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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암 이병헌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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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송 댓글 0건 조회 1,798회 작성일 09-12-1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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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암 이병헌 선생의 친일에 대한 반론

☞ 경남 함양군 출신의 한국 근대 유학자 진암 이병헌(1870~1940)선생에 대해 2006년 6월 21일 부산에 거주하는 이영래씨(민족 문제 연구소 부산지소 회원)가 친일파로 지목하여 함양군에서 역사 인물공원에 세운 선생의 흉상을 철거하라는 건의에 대해

   본인(이용호)은 후손의 한사람으로서 심히 우려하여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다음과 같이 글을 올립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영래 씨가 친일파로 매도하는 증거로 서울대학교 교수 금장태 박사가 유교개혁과 이병헌 이라는 표제로 저술한 내용중(P58~P63). 당시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있던 김구 선생이 친일 거두라며 밀고가 들어왔다며 선생을 감금하여(1920.4.1~4.9일(음))심문한 내용을 앞․뒤 내용은 무시하고 당시 독립 신문에 보도된(5월27일(양)) 내용만을 사실인양 오도하여 함양군에 진정한 내용임.

   이에 선생에 대한 친일관련 지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볼수 있겠습니다.

   1. 이병헌 이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에 여러 차례 청원서      를 제출하였던 사실

  2. 당시 친일 유교단체인 대동사문회 와 교류하였다는 사실

  3. 친일 인사로 의심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서 감금되어      심문을 받았던 사실

     첫째,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에 여러 차례 청원서를 제출    하였던 사실에 대한 바로잡음.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식민 정책을 조선의 사회적, 문화적 기반인 유교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1917년 종교 령으로 유교를 종교단체에서 제외 시켰으며 향교 재산 관리규정으로 향교 재산관리를 행정기관에 귀속시키고 공동묘지 관리규칙으로 씨족 중심의 전통적 묘지제도를 부락 중심으로 변혁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선생은 조선인의 정신적 기반인 유교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평생토록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에 청원서를 거듭 제출함으로써 일제의 통제 정책에 상반하여 유교의 종교적 자율성을 확보하고 전통제도의 유지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청원서 제출에 대해 총독부와 내각을 끼고 활동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매우 악의적 적대감이 아닌지 의심이 됩니다.

   또한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총독부 정부나 대관이라 일컬은 사실에 대해 조선 2천만의 공동의 적을 인정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당시 국내에 살면서 식민정부와 교섭하여 활동하던 사람으로서는 불가피한 호칭이었음을 외면하고 무리한 원칙론을 강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선생이 일제의 총독부나 일본내각에 청원한 것은 오직 유교 전통의 확보를 위한 노력이었지 일본의 식민통치 정책에 영합하는 활동이 아니었으며 친일이라는 규정은 어불성설이다.

   둘째, 당시 친일유교단체인 대동사문회와 교류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바로잡음.

   선생은 1920년 1월 중국방문길에 서울에서 머무를 때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정만조(1859~1936, 경학원대제학 명륜학원 총재 역임)가 찾아와 1919년 11월에 조직한 대동사문회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대동사문회를 조직하여 유교 개혁운동을 표방하였으나 그 방법과 목표에서 선생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대동사문회는 정만조를 비롯하여 어윤적, 이범철, 최승년, 박로학, 송지산 등이 간부로 있었으며 총독부의 동화정책에 협조하는 친일 유림 조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선생은 대동사문회 조직목적이 사문(유교)을 지키는 것임을 인정하여 대동사문회를 방문도 하였으나.

   그 간부들과 유교 개혁의 일을 논의하면서 그들이 속된 학문에 빠져있어서 일을 같이할 수 없음을 탄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유교 개혁의 일념으로 이번 중국방문에 곡부의 대성전에 있는 공자의 진상을 모사 해오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정만조 에게도 공자의 진상을 회당에 봉안하고 경전을 구해서 국내의 명사들과 연구 할 것을 제안하여 대동사문회 간부들이 연명한 공문을 받아 유교 개혁에 참여할 수 있게 연성공부와 강유위 에게 공문을 전달해 주는 정도였으며 대동사문회 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셋째, 친일 인사로 의심받아 상해임시 정부에서 감금되어 심문을 받았던 사실에 대한 바로잡음.

   1920년 3월 선생이 3번째 중국 방문 중 상해에서 평소 친교가 깊은 박은식(임정 2대대통령)을 비롯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시영, 김일두, 김창숙 등을 만나보고난 몇 일후 선생은 일본 비밀 탐정원으로 왔다는 오해를 받아 당시 임시정부 경무국장인 김구 선생에 의해 9일(4월 1일~4월 9일(음))동안 감금된 상태에서 엄중한 심문을 받았던 일이 있습니다.

   4월 1일 김창숙 을 만나본후 다른 분을 만나러 길을 걸을 때 10여명의 청년들에 의해 연행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내용인즉 당신이 일본을 위하여 정탐을 하러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사실대로 말하라며 윽박질러.

   선생이 이치에 근거해서 소명코자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비록 폭행은 없다 하드라도 핍박하는 것이 흡사 전일 국내에서 악곤배들이 산촌의 죄 없는 백성들을 다루는 것 같다고 김구 선생에게 한말이 과장되어 독립신문에는 앞․뒤 내용은 무시하고 조선의 독립 운동가를 불량선인 강도 배라 하였다고 보도된 내용임.

