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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정말 ‘태어나선 안 될 나라’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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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한민국 댓글 0건 조회 2,515회 작성일 21-02-21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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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  대한민국은 정말 ‘태어나선 안 될 나라’였나



김순덕 대기자 

입력 2020-08-15 14:00수정 2020-08-15 14:00



 
 
“이승만 대통령을 우리의 국부(國父)다, 하는 부분에 대해선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의 국부는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되는 것이 더 마땅했다고 생각하고 그런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한 달 전 인사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국부가 누구냐고 아무도 안 물었다. “이승만 정권은 괴뢰정권인가.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건국 대통령이라는 데 동의하느냐”고 박진 미래통합당 의원이 물었을 뿐이다.


광복 75주년을 맞은 2020년 8월 15일.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통일부 장관이 초대 대통령을 건국 대통령으로도, 국부로도 인정하지 않는 사실은 기록해둘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586운동권에 포획돼 있고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전대협 1기 의장 출신이다. 그의 역사의식은 곧 이 정부의 집단 역사의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 누군들 백범 김구를 존경하지 않으랴


백범 김구를 존경하지 않는 한국인은 단언컨대, 없다. 요즘 찐 대세남으로 뜬 영탁 정동원이 TV ‘대한외국인’ 퀴즈 대결에서 백범의 ‘나의 소원’에 나오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ㅇ ㄹ ㄷ ㅇ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에서 ‘아름다운’을 맞히고는, “민족의 혼을 잊으면 안 된다”고 기염을 토했을 정도다.



하지만 백범이 국부여야 마땅하다는 건 다른 얘기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차원을 넘어,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로 친다는 역사관이 배어난다. 이인영이 1987년 전대협 의장 때 읽기만 했다는 ‘동지여 전진! 동지여 투쟁!’ 격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삼팔선 이남을 점령군으로 진주해온 양키 침략자. 이남의 이승만 괴뢰정권을 내세워 민족해방 투쟁의 깃발을 갈가리 찢고자 책동했다.”



1980년대 NL(민족해방)이나 주사파의 낡은 이념일 뿐이라면, 나도 속 편하겠다. 그러나 이인영은 “(이승만) 괴뢰정권이라고 단정하는 것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이견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좌파진영에선 지금도 이승만 정부를 정통성 없는 괴뢰정권으로 본다는 점을 사실상 시인한 것이다.



● 좌파의 역사인식 공유한 문 대통령


대한민국을 태어나선 안 될 나라처럼 보는 시각은 문 대통령의 올해 제주4·3 희생자 추념식 연설에도 배어난다. “제주는 해방을 넘어 진정한 독립을 꿈꿨고, 분단을 넘어 평화와 통일을 열망했다”며 “그러나 누구보다 먼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제주는 처참한 죽음과 마주했다”고 했다. 단독선거 저지와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운 남로당의 무장폭동(2020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백범이 통일정부를 지지했다고 믿는 세력은 1947년 12월까지만 해도 이승만과 함께 단독정부를 지지했다는 사실도 아는지 의문이다. 해방 후 대세는 좌경화였다며 미군만 아니면 한국은 공산주의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등장한다(실은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어쩌면 문 대통령도 ‘제주의 꿈’이 남조선 전체의 희망이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강만길이 “1946년 미군정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 지향 세력이 70%”라고 한 것도 1994년 ‘고쳐 쓴 한국현대사’ 때 얘기다. 2018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의 연구를 보면, 미군정은 1946년 7번이나 여론조사를 했고 민심은 북한식 공산주의 아닌 미국식 민주주의를 선호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 해방 직후 한국은 민주주의 남한정부를 원했다



신탁통치를 하자는 미소공위가 실패로 돌아간 1946년 5월 미군정은 “현재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묻는 여론조사를 했다. “남한정부를 세우는 것”이라는 응답이 54%나 됐다는 사실은 눈물나게 감동적이다(미군정 계속은 43.8%). 많은 사람들이 소련과의 협상이 현실적으로 어렵고, 따라서 남한만이라도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감행한 3월, 대지주 소유 토지 처리 방법을 묻는 조사에서도 민심은 66.3%가 경작자에게 분배하되 유상분배(72.9%)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가 한국사람 복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가를 묻는 조사 역시 이승만(30%), 김구(20%)와 안재홍, 김규식, 조만식 등 우익이 70%로 압도적이었다.


