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냐 우냐”에서 “실용이냐 아니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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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용이 댓글 0건 조회 1,400회 작성일 08-04-15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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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좌냐 우냐가 아니다. 강하냐 약하냐의 문제다.”

1월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 대중운동연합(UMP)의 대의원 대회장에는 뜻밖의 손님이 연사로 초대됐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다. 좌파 거물 정치인이 프랑스 우파 정당 대의원 대회에 연사로 나서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프랑스의 사회당 일각에서는 블레어를 배신자라고 비난했지만 블레어는 목소리를 높였다. 프랑스 일부 좌파 정치인을 겨냥한 듯 “과거의 낡아빠진 유럽의 좌우 정당 해법으로는 세계화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방청석의 프랑스 우파 정치인들은 연단에 선 영국의 좌파 정치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른바 ‘제3의 길’은 유럽의 정치지형을 바꿔놓았다. 유럽의 정당을 좌냐 우냐로 나누는 건 고리타분한 일이 아니라 이제 불가능한 일이 돼 가고 있다. 과거 유럽의 좌·우파는 이제 ‘실용’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력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는 게 현지 정치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중원을 장악하라’.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는 선거 때마다 흔히 등장하는 말이다. 영국의 BBC가 2006년 스웨덴 총선 때 “이번 선거는 중원을 장악하려는 좌와 우의 싸움”이라고 표현한 이후다. 좌우가 확실히 구분돼 선거 때마다 뜨겁게 싸우던 모습이 사라졌음을 알려주는 말이다.

◇ 좌·우파 정책 장점 끌어 모아 ‘실용’으로
 
2006년 선거 당시 스웨덴 우파연합을 이끈 프레드리크 레인펠트 보수당 당수는 우파 정책으로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는 데 성공했다. 오랜 ‘복지병’으로 실업률과 물가가 동반 상승하고 저성장 기조에 있던 스웨덴에 수술을 예고한 것이다. 일하기 싫어 스스로 실업자나 환자가 된 사람들을 줄이기 위해 실업·병가 수당에 메스를 가했다. 그러나 단순하게 복지를 축소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기존의 취업센터는 실업수당을 타기 위한 실업자 신고센터였지만 그는 이를 실질적으로 일자리를 주는 곳으로 바꿨다. 정부가 국민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먹여 살려 준다는 ‘웰페어(welfare)’에서 일하면서 먹고살게 해 주는 ‘워크페어(workfare)’로 전환하는 시도였다. 이를 통해 절약된 예산은 다시 교육과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에 대한 복지혜택으로 돌렸다.

전형적인 좌와 우의 정책 융합 사례는 덴마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덴마크 정부는 노동시장의 유연성(Flexibility)과 사회 보장(Security)을 혼합한 개념인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를 탄생시켰다. 덴마크는 기업주들이 자유롭게 직원을 해고할 수 있다. 대단히 친기업적인 우파 정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국가가 직접 챙긴다. 덴마크 정부는 실업자들이 4년 동안 전 직장에서 받던 급여의 80%를 실업수당으로 준다. 공공고용센터는 수시로 재취업 알선을 위한 상담을 하고 실업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 대한 보상까지 한다. 이 때문에 기업은 신규 채용 시 큰 부담 없이 사람을 쓸 수 있고 노동자 역시 직업 전환의 불안감에 완충제를 갖는 셈이다. 외국 기업은 이런 자유로운 노동 환경 덕분에 서로 들어오려고 한다. 자연히 투자가 활발해지고 일자리가 늘어나는 식의 선순환을 가능하게 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2003년 발표한 ‘어젠다 2010’ 역시 대표적인 좌우 벽 허물기의 예다. 내용은 고용시장 유연화, 실업급여 축소, 중소기업 법인세 인하 등이었다. 독일의 전통적 좌파 정당인 사민당 소속 총리였지만 내놓은 정책은 모두 우파 정당에서나 나올 법한 것들이었다.

이후 정권은 기사-기민당 연합의 앙겔라 메르켈로 넘어갔지만 어젠다 2010은 그대로 이어진다.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경제 관련 주요 개혁의 큰 틀을 짜는 역할을 좌파 석학 자크 아탈리에게 맡겼다. 외무장관 등 내각에도 좌파를 중용했고 각종 위원회에도 좌파 인재들이 넘쳐난다. 개혁이라는 과제에는 좌우 구분이 없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의 표현이다.