   4월 2일 김구 선생은 소지하고 있던 일기를 비롯한 저술(유교복원론)『연성공부와 강유위에게』, 총독부와 일본내각에 보낸 대선근본정책 전재유교론 등 문건을 살펴보고는 대선근본정책 전재유교론에서 문․답 식으로 기술된 내용 중

  ������문������이번소요(3.1독립운동)이후 묘당 방침은 그 근본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내용 중 3.1운동을 소요라 표현된 글을 보고는 처음에는 대노하여 험악한 말들도 오고 갔으나

   내용과 설명을 듣고는 유교가 독립운동에 장애물이된즉 이를 버려야 하나 선생의 논하는 바는 이치가 있는 것 같아 당국에서 재삼 헤아려보고 있다고 하여 이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소요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우리의 고장인 함양에서도 3월 12일 장날을 기회로 평소 같은 면에 거주 하면서 잘 알고 지내던 친구인 참봉 김한익 씨가 주동이 되어 봉기를 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주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당한 분들이 같은 면에 거주하면서 잘 알고 지내던 분들이었다.

   선생은 1918년 12월 모친상을 당하여 상주로서 두문불출 하며 지내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만세운동에 동참하지 못함을 탄식하며 이에 선생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총독부와 일본정부에 우리2,000만 동포를 폭압과 억압으로만 다스릴 것이 아니라 평생의 소망인 유교의 복원에 의한 지성의 근본사상으로 정성을 다해 대동사회로 이뤄 일본의 대향교정책과 교육정책 등을 론하고 옳은 방향을 제시하는 자문, 자답 식으로 작성된 일종의 진정서라 할 수 있다.

   4월 3일 김구 선생이 수하 사람을 시켜 거쳐할 여관을 정해주면서 법계(불란서조계지역)를 벗어나지 않도록 당부하며 배려해 주기 시작하였다

   4월 4일에는 김구 선생과 함께 대세계극장을 구경하고 돌아오기도 하였으며

   4월 7일 에는 유모가 찾아와서 행이를 챙겨 영. 계 동안리 여관(연행되기 전 거처한 숙소) 으로 옮겨가기를 청하였다

   4월 9일 유모가 다시 찾아와 언제든지 편리한 날짜에 떠나셔도 좋다는 김구 선생의 말을 전해 주었다

   이로서 모든 오해가 해소되어 푸려나게 된 이후 김구 선생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사실을 아래에 기술한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배산 서당(공자교한국지부) 을 건립하여 문묘를 모실 공자 진상을 모사해 오기위해 1923년 4차 중국방문길에 올라 곡부 대성전에 모셔있는 공자 진상을 사진으로 촬영한 것을 김구 선생이 당시 중국의 유명한 화공을 시켜 서양기법으로 그려 주었으며.

   임시정부 용인들인 박은식, 이시영, 조완구, 김구 선생 등은 선생이 건립한 배산 서당 낙성식에 축사를 지어 주기도 하였다.

   선생이 공자 진상을 모사하여 귀국할 때는 김구, 조완구, 이시영 선생 등 수십 명의 임정요인들을 대동하고 포동항 부두까지 나와 배에 오르는 선생을 전송해 주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때 한때 친일인사로 의심을 받았지만 그의 행적에 임시정부에 의해 친일인사가 아님을 확인받은 것과 동시에 임시정부로부터 각별한 예우를 받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다음은 1962년 9월 3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김구 선생이 선생에게 보낸 서한을 소개해 본다.

   《이서한은 연금에서 풀려난 2개월 후인 6월 21일(음)자 서한내용임》

   片紙(편지)를 仰讀(앙독)하고 많히 感謝(감사)하였습니다.

   이와 갖치酷熱(혹열)한 地帶(지대)를 免(면)하시고 靑海上(청해상) 納凉臺(납양대)에 日日(일일) 中華(중화)의 文聲(문성)을 더부러 道理(도리)를 談討(담토)하심은 欽荑不己(흠이불기)하나이다

   兼(겸)히 先生(선생)님을보내고도 於心未安(어심미안)한것은 行資(행자)【노자돈】가 不足(부족)하심일너니 其亦免困(기역면곤)이 되시난 모양이오니 감사하외다.

   生(생)은 省事依安而兒母俱病(성사의안이아모구병)에 依然(의연) 苦悶過去(고민과거)하오니 苦海(고해)에 眞情(진정)을 맛보나이다.

   先生(선생) 今行(금행)은 將來(장래)에 國家獨立(국가독립)에 元氣(원기)를 養(양)하며 文化發展(문화발전)에 羅盤(라반)을 備(비)함과 如(여)히 肝要(간요)한 中(중)에 各宗敎(각종교)의 向背(향배)는 大略(대락) 定向(정향)이 有(유)하나 至於儒敎(지어유교)하야는 我東(아동)에 祖敎(조교)어날 先生(선생)이 아니엿스면 大不幸(대불행)을 致(치)할번 하엿나이다

   今日(금일) 東亞報(동아보)를 見(견)한즉 所謂(소위) 日當局(일당국)이 孔子廟(공자묘)의 私設(사설)을 絶對不許(절대불허)한다난 理由(이유)난 經學院(경학원)에서만 할일이라고 하였습니다.

   先生(선생)님 經營(경영)하시난 事業(사업)에난 妨害(방해)를 아니하겠난 지요

   恭諒(공양)하시옵소서 宅信一度(택신일도)를 同封(동봉)하오니 보시고 舊衣貽過(구의이과) 如敎實施(여교실시)하나이다.

   萬事(만사)를 잘造成(조성)하여 수히 回駕(회가)하시옵소서

   餘祝道體萬安(여축도체만안) 不備(불비)

   生(생) 金九(김구)   六月(6월) 二十一日(21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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