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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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어가 댓글 0건 조회 764회 작성일 08-04-0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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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람이 미국으로만 유학을 오면 미국 쪽에서야 고마운 일이지만 앞으로 10년 후 한국 지식인의 상당수가 미국 일변도의 사고를 갖지 않을까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얼마 전 경주에서 열린 ‘한미관계와 언론’이라는 세미나에서 만난 헨리 해가드 주한 미국대사관 정치 담당 일등서기관의 말이다. 그는 한국 근무만 6년째로 누구보다 한국을 잘 알고 있는 외교관이다.

 

 미국 국토안보부 유학생 및 교환학생 정보시스템(SEVIS) 자료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미국에 유학 중인 한국인 유학생은 10만3000명으로 미국 내 전체 외국인 유학생의 14%를 차지하며 출신 국가별로도 2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우리나라보다 인구가 훨씬 많은 중국과 인도를 앞지른 것이다.

 

 이 통계는 학생비자와 교환방문비자를 받아 미국의 정규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어학 및 직업 연수기관에 등록된 학생을 모두 포함한 수치다.

 

 문제는 여기에 들어 있지 않은 엄청난 수의 초·중·고 조기 유학생이다. 이들 어린이와 청소년이 우리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알기 전에 미국 문화를 먼저 접해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문화적 충돌로 인해 그릇된 정서를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자녀의 조기 유학 이유로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현지에 가서 배우면 원어민 수준의 발음을 구사할 수 있어서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아마 국제 사회에서 가장 출세한 한국인이라면 주저 없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반 총장은 고등학교 때 외국학생의 미국 방문 프로그램에 선발돼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것이 자신의 외교관 인생을 결정지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또 하버드 대학에서 행정학 석사도 받았다. 하지만 반 총장의 영어 발음을 들으면 어느 누구도 그를 원어민 수준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그의 영어 발음은 지극히 한국적이다. 약 37년의 외교관 생활을 한 반 총장도 원어민 수준의 영어 발음을 구사하지는 못한다. 이는 외국인이 한국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의 발음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해거드 서기관은 “반기문 사무총장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이유는 그의 발음이 원어민 수준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연설문이나 대화 속에 확고한 철학과 인생관이 들어 있어서”라고 말한다.

 

 

 얼마 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영어 몰입식 교육을 꺼내들었다가 여론의 호된 질책을 받은 바 있다. 글로벌 시대를 강조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는 아직도 영어에 알레르기가 있는 많은 국민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정서였다.

 

 물론 우리나라 공교육, 특히 영어 교육의 문제점을 모르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초·중·고·대학 16년을 마쳐도 외국인과 기본적인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영어 사교육 시장이 팽창할 수밖에 없다.

 

 지난달 20일 교육과학부 업무보고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영어 몰입식 교육에 대해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또 “사교육비의 절반은 영어를 배우는 데 든다”며 “영어가 인생의 목표는 아니지만 살기 위해, 경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많은 국민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국민이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는 원어민 수준의 발음을 기대하다가 정말 중요한 한국인으로서의 가치관과 역사의식을 잊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영어는 단지 국제화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그것이 결코 목적은 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