그럼 ‘사회주의 선호 70%, 자본주의 13%, 공산주의 10%’라는 조사 결과는 뭐냐고? 박명수는 해방 정국에선 좌익과 우익이 사회주의를 다른 의미로 썼다고 설명한다. 좌익은 공산주의에 이르기 전(前) 단계를 사회주의라고 했고, 우익은 사회민주주의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썼다는 거다. 즉 한국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우파의 대의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경제적으론 중도적 성향이라는 분석이다(그래서 제헌 헌법에도 사민주의적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 공산당과 합작은 불가능… 정치인 김구는 실패했다



백범의 핵심 노선이 주한미군 철수와 자주적 통일이라는 점에서 현 집권세력이 백범을 숭앙하는 것도 당연하다. 국제적 인식이 부족했고, 국제노선을 따르더라도 중국을 우선시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상주의에 치우쳐 현실감각은 물론 정치능력이 부족한 점 역시 집권세력과 비슷하다는 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백범은 1948년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에서 성과가 없으면 차라리 38선에서 배를 갈르리라”라는 비장한 성명을 발표하고 북행을 결행했으나, 공산주의 소련과 김일성을 이길 수 없었다. 미국과 소련 군대가 철군해도 전쟁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6·25전쟁 발발 전에 암살당함으로써 오늘날 통일운동과 민족주의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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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광복 75주년!



문재인 정부가 정녕 백범을 배우겠다면, 독재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라고 지적한 백범일지를 다시 봤으면 한다. 임정 시절 “공산주의자들과는 아무것도 더불어 함께할 수 없다”던 백범도 권력의지는 버리지 못해 북행을 결행했고, 정치인으로서 실패했다.


덕분에(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1948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건국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오늘은 자랑스러운 광복 75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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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해방된 한국에서 이승만의 존재는 설화적인 권위에서나, 국제정치에 대한 통찰력에서나, 대중선동력에서나, 그리고 이른바 정치술수에서나, 그야말로 족탈불급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1946년 들어 군정청 공보부가 주기적으로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공보부는 3월 16일에서 21일까지와 22일에서 29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서 각 정당 및 인물에 대한 지지도를 조사했다. 1차조사에서는 1,908명이, 2차조사에서는 2,269명이 질문에 응했는데, “다음의 인물 가운데 누가 한국인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가장 열심히 일하겠는가?”라는 질문에 1차조사에서는 이승만 32%, 김구 22%, 김규식 9%, 여운형 13%, 박헌영 10%, 김일성 3%였고, 2차조사에서는 이승만 30%, 김구 20%, 김규식 8%, 여운형 15%, 박헌영 11%, 김일성 2%로 나타났다.18)
 


  歸國하는 굿펠로는 南韓單獨政府 수립 주장
 

  1월초에 한국에 와서 하지 장군의 정치고문으로서 민주의원 창설에 산파역을 했던 굿펠로 대령은 5월 24일에 귀국했다.
 

  굿펠로는 서울을 떠나기에 앞서 외신기자들과 회견했는데, 국내신문에는 AP통신 특파원 로버츠 기자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로버츠는 굿펠로가 “한국인은 능히 자치를 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행정기구를 한국인에게 인도할 시기는 이미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고 썼다. 그리고 미소공위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세인의 이목을 생각하더라도 소련이 한국 통일 임시정부 문제를 교섭하기 위하여 미소공위 재개를 제의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굿펠로는 또 “한국에 총선거가 실시된다면 나의 관측으로는 90%는 민주주의가 차지하고 10%는 공산주의가 차지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고도 썼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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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가 “이승만이 최고의 정치지도자”라고 응답
 


  6월 5일 오전 11시에 이리공업학교에서 열린 환영강연회에는 7만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우리는 오직 자주독립만을 원한다. 이에 3천만은 이 길을 향하야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하고 역설했다.37)
 

  이튿날 오전 9시에 이리를 출발한 이승만은 보리가 익어 가는 김제평야를 거쳐 오전 11시에 군산(群山)에 도착했다. 군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군산부민, 옥구(沃溝)군민 등 20여만명의 군중이 모였다. 김제 만경평야를 본 소감으로 연설을 시작한 이승만은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정신을 가지고 나아가자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공산 극렬분자에 대해서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손을 잡고 말리기 바란다. 미소회담을 기대했으나 소련의 고집으로 무기휴회가 되었다. 우리는 냉정히 참고 참되 끝이 아니 날 때에는 내가 명령을 내릴 터이니, 이때는 죽음으로 독립을 찾아야 한다.”38)
 