몇 가지 경제 정책을 놓고 보면 유럽의 이 같은 흐름은 더욱 뚜렷하다. 지난달 재집권에 성공한 스페인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는 좌파 정당 소속이지만 선거 공약으로 부유세 폐지를 내걸었다. 이는 프랑스 우파 정당인 대중운동연합(UMP)의 사르코지조차 지난해 대선 후보 시절 내놓았다가 반발을 우려해 도로 집어넣은 카드다. 좌파 정당이 집권한 영국과 이탈리아·스페인 모두 법인세를 크게 내린 것도 한 예다.

◇ 사라지는 우파 콤플렉스
 
프랑스 격월간 전문지 ‘국제관계’의 유럽 정치 전문기자인 장 에르부에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전통적인 유럽의 좌우 정당 개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아울러 “90년대 말부터 빠르게 나타난 이 같은 현상은 유럽에서의 이른바 ‘우파 콤플렉스’도 걷어냈다”고 지적했다. 유럽에서는 20세기 이후 지식인과 양심세력은 좌파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우파 정책을 주장한다고 무식하거나 ‘수구 꼴통’이라고 비난하는 게 오히려 구닥다리가 된 것이다. 사르코지 밑에서 일하는 자크 아탈리 같은 사람들의 활발한 활동은 그 대표적인 예다.

‘환경+민생’정책 어디든 통한다
‘보수의 아성’ 파리서 실용진보 후보 압승

지난달 프랑스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가장 큰 관심은 파리 시장에게로 모아졌다. 130년 동안 우파의 아성이었던 파리를 2001년 빼앗아간 사회당의 베르트랑 들라노에가 과연 재선에 성공할지 여부였다. 상대 진영에서는 들라노에를 “자전거 몇 대 놓은 것밖에 한 일이 없다”고 질타했다. 전통적인 우파 세력의 결집까지 호소했다. 그러나 승부는 싱거웠다. 들라노에는 파리에 출마한 사회당 소속 각 구청장 선거운동을 해주는 등 여유를 보이면서 압승했다.

들라노에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는 데 가장 주효했던 정책의 키워드는 ‘환경’과 ‘민생’이었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의 대표적인 히트작 무인 자전거 시스템 ‘벨리브’는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켰다.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최대 화두를 해결하는데 이처럼 신선한 아이디어는 흔치 않았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공짜에 가까운 요금으로 자전거를 내 것처럼 탈 수 있고 자동차 통행량을 줄일 수 있었다. 운영 기업은 파리 시내 곳곳의 광고권을 따내면서 잇속을 챙겼다. 들라노에는 사회당 정치인이지만 ‘벨리브’는 시장원리를 최대한 활용한 환경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벨리브’는 유럽의 새로운 진보 정치의 상징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유럽 정치 전문가인 장 에르부에는 “환경 문제는 한때 좌파 정치인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지만 이제는 좌우 구분 없이 모든 정치인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가 됐다”고 지적했다.

들라노에는 재임 동안 지하철 서비스를 강화했다. 이용객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지난해 파리 지하철은 50여 년 만에 최대 이용객 기록을 세웠다. 반면 파리 시내 자동차 통행량은 그가 재임하는 동안 10% 이상 줄었다. 그는 지난해부터 하이브리드카 택시 보조금 제도를 도입했다. 올해는 전기자동차 대여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1차 투표가 끝나고 합종연횡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상당수 사회당 후보들은 녹색당과 손을 잡았지만 그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파리 시민들이 이미 그를 녹색당원보다 더 친환경적인 정치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문조사 결과가 이를 설명해 준다.

그는 또 한여름 파리 센 강변을 관광객과 서민들을 위해 해변처럼 만들어 줬다.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파리 외곽에 고층 빌딩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들라노에 프로젝트도 내놓았다. 과도한 규제 풀기의 하나였다. 우파 여당의 파나피외 후보도 들라노에와 같은 전기자동차 대여와 고층 빌딩 타운 건설 공약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들라노에의 7년은 파리 시민들에게 그의 환경·민생정치에 대한 큰 신뢰를 심어 준 뒤였기 때문에 무게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