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 건설에 집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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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태종 댓글 0건 조회 758회 작성일 08-04-1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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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재천도·청계천 공사 등 대형 사업 뚝심으로 밀어붙여
백성들 반발 우려로 운하는 무산
 
태종 10년(1410년) 10월 13일 태종은 느닷없이 "전국의 기생들을 없애라!"는 명을 내렸다. 아마도 세자의 기생 탐닉이 심해지니 그것을 원천적으로 막아보자는 발상이었던 것 같다. 이 황당한 명에 거의 모든 신하들이 경쟁적으로 "지당하신 분부"라고 맞장구를 쳤다.
 
오직 한 사람, 영의정 하륜(河崙 1347년 고려 충목왕 3년~1416년 태종 16년)만이 절대 불가하다고 맞섰다.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태종도 웃으며 자신의 기생 철폐안을 철회했다. 하륜에 대한 태종의 총애는 그만큼 깊었다.

태종과 하륜의 인연은 하륜의 계산된 도발로 맺어졌다. 성현의 '용재총화'가 전하는 일화다.
 
정도전의 미움을 받던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아 외지로 나가게 됐다. 하륜 집에서 환송연이 열렸을 때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던 정안공 이방원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이방원이 하륜에게 술을 부어주려는데 하륜이 취한 척하며 상을 엎어버렸다. 옷이 더러워진 이방원은 크게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하륜은 곧바로 "왕자에게 사죄를 해야겠다"며 자리에서 나와 이방원을 집까지 따라갔다. 이방원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하륜은 곧 나라에 위태로운 환란이 있을 것이니 선수를 쳐야 한다고 아뢰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이렇게 해서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고 이후 태종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관상에 뛰어난 하륜이 일찍부터 이방원에게서 왕기(王氣)를 읽었기 때문이다.

하륜은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끝내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는 한양 천도 및 모악산 궁궐수축론의 주창자였다. 태조가 지금의 경복궁 자리를 고수했지만 태종은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일단 수도를 개경으로 환도한 바 있다.
 
이때 하륜은 줄기차게 한양 재천도를 주장했고 궁궐도 지금의 연세대 인근 모악산 아래로 해야 한다고 보았다.
 
논란이 끝없이 이어지자 태종은 개경과 현재의 북악산 아래, 그리고 하륜이 내세우는 모악산 아래 등 3가지 안을 놓고서 동전점을 친다. 점이라고 할 것도 없고 각각에 대해 삼세번 동전을 던져 앞면이 세 번 중 두 번으로 가장 많이 나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본궁을 완성하고 한양으로 재천도키로 결정이 됐다. 하륜은 국운(國運)의 융성과 관련해 모악산 궁궐론이 관철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했다.

사실 태종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권력을 누린 '천하의 하륜'이었지만 그는 '운하'문제에서도 제대로 뜻을 펼치지 못했다. 태종 12년 지금의 청계천 공사를 관철한 하륜은 곧바로 충청도 태안군 순제라는 곳에 운하건설을 추진했다.
 
 태안반도 주변은 암초가 많은 바다였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안전항해를 위해 반도를 가로지르는 운하건설이 여러 차례 추진됐던 곳이다.
 
조선이 들어서자 태조 이성계도 이곳에 운하건설을 검토했다. 그러나 현지를 돌아보고 온 중추원 지사 최유경이 "바위가 많아 갑자기 팔 수 없다"고 보고하는 바람에 무산된 바 있다.
 
그리고 이 때 하륜이 밀어붙여 3개월 만에 5000명의 병사들이 동원돼 태안반도를 가로지르는 소형 운하가 태종 13년 2월 완성됐다. 그런데 이에 대한 실록의 평은 부정적이다. "헛되이 민력(民力)만 썼지 반드시 이용되지 못하여 조운(漕運·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은 결국 통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한 달 후 충청도 관찰사 이안우는 큰 배들은 제대로 통과하기 어려워 바닥이 평평한 소형 선박을 만들어 통과할 수밖에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후 '순제 운하'는 수심 및 폭 확대를 둘러싸고 격론이 제기됐지만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한 태종의 의중 때문에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런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륜은 태종 13년 7월 20일 이번에는 숭례문(일명 남대문)에서 용산까지 운하를 파서 배를 통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원래 지방에서 올라오던 공물이 용산에 집결했기 때문에 바로 숭례문 앞까지 조운선을 끌어들이자는 구상이었다. 다른 신하들도 하륜의 눈치를 보느라 모두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동조했다.
 
 그러나 태종은 숭례문에서 용산까지는 모래땅이라 운하를 파기에 적절치 않고 또 1만 명 이상의 백성을 동원해야 하는 대역사(大役事)라 곤란하다며 하륜의 안을 윤허하지 않았다. 결국 하륜의 다양한 국토개조 구상은 그의 머릿속에 머물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