 시스템이 안돌아갈 수 있으니 똑똑하게 체계적으로 일하고 공연히 부지런 떨지 말라는 뜻이다.

잊지 말자.
‘멍부’ 리더는 최악이고, ‘멍게’ 리더는 차악이고,
‘똑부’ 리더는 차선이고, ‘똑게’ 리더는 최고다.
‘새벽형 인간, 남을 괴롭히지는 말자.
조직을 흩트리지 말자. 체계를 흩트리지 말자.‘  
전형적인 새벽형 인간인 나 자신에게도 항상 다짐하는 말이다.

(뱀꼬리:
‘사람, 공간 그리고 정치’ 블로그.
 ‘김진애의 좋은 새벽’ 시리즈를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새벽 두 세 시간 홀로 세상과 만나는 시간이랍니다.
 때로는 신나게, 때로는 부글부글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