  이승만은 이제 “내가 명령을 내릴 터이니…”와 같은 언사를 공공연히 구사함으로써 그의 대중강요형 지도자의 풍모를 자연스럽게 과시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크게 파문을 일으키고 있던 6월 7일과 9일 사이에 군정청 공보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승만의 지지율이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서울 시민 1,049명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실시한 것인데, 좌익정파들의 맹렬한 비난과는 반대로 많은 응답자들이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발언이 정치적 통일에 미치는 영향이 긍정적이겠느냐는 문항에 대해 “그렇다”고 응답한 사람이 58%, “아니다”가 28%, “무응답”이 14%였고, 이승만이 미군정부의 반공식적인 대변인이냐는 문항에 대해 “그렇다”가 24%, “아니다”가 59%, “무응답”이 17%였으며, 이승만의 활동이 정치적 통일에 기여할 것이냐는 문항에 “그렇다”가 46%, “아니다”가 36%, “무응답”이 18%였다. 그리고 이승만이 최고의 정치지도자이다는 문항에 대해서는 무려 69%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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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87. 李承晩의 井邑발언과 민족통일총본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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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 6.7.



[ ......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발언이 정치적 통일에 미치는 영향이 긍정적 ... 58% .......

 ....... 이승만이 최고의 정치지도자이다 .... 무려 6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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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크게 파문을 일으키고 있던 6월 7일과 9일 사이에 군정청 공보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승만의 지지율이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서울 시민 1,049명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실시한 것인데, 좌익정파들의 맹렬한 비난과는 반대로 많은 응답자들이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발언이 정치적 통일에 미치는 영향이 긍정적이겠느냐는 문항에 대해 “그렇다”고 응답한 사람이 58%, “아니다”가 28%, “무응답”이 14%였고, 이승만이 미군정부의 반공식적인 대변인이냐는 문항에 대해 “그렇다”가 24%, “아니다”가 59%, “무응답”이 17%였으며, 이승만의 활동이 정치적 통일에 기여할 것이냐는 문항에 “그렇다”가 46%, “아니다”가 36%, “무응답”이 18%였다. 그리고 이승만이 최고의 정치지도자이다는 문항에 대해서는 무려 69%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39)



 
  獨立促成國民會 전국대표대회에서 회중 휘어잡아
 


  6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열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2차 전국대표대회는 이승만의 지방 순회강연 성과를 반영한 듯 열기에 넘쳤다. 회의는 전국대표 1,163명(道21명, 府16명, 郡116명, 邑面712명, 町294명, 面5명, 島1명)과 내빈 및 방청인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회의 첫날은 6·10만세운동 기념일이어서 특별순서도 마련되었다. 회장 이시영(李始榮)의 개회사에 이어 이승만과 김구와 김규식 세 사람의 훈화가 있을 예정이었으나 모두 사정이 있어서 불참했고, 한국독립당의 안재홍과 신익희(申翼熙)의 축사와 격려사가 있었다.
 

  오후에 속개된 회의는 배은희(裵恩希·전북대표), 김철수(金喆壽·경남대표), 정해준(鄭海駿·전북대표) 세 사람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우리 운동은 정당 정파를 초월한 순수한 국민운동임을 선언함” 등 3개항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틀째 회의에는 이승만과 김구도 참석하여 연설을 했는데, 한 시간에 걸친 이승만의 이날 연설은 그의 대중조작 솜씨를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지방 순회에서 있었던 일부터 화두로 삼았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모인 목적은 오직 독립 회복뿐이라고 믿는다. 내가 두어 차례 남한 각 고을을 다녀보니 무엇보다 우리나라를 살려 놓아야만 하겠다는 것이 민성이었다. 모든 동포들이 나를 반가이 맞아주었고, 어떤 지방에 가니 팔십노인이 수십리 길을 걸어와서 나를 붙들고 반가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묻는 말이 ‘언제나 독립이 되느냐?’고 하기에 나는 그 노인에게 말하기를 ‘언제고 우리가 합해서 뭉치면 독립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일이다. 우리 삼천만이 뭉쳐서 국권을 찾기 위하여 합심합력하고 나가면 국권을 회복하여서 독립을 하게 되나니, 그리되면 우리끼리 돌라앉아서 나라 살림살이를 의논하여 공의대로 해 나가면 잘살 수 있다.

