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떠나시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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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생님 댓글 0건 조회 738회 작성일 08-05-1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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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 선생이 떠나셨다.큰 작가를 떠나보낸 뒤 살이 패이듯 아픈 슬픔과 상실감은 쉬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거목이 쓰러지면 그늘도 사라지는 것.한동안은 가릴 데 없이 초췌하게 드러난 마음이 땡볕을 견뎌야 하리라.
 
두말할 것도 없이 박경리 선생은 '토지'의 작가다.'토지'는 최 참판댁의 가족사를 중심축으로 19세기 말에 시작해 해방 공간까지 끌어안고,
 
경상도 하동의 평사리에서 시작해 만주와 서울ㆍ도쿄 등지로 공간적 배경이 방사선형으로 뻗어간 소설이다.토지는 장강과 같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대하소설이요,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한국인의 삶을 규정한 파란과 격동의 역사를 담은 명품이다.

특이한 것은 남자에서 남자로 이어지는 재래 혈통계승의 인습을 깨고,여성에서 여성으로 이어지는 여성 혈통계승의 가족사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다.

박경리 선생은 일찍이 6ㆍ25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이어 아들을 먼저 보내는 참척의 슬픔을 당하셨다.선생은 누구보다도 불행했으나 그 불행을 원망하며 그 뒤에 숨지 않았다.
 
범인(凡人)에게 불행은 기껏 삶에 치욕만을 안기는 족쇄지만,예술가에게 그것은 순도 높은 창조의 질료다.'토지'는 스물네 해 동안 참척의 아픔을 속으로 삭이고,고독과 병마와 사투를 벌이며 거둔 전리품이다.선생은 온 생의 무게를 펜 하나에 지탱한 채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고백한다.
 
선생을 생각하면 미국 철학자 월터스토프의 말이 떠오른다."고통의 골짜기에서는 절망과 쓰라림이 양조(釀造)된다.그러나 또한 품격도 제조된다.고통의 골짜기는 영혼을 빚어내는 계곡이다."

선생은 그 혼신을 다하는 헌신,문학을 위해 목숨을 건 고투와 인고의 세월을 건너오셨다.마침내 선생은 권위가 없는 시대에 누구나 이의없이 동의하고 흠모하는 문학의 권위고,본받고 따라야 할 참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사표(師表)로 삼을 만한 향기로운 스승이셨다.

선생은 사특함을 멀리 하고 삼엄한 윤리를 세워 올곧게 사신 분으로 널리 알려졌다.우리 사회에 지식인이라는 이들은 많다.그이들 중에서 앎과 삶이 하나로 이어지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앎과 삶이 어긋나 있는 사람이 열에 다섯이고,그 어긋남을 크게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사람이 태반이다.실천이 없는 앎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병이다.선생은 드물게 앎과 삶이 하나 된 분이다.그이는 뭇생명들이 더불어 나눠야 할 땅과 물을 아끼고 섬겼으며,약한 것,가녀린 것,죽어가는 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선생은 말년을 원주에 내려가서 사셨다.봄이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고,여름에는 연못의 맹꽁이가 목이 터져라 울어댔다.선생은 이 세상의 끝의 끝 같다던 원주 집에서 혼자 고양이 몇 마리와 정 붙이고 사셨다.
 
아침이면 텃밭에 엎드려 밭을 일궈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어 스스로 입에 들어갈 것들을 구했다.선생은 욕심을 다 비운 뒤 소박한 삶에 자족하며 살았다.
 
선생은 견문이 두루 넓고 아는 것도 많았지만 그걸 빌려 남을 누르는 법이 없으셨고,필요한 곳에 적당한 만큼만 쓰셨다.

어제 마침 선생의 영결식이 치러졌다.나는 종일 침울하고 숙연했다.선생은 죽음을 맞기 전에 이미 다가온 죽음을 예감하셨던가.
 
얼마 전 한 문예지에 유언 같은 종시(終詩)를 남기셨다.
그 시의 끝부분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이승의 세월이 그렇게 모질었던가! 선생은 돌아갈 날들을 눈앞에 두고 편안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거푸 뱉으셨다.
 
통영의 양지바른 묘역에 머리 뉘고 쉴 영원한 집을 마련하신 박경리 선생님! 모진 세월은 다 흘려보내셨으니,이제 뜬세상의 무거운 짐도 내려놓고 부디 편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