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산에 마음을 씻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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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산에 마음 댓글 0건 조회 728회 작성일 08-04-0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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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산에 마음을 씻고
 



다시 옐로스톤의 아침을 맞았다. 길을 나선 후 맞는 엿새 째 아침이었다. 그랜드 티톤 국립공원(Grand Teton National Park)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옐로스톤의 아름다움을 차마 두고 떠나지 못하여 분주한 마음 밀어 놓고 Lake Trail을 걸었다. 옐로스톤 호수 곁으로 난 작은 숲길을 걸었다.
 
 지난 밤 굶주렸던 모기들이 내게 달려들었지만 나를 호수 곁에서 떼어내지는 못하였다. 나는 한 동안 호수를 바라보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여행이란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에 담으며 떠나는 것이라고 위로하면서 말이다. 삶이란 담아 두고 싶은 많은 것들을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이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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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Teton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최창남

옐로스톤의 남쪽 문으로 나서자 바로 그랜드 티톤 국립공원이다. 가지런히 하늘로 뻗어 있는 소나무 숲길이 길을 따라 열린다.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다. 소나무 숲길에 눈을 떼지 못한 채 달린지 얼마 되지 않아 웅혼하고 장대한 산들이 나타났다. 그랜드 티톤이다. 여름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산들은 모두 만년설을 입었다. 7월의 뜨거운 햇살이 만년설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만년설은 마치 보석처럼 빛난다.
 
1만2000피트가 넘는 높은 산봉우리들의 웅대한 원초적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산 곁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간다. 거기 고요히 어딘가로 흐르고 있는 호수가 있었다. 맑은 물이다. 너무나 맑아 내 영혼이 들여 보일 것만 같았다.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 숨이 막혀 왔다. 아름다웠다. 우리는 자동차에서 내렸다. 옐로스톤 호수 보다 조금 작은 잭슨 호수(Jackson Lake)이다. 작다고 해도 넓이가 2만6000에이커나 되고 물가의 길이가 81마일에 달하는 도저히 눈대중으로는 가늠할 수 없이 큰 호수이다. 나는 망연히 호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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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Teton에 있는 Jackson Lake.ⓒ최창남

이렇게 맑을 수 있을까.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일까.

나는 그랜드 티톤의 아름다움에 젖어 들었다. 그랜드 티톤의 아름다움은 옐로스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옐로스톤의 아름다움은 현란하지만 그랜드 티톤의 아름다움은 단순하다. 그래서 옐로스톤을 지나면 옐로스톤의 현란한 아름다움으로 마음이 가득차지만 그랜드 티톤을 지나면 마음이 비워진다. 옐로스톤은 그 눈부신 아름다움과 수많은 볼거리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옐로스톤만을 보게 하지만 그랜드 티톤은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과 단순함으로 그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을 보게 한다. 그랜드 티톤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이다. 하늘과 땅과 호수와 나무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다. 그리고 이 다른 것들의 아름다움이 더해져 티톤은 더욱 아름다움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잔물결이 잭슨 호수에 인다. 호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담근다. 뜨거운 여름의 햇살 아래서도 물은 차다. 바람 때문인가. 지나는 배도 없는데 끊임없이 잔물결이 일어난다.

이 물결 따라 흐르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그랜드 티톤의 깊은 땅 속을 흐르고 흐르다 수 백 년 수 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나무들을 타고 올라 구름이 될 수 있을까. 구름이 되어 흐르다가 비가 되어 다시 이 호수를 적실 수 있을까. 깊은 땅 속을 지나며 들은 이야기들과 나무들을 타고 오르며 나눈 이야기들 그리고 하늘에 올라 구름이 되어 흐르며 본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시 비가 되어 내리며 사람들에게 말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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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ny Lake - 만년설이 덮인 산이 보인다.ⓒ최창남

사랑을 잃지 말라고 말이다.
사랑만이 참으로 그 삶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이다.

세상이 이렇게 살아가라고 가르쳐 준 삶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말이다.

그렇게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해 줄 수 있을까.

그저 이 잭슨 호수를 지나는 물처럼 살아가면 될 것을, 옐로스톤 강을 흐르던 물처럼 살아가면 될 것을. 그처럼 제 욕심 제 뜻 내세워 치대고 찔러대며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며 살아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처럼 모질게 다른 생명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그저 물처럼 모든 생명 품어 안고 살려나가며 살아가면 되었을 것을. 장엄하던 옐로스톤 호수처럼, 깊고 고요하기만 한 잭슨 호수처럼 고요히 머물러 수많은 생명들을 품어 키우며 살아가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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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ny Lake - 만년설이 덮인 산이 보인다.ⓒ최창남

왜 그렇게 제 삶을 살지 못하였을까.

호수 곁에서 떠날 줄 모르는 나에게 동행이 사진기를 들이댄다. 길을 재촉한다.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히히덕거리고 낄낄거리며 찍었다.

우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비지터 센터(Vistor Center)에 들려 Trail 지도를 얻은 후 General Store에 들려 먹을거리들을 마련했다. 베이글(Bagle), 사과, 샌드위치, 양배추, 쥬스 등을 빈 식품 통에 채워 넣었다. 가슴이 뿌듯하고 마음이 든든해졌다.

우리는 야채와 삶은 달걀, 빵과 홍당무, 사과 한 개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트레일을 걸었다. 보온병에 커피가 가득 채워져 있었음은 물론이다. 레이 호수(Leigh Lake) 트레일과 제니 호수 트레일(Jenny Lake Trail)을 걸었다. 숲길마다 이름 모를 들풀들로 가득하다. 들풀 하나하나가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나를 반긴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들풀 하나에게까지 마음의 눈이 미친다. 풀 하나 하나 꽃송이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 제 이야기를 한다.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제 자태를 보아 주세요. 지난 밤의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요. 큰 사슴이 먹어버린 제 친구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조금 더 큰 곰이 있답니다. 조심하세요.

바람을 따라 제 몸 흔들어 대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전한다.

숲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있다. 숲은 사람 사는 세상과는 다르다. 사람 사는 세상이야 제 마음에 드는 것만 품어 안아 살리지만 숲은 그렇지 않다. 숲은 모든 생명을 품어 안는다. 어느 생명 하나에게도 결코 소홀함이 없다. 골고루 따뜻하게 품어 사랑으로 키운다. 그랜드 티톤 국립공원의 숲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옐로스톤의 숲도 그러하다. 모든 숲이 그러하다. 그랜드 티톤 국립공원의 숲은 그런 숲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맑다. 호수가 품어 안은 작은 물고기까지 모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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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ny Lake Trail에 핀 꽃들.ⓒ최창남

저 맑은 호수 속으로 들어가면 내 지나온 삶의 모습도 모두 보일 것만 같다.
어리석었던 나의 젊은 날들을 만나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물어 볼 수 있을까.
살아감의 지혜를 말해줄 수 있을까.
오십이 넘은 제 인생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호수 속으로 들어간다. 무릎까지 차오른다. 시원하다.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잔물결이 밀려온다. 배가 지나고 있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면 숨어 있는 아름다운 폭포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배에 타고 있다. 배는 나아가며 잔물결을 내게로 밀어낸다. . 밀려 온 물결이 내 정강이를 어루만진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동행을 바라본다.
발을 호수에 담그고 바위에 걸터앉은 채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등 뒤로 보이는 숲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뭇잎은 바람에 살랑거리며 나를 보고 웃는다. 그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