어떤 정당에서는 독립도 되기 전에 토지와 물건을 균배하라는 둥 떠들고 있으나, 지금 우리 것을 우리가 갖지 못하고 외국인의 손에 두고 있는데 어떻게 균배하는가. 먼저 우리는 나라를 찾은 후에 모양과 색채는 그때 결정하자.”
 
 

  “한손을 드는 것을 보니 절반쯤 각오가 드는 모양”


 
  이승만은 이어 자신의 독촉국민회 총재 추대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독립을 속히 해 보겠다고 신탁을 반대하고 이 국민회를 만들어서 얼마 전부터 나에게 총재의 책임을 맡아달라 하니 고마우나, 나는 이것을 경망히 생각할 수 없다. 내가 친히 알고자 하는 것은 이 대표회 석상에서 몇 사람이나 내가 총재 되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이니, 거수하여 표시하시오.”
 

  참석자들은 일제히 손을 들었다.
 
  “만일 이것이 여러분의 원이라면 피하고자 하지도 않고, 통일의 긴요함을 느끼는 만치 내가 마정방종(摩頂放踵·온몸을 바쳐 남을 위해 희생함)할지라도 모든 단체와 협의해서 통일을 이루도록 힘써 볼 터이나, 나는 다만 명의만 가지고 일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내가 허락할 수 없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총재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이승만은 다짐하듯 다시 물었다. 
  “여러분이 내 지휘를 받아서 ‘죽자!’ 하면 다 같이 한 구덩이에 들어가서 같이 죽을 각오가 있소?” 
  그의 이 말에 장내에서는 “예” 하는 대답과 열광적인 박수소리가 함께 울려 나왔다.
 
  “그런 각오가 있는 사람은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이승만은 회중을 완전히 그의 손안에 휘어잡고 있었다. 회중은 일제히 손을 들었다.
 

  “한손을 드는 것을 보니 한 절반쯤 각오가 드는 모양이야.” 
  이 말에 회중은 웃으면서 모두 두 손을 들었다. 
  “옳지. 전심전력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겠단 말이지.”
 

  그는 만족한 얼굴이었다. 장내는 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흥분한 대표 가운데에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극적 제스처로 독촉국민회의 총재직 취임을 수락한 이승만은 엄숙하게 말했다.
 

  “통일을 속성하려면 각 정당과 사회단체를 통괄하는 총본부를 설치하여 전 민족이 동일한 보조를 취해야만 될 터이니, 이를 위하야 사지(死地)라도 피하지 않고 복종할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알고자 하오.” 
  회중은 일제히 다시 손을 들었다.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과의 유대를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구 주석과 김규식 박사와는 절대로 협의적으로 진행하는 중이니 우리 세 사람의 합동에 대하야는 걱정하지 말고, 다만 각 지방에서도 우리와 같이 협동하야 진행하면 될 것이다.”
 


  이승만은 끝으로 통일을 방해하는 자들을 단호히 척결할 맹약을 요구했다. 

  “만일 이와 같이 통일을 이루어 놓은 뒤에 임원 중에서나 혹 중요 인도자 중에서 통일을 방해하는 이가 있으면 나는 이것을 즉시 파면할 것이나, 또 무슨 사회단체나 정당이 새로 생겨서 민족통일을 방해한다면 이것은 어떠한 방법으로 조처할 것인가?”
 
  참석자들은 일제히 손을 들면서 “우리가 진압하고, 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외쳤다. 
  이승만은 흡족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가 맹약하는 것이니 절대로 준행해야만 될 것이오.”
 
 


  “뭉치면 李博士 하나요 나누어 놓으면 三千萬…”
 

  이승만이 자리에 돌아와 앉자 부총재로 추대된 김구가 등단했다.
 

