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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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특파원 댓글 0건 조회 755회 작성일 08-03-24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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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서해교전 전사 한상국 중사 부인 김종선씨 3년 만의 귀국
최형두기자 choihd@munhwa.com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국방부가 서해교전 추모 행사를 국가주관으로 격상시키기로 했다는 보도를 보고 지난 1월 이후 잠을 못 이뤘습니다.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이렇게 빨리 올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2002년 6월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34)씨가 한국을 떠난 지 3년 만에 귀국한다. 김씨는 남편의 전사로 인한 충격. 숨진 남편과 동료 장병들에 대한 정부의 냉대, 추모행사 때마다 가해지는 압력으로 인한 절망감 때문에 2005년 4월 훌쩍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기 와서도 첫 3개월은 눈물 속에서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조국을 버린 여자라고 비난하더군요. 제가 어떻게 조국을 버립니까. 남편이 죽으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나라인데….”

현재 뉴욕에서 살고 있는 김씨는 18일 문화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격한 감정을 다스리느라 울먹거리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지금도 당시 40일 동안이나 남편의 시신을 차가운 바다 속에 방치한 정부의 조치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영해를 지키려다 죽은 병사의 시신을 40일 동안이나 건져 올리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정부 쪽에서 사과 한마디도 못들었습니다. 1주년 때는 정부 쪽에서 추모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떠나오기 전 3주기 때도 해군참모총장 출신 한 분이 ‘안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한국에 있으니까 많이 힘들어서… 도저히 생활도 안 되고… 정신적으로 상처도 크고 자꾸 나쁜 생각도 들고… 그래서 무작정 떠나와 남편의 희생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생각했습니다.”

뉴욕 공항에 내린 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미용가게 종업원, 건물 청소원, 슈퍼마켓 직원 등으로 일했다. 건물 청소원으로 일할 때는 자정까지 일했다.

“내 자신을 뛰어넘어보자는 결심으로 왔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신세지기 싫었다 ”고 그는 말했다.

그런 김씨를 위로해준 것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군 퇴역군인들이었다. 지인들의 권유로 2003년 매사추세츠주 한국전 기념비 건립식에 참석했던 그에게 미군참전용사들은 2005년 비행기표를 보낼 테니 미국 구경을 다시 오라고 연락이 왔다.

실제 워싱턴의 박물관과 매사추세츠 우스터(참전비 소재지)도 구경시켜 주었다. “참전용사들 중 몇 분들은 제가 미국 체류기한을 넘긴 것을 안타까워하며 도와주려는 뜻도 비쳤지만 그분들에게도 신세지기 싫었습니다. 지금 제가 한국 간다는 소식에 대한 인터넷 댓글을 보니까 ‘돈 떨어져서 왔느냐’ ‘나라를 버린 사람이 왜 돌아오느냐’는 말들도 있더군요. 하도 험한 말들을 많이 들어서… 그 사람들이 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가면 서해교전을 ‘해전’으로 정당하게 평가해달라고 계속 주장할 것입니다.”

김씨가 특히 강조한 부분은 서해교전 부상자 출신들이었다. 김씨는 “확인한 바로는 이분들이 전역한 뒤 병원비도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가신 분들도 안타깝지만 살아계신 분들에게 국가가 제대로 해줘야 합니다.”

4월1일 한국행 항공권을 예약한 김씨는 서울에서 부모님을 찾아뵌 뒤 대전 국립묘지를 찾아갈 생각이다. “떠나오기 전에 남편에게 맹세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까지 남편 묘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가고 싶을 때도 마음을 억눌렀는데….” 김씨는 북받치는 감정 때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워싱턴 = 최형두특파원 choihd@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8-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