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산별노조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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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산별노조 댓글 0건 조회 849회 작성일 08-05-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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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가 19일 규제개혁 세부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기본적 방향으로 ‘수요자 중심, 질 중심’으로 ‘국민이 편리하게, 시장이 선택하게, 국제기준에 맞는 규제개혁’을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구직자의 산별노조 가입 허용과 노동법상의 형벌을 과태료로 전환하겠다는 정책이 눈에 띈다.

구직자의 산별노조 가입 허용은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에는 구직중인 자도 포함한다는 대법원의 2004년 판결을 반영한 것일 터이니 불가피한 면이 있다. 산별노조는 금속노조·운수노조와 같이 일정 범위의 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가 가입해 조직하는 노조로서, 사업장별로 조직되는 기업별 노조와 대비된다. 산별노조는 사용자와 스스로 교섭할 권리도 있다.

실업자나 해고 근로자의 산별노조 가입이 허용되면 산별노조가 엄청난 힘을 얻게 되고, 노동운동의 정치화가 가속화해 산업 평화에 중대한 위협이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대체로 산별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데, 독일식 모델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전투성을 보이는 우리 노동계의 현실을 볼 때 파업 만능주의와 전투적 조합주의가 지배하는 프랑스형 산별 체제가 될 가능성이 짙다.

이미 그런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파업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은 금속노조와 같은 산별노조다. 2004년 462건의 노사분규 중 산별노조에서 일어난 것이 절반을 넘는다. 근로조건 개선이라는 고유의 목적을 벗어난 정치적 파업도 주로 산별노조에 의해 발생했다. 민주노총이 강령에 ‘산별노조를 결성하여 노조운동을 통일’하고, ‘정치세력화를 이루자’는 목표를 명시하면서 종전의 기업별 노조를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산별노조 체제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산별노조를 선호했지만 근래에는 산별 체제가 쇠퇴하고 있다. 세계화의 영향이다. 기동성이 떨어지는 거대한 산별 체제보다는 기업별로 지불 능력과 생산성의 변화가 서로 다른 상태에서 개별 기업별로 교섭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직자의 산별노조 가입을 허용하더라도 산별노조가 강화되는 현상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기업별 노조가 산별노조의 단체협약보다 불리한 내용으로 교섭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산별노조의 우위 체계를 무너뜨린 프랑스의 최근 입법례를 검토해볼 만하다.

노동법상의 형벌을 과태료로 바꾸겠다는 방침은 문제가 적지 않다. 지난 10년 동안 공권력은 근로자에게 동정적인 나머지 불법 노사분규에도 지나치게 관대했다. 그 결과 국가경쟁력의 노사 분야는 단연 꼴찌를 지켜왔다. 이를 면하는 길은 불법 노사분규에 대해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형벌의 과태료 전환은 이런 방향과 배치된다. 게다가 형벌을 과태료로 바꾸는 것은 사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다. 그 액수가 억대를 넘나들지 않는 이상 ‘자본가’인 사용자는 벌금이든 과태료든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과태료로는 사측의 노동법 위반을 억제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외쳤다. 백번 옳은 방향이지만 노동계로서는 ‘기업인’ 친화적이라는 의구심을 가질 여지도 있다. 실제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던 한국노총이 새 정부의 노동정책에 섭섭함을 표시했고, 민주노총은 파업을 벼르기도 했다. 그런 만큼 노동정책이 노사 어느 한 곳에 편중된다는 오해를 사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노동부의 규제 개혁은 엄정한 법 집행을 통해 노사가 합법의 울타리에서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여건을 조성하는 데 중점을 두는 방향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