  “여러분들이 독립을 찾아보겠다고 교통도 불편한 이때에 불원천리하고 이렇게 모였으니 우리나라는 여러분들의 그 열렬한 애국심의 결정으로 독립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결심하여야 할 것은 해방은 연합군의 힘으로 되었으나 독립은 우리 힘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이란 거저 헐값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독립을 하려면 먼저 우리 민족이 뭉쳐야 한다. 어떻게 뭉치느냐 하면 이 박사를 중심으로 뭉치자. 그래서 뭉치면 이 박사 하나요 나누어 놓으면 삼천만이 되도록 하자.”
 

  김구의 말이 여기에 이르자 장내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일었다. 김구는 이처럼 자신이 제2인자임을 공식으로 천명한 것이다. 김구는 긴 박수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박사와 김 박사와 나 세 사람은 단결해 있다. 여러분이 우리 세 사람을 총재, 부총재로 있게 하는 한 우리 세 사람은 퇴축(退縮)하지 않고 여러분과 같이 운동할 것을 굳게 맹세한다. 삼각산이 무너지면 무너졌지 우리 세 사람의 단결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들은 안심하고 우리 세 사람과 같이 단결하여 가지고 삼천만인이 한덩어리가 되어 독립을 찾아서 우리도 남과 같이 한번 살아보자.”40)


  회의는 정식으로 이승만을 총재, 김구와 김규식을 부총재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다시 등단하여 “여러분이 열렬한 정신으로 이 자리에서 독립운동 총사령부를 설치하면 나는 낡아진 목숨을 바쳐 여러분과 함께 이 총사령부 제1선에서 독립운동을 하겠다” 하고 열변을 토했다.41)
 

  오후 2시에 속개한 회의는 “1. 미소공위가 최단기간 내에 속개되지 않고 이대로 천연될 때에는 3천만의 총의로 통일정권 수립을 촉진할 것을 결의함” 등 3개항의 <결의문>과 <연합국과 미소공위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고 폐회했다.42)
 
 

  3. 右翼勢力 중심체로 民族統一總本部 설치
 

  이승만은 독촉국민회 제2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하여 우익 그룹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의 일을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G-2)는 이승만의 ‘작은 쿠데타(minor coup d’etat)가 성공했다고 평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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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87. 李承晩의 井邑발언과 민족통일총본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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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해방 직후 한국인들 우파 지도자 지지”




  2018-04-01

 
 
  박명수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이 30일 국민일보 빌딩에서 해방 이후 한국인의 정치 성향을 연구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 


“해방 직후 한국인은 정치적으로는 우파 지도자와 서구식 대의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구조를 지지했습니다.”



박명수(64)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30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해방 정국 당시 한국인의 정치 성향 및 경제관을 이렇게 정의했다. 박 소장은 “지금껏 한국사회는 해방 정국에서 중도나 좌익이 우세했다는 주장과 1948년 민주주의 정부가 탄생했다는 역사적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다”며 “이 같은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미군정 여론조사 자료를 연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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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군정이 1946년 3∼7월 진행한 비정기 여론조사 결과에서 줄곧 ‘북한과 같은 토지개혁을 원하지 않지만 기업은 국유화를 원한다’는 응답이 높은 것에 주목했다. 토지는 유상분배를 원하나 일본인 소유 기업은 정부가 관리해야 한다는 중도적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서울 지역 1908명을 대상으로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김구, 이승만 등 우익 정치인의 지지도(70%)가 박헌영, 여운형 등 좌익 정치인(30%)보다 높다는 점을 의미 있게 해석했다.


종합해 볼 때 해방 이후 한국인의 정치 성향은 우익에 기울었으되 경제관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일정 부분 타협한 사회민주주의 경향을 보인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그는 “미군정이 우익 성향이라 여론조사 결과도 우익 우세라 보는 이들도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며 “미군정은 중도 인물을 원했기에 오히려 우익 성향 답변이 다수면 46년 3월처럼 여론조사를 다시 실시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군정의 여론조사 방식은 무작위 대면 조사를 한 것으로 오늘날 기준에서 봐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 28일 경기도 부천 서울신대에서 열린 ‘제22회 영익기념강좌’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다. 박 소장은 “해방정국 민심을 읽는 일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며 “이 연구가 대한민국의 출발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http://www.kukminusa.com/news/view.php?gisa_id=0923925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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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정의 여론조사에 나타난
한국인의 사회인식* **

박명수
(서울신학대학교)

韓國政治外交史論叢 40집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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