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수도가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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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울 댓글 0건 조회 956회 작성일 08-04-1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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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태조는 개국과 함께 곧 한양천도계획을 진행하다가 시중 배극렴 등의 계청에 의하여 그 해 안으로 실시하려던 천도계획을 일시 중지하게 되었는데,
 
그 후에 천도 후보지로 등장된 것이 충청도 계룡산하였다.
 
 계룡산은 일찍이 신라시대 오악(五岳)중 서악(西岳)에 해당되던 명산이며 그 산을 중심으로 하여 산형수세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 계룡산이 새 수도의 후보지로 논의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태조 2년 1월 2일, 전년 겨울에 왕가의 태실지(胎室地)를 간심(看審)하기 위하여 양광(楊廣)(경기 · 충청도) · 경상 · 전라도에 나갔던 태실고증사(胎室考證使) 권중화(權仲和)가 돌아와서 양광도 계룡산의 도읍도를 헌상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권중화는 원래 학문이 풍부하여 의약, 지리(풍수), 복서(卜筮) 등 부문에까지 통달하였으며, 일찍이 고려조 우왕 4년(1378)에도 정당문학으로서 왕명을 받아 협계(峽溪)(황해도 신계)의 북소(北蘇) 기달산을 간심한 바 있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개국 후에는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 영삼사사(領三司事) 등의 요직으로 태조의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다.

이 때 권중화는 돌아와서 태실의 길지로 예정한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진산(珍山))지방의 산수형세도를 헌상하고, 계룡산도읍도도 함께 헌상하였으니, 그것은 태실의 지를 찾아보는 중에 있은 부산물로 볼 수 있다.

어떻든 권중화의 올린 계룡산도읍도와 그 설명은 천도를 서두르던 태조의 호기심을 끌었던 것으로서 그달 초 7일에 태조는 18일에 친히 계룡산에 행행(行幸)할 것을 하교하였다.
 
 그리고 19일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 안종원(安宗源) · 우시중(右侍中) 김사형(金士衡) ·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李之蘭) ·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 등과 의흥친군(義興親軍)의 시종으로 계룡산으로 길을 떠났으며 도중에 양주 회암사에 들러 왕사 자초(自超)[무학(無學)]를 동행하기도 하였다.[註16]

태조 일행이 계룡산 하의 신도 후보지(지금 논산시 두마면)에 도착한 것은 2월 8일의 일이었으며, 새 도읍지로서의 적합성 여부를 조사하는 일은 곧 진행되었다.
 
 9일에는 태조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친히 산수형세를 살펴보고,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 성석린(成石璘) ·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김주(金湊) ·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염(李恬)에 명하여 조운(漕運)의 편부(便否),
 
도로의 험이(險易) 관계를 조사하게 하며, 또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 및 남은으로 성곽의 형편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리고 10일에는 권중화가 신도에 건설할 종묘 · 사직 · 궁전 · 조시(朝市)의 형세도를 작성하여 드리고,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행(金師幸)이 노끈을 가지고 실지 측정을 하니, 여기서 계룡산 하의 신도설정(新都設定) 문제는 제1차적으로 결정을 본 셈이었다.
 
그리고 태조 일행의 귀경과 함께 김주(金湊) · 박영충(朴永忠) · 최칠석(崔七夕) 등의 관원으로 현지에 남아서 신도영건(新都營建)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또 그 해 3월에는 신도 기내(畿內)에 속할 주현 · 부곡 · 향 · 소 등 81개소를 정하고, 8월에는 경기내(京畿內)의 전지(田地)를 고쳐 측량하여 민정에게 나누어 주는 등 건설공사와 함께 행정관계의 여러 가지 조치도 진행하였다.[註17]

그런데 당시 계룡산 하를 신도로 정한데에는 그 처음 논의가 천문지리 등의 일을 주관하던 서운관의 영사(領事) 권중화(權仲和)가 계룡산 도읍지도를 헌상한데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며,
 
태조의 친심(親審) 결정이 있을 때에도 권중화는 물론 다른 서운관원들 및 풍수학인 이양달(李陽達) · 배상충(裴尙衷) 등의 풍수지리학적 형세의 심시(審視)가 있은 후에 결정하였던 것으로서,
 
풍수가들이 흔히 말하는 '회저고조(回阻顧祖)' ·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 등의 계룡산지리설이 태조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 실지에 있어서도 계룡산 부근의 자연지리는 남쪽 덕유산에서 갈려 북으로 나오다가 공주 동쪽에 와서 우회하면서 조종(祖宗)을 돌아보는 것 같은 이른 바
 
 '회룡고조(回龍顧祖)' 격의 형세라든가 거기서 다시 산세가 안으로 만곡(彎曲)하여 마치 태극도형같은 형상을 이루고,
 
수세(水勢) 또한 동남쪽에서 동북쪽으로 돌아 금강과 합류하면서 계룡산의 북쪽으로 흘러가는 형세가 진기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註18]

그런데 약 10개월이 공역이 진행되는 중 그 해 12월에 이 계룡산 신도의 건설공사가 파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경기좌우도관찰사 하륜(河崙)의 상언에 의한 것이다. 이 때 하륜은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계룡산의 도읍지로 불가함을 말하였다.

「○ 도읍은 나라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역이 남쪽에 치우쳐 있어 동 · 서 · 북면과 거리가 멀다.
 
○ 계룡산의 지리는 산은 건방(乾方)(서북방)에서 왔는데 물은 손방(巽方, 동남방)으로 흘러가니 이것은 송조(宋朝) 호순신(胡舜臣)(申)의 말하는 '수파장생 쇠패입지(水破長生 衰敗立至)'의 땅이다.」

이상 하륜이 말한 두 가지 이유 중에서 계룡산이 남쪽에 치우쳐 불편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인정하였던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둘째번 풍수지리적으로 불가하고 더구나 쇠약 · 패망이 당장 오게 된다는 이론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인데, 이 때 하륜은 송조 주의랑 호순신(胡舜申)의 「지리신법(地理新法)」의 이론에 근거하여 이를 말한 것이었고,
 
즉 길흉정방(吉凶定方)에 있어서 물은 길방에서 와서 흉방으로 흘러가야 길복(吉福)의 지(地)가 되는데 계룡산의 경우는 반대로 흉방에서 와서 길방으로 흘러가니 이는 생왕(生旺)의 기운을 충파(衝破)하여 흉화(凶禍)를 초래하는 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륜의 신도불가론(新都不可論)은 음양풍수설이 성행하던 당시에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태조는 권중화를 위시하여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 · 판중추원사 남재(南在) 등 문인중신들로 하여금 하륜과 함께 여러 문서를 참고하고 또 고려조의 여러 산릉의 길흉 관계를 복험(覆驗)하여 아뢰게 하였으며,
 
권중화 등이 봉상사(奉常寺) 소장의 여러 산릉형지안(山陵形止案)을 가지고 그 산수의 형세와 길흉 관계를 상고하여 본 결과 모두 부합하여 대장군 심효생(沈孝生)을 계룡산 현지로 보내어 건도공역(建都工役)을 파하게 하였다.
 
 따라서 10개월 간이나 진행되던 계룡산의 신도공사는 중단되고, 약간의 유적과 함께 '신도안(新都안)'이라는 통속 지명만이 지금까지 남아 전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