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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모와 정수장학회 이것이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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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궁화 댓글 0건 조회 1,226회 작성일 16-11-22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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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모와 정수장학회 이것이 문제야

2012년 2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정수장학회는 박정희가 권력을 이용해서 강압으로 재산이 넘어간 사실은 인정했지만, 시효가 지나 반환 청구는 할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면 정수장학회는 국가에서 인수해서 정상적으로 관리를 해야한다
그리고 장학회의 설립취지는 당초 설립자인 김지태의 유지를 받들어야지
강탈자의 수하들과 그추종자들이 관리를 하면서
강탈자를 추모하는 장학회로 운영되고 있는것이 정상적인 나라인가?
 
이직도 이런 비정상적인 일이 지속되고 있으니까
그 추종자들은 독재자 박정희를 어린학생들에게 더욱 추앙 받게만들고 있고,
더 나아가 칠푼이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되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것이다
 
부정축재를 용인하고서는 정상적인 나라가 될 수가 없다
 
이번 최순실사건을 계기로 무었보다도
정수장학회의 관리방안부터 바로 잡아야 할것이다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이것을 그냥 두어서는 아니될것이다
 

▶ 정수장학회[正修獎學會]
 
부산지역 기업인으로 2~3대 민의원을 지낸 고(故) 김지태(1908~1982) 씨는 1962년 외환관리법, 부정축재처리법 위반 등으로 구속 기소되어 재판을 받다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 주식 100%와 방송 주식 65.5%, 토지 33만 여m2(약 10만 평)를 국가에 강제 기부당했는데, 정수장학회는 이 재산을 기반으로 설립된 단체이다.김지태 씨는 1958년 부일장학회라는 단체를 설립하였으며, 설립 이후 4년 동안 1만여 명에게 17억여 만환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한 이후, 이 단체는 5ㆍ16장학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1982년 박정희 대통령의 '정(正)'과 육영수 여사의 '수(修)'를 따 정수장학회로 명명되었다. 이와 관련, 부일장학회의 소유권이 김 씨로부터 국가에 이전된 과정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어 왔다.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꾼 뒤, 이 단체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표를 비롯한 박 대통령의 측근들이 관리해 왔다. 초대 이사장인 이관구 전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시작으로 엄민영 전 내무부 장관, 박 전 대통령의 친구인 최석채 전 MBC 이사가 뒤를 이었다. 박근혜 대표는 1995년 이사장직에 올랐으며 2005년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뒤 최필립 전 리비아 대사가 후임에 올랐다.

정수장학회의 정관에 따르면 이사장은 이사들의 호선으로 선출하며, 이사회 의결안은 과반 이상의 이사가 찬성해야 통과된다. 이사진의 임기는 4년이며, 연임 제한이 없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무제한 중임이 가능하다. 

한편 정수장학회 재산은 언론사 지분으로 MBC 문화방송 지분 30%(6만 주), 부산일보 지분 100%(20만 주), 부동산 자산으로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부지 2384m2가 대표적이며, 150억 원 정도로 추산된다. 또한 200억여 원의 예금 자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2년 5ㆍ16장학회 설립 이후 50년간 정수장학회가 배출한 장학생은 3만 8000여 명에 이르며, 장학금을 받은 학생 중 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1966년부터 정수장학범동창회 상청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상청회 회원들은 학계와 정치, 경제, 법조계 등 사회 전 영역에 포진해 있다. 또한 일부 교수는 지역별로 나뉘어 정수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의 모임인 청오회(1966년 설립)를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정수장학회 관련 논란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의 소유권이 김지태 씨로부터 국가에 이전된 과정에 대해 논란이 계속되어 왔다. 김 씨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요구한 혁명자금을 거부해 1962년 3월 재산 해외도피 혐의 등으로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고, 2개월 여간 구금생활을 하다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MBC, 부산MBC의 운영권 포기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이와 관련 새누리당 측은 이를 헌납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김 씨의 유족들과 시민사회단체는 강탈로 보고 있다. 이 외에도 박근혜 현 새누리당 대표는 1995년 이사장직에 오른 이후 10년간 장학회 이사장직을 유지하며 2억여만 원을 수령했는데, 급여 이외에 과다하게 지급된 섭외비, 상근직 수행 여부 등이 논란이 된 바 있다.

정수장학회 관련 논란은 2004년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이 진상조사단을 꾸려 사회 환원을 요구한 후 이해찬 국무총리가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공언하면서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위원회의 부일장학회 강제헌납 사건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지시로 김 씨를 수사했다는 사실과 구속 상태에서 강압에 의해 작성된 기부승낙서에 서명을 한 사실 등을 밝혀냈다. 

이어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6월, 국가가 공권력의 강요로 발생한 재산권 침해에 대해 사과하고 명예회복 및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으며, 이에 김 씨의 유족이 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당시 정수장학회의 재산 환수나 환원 조치는 없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7부는 2012년 2월, 부일장학회(현 정수장학회) 설립자인 김 씨의 유족 등 6명이 장학회 설립 과정에서 강제로 기부된 아버지의 주식을 돌려 달라며 정수장학회와 국가를 상대로 주식양도 등 청구소송 1심 선고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강압으로 재산이 넘어간 사실은 인정했지만,
시효가 지나 반환 청구는 할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 영남대학

1947년 9월에 대구대학(大邱大學)이 설립되었고, 1950년 4월에는 청구대학(靑丘大學)이 설립되었다. 그 뒤 1967년 12월에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합병, 당시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를 설립자로 하여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발족되었다


▶ 영남대학 설립 논란 

이병철회장의 장남 이명희씨는
1993년 출판한 자신의 회상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이병철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싫어했다고 밝히면서 대구대학등을 강제로 빼앗긴 사실을 언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맹희씨는 이 책 222페이지에서 '70년대 초반, 삼성은 대구의 대구대학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락씨가 어느날 대구대학을 정부에 넘기라고 요구를 해왔다'고 밝혔다. 

이씨는 이때 '아마 대구에 대학을 하나 만들어서 박대통령이 은퇴 후 그곳의 총장으로 취임한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 같다'고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이씨는 '지금 상식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만 그대로 헌납할 수 밖에 없었다'며 대구대학을 억울하게 박대통령에게 빼았겼음을 분명히 했다. 

이씨는 또 '그들은 그 후 당시의 청구대학이 부실 공사건으로 걸려들자 그걸 빌미로 청구대학도 차지했다, 오늘날 영남대학교는 그 두 대학을 합쳐서 설립된 것이다'라며 '그들은 권력으로 대구대학을 차지하고 상대의 약점을 빌미로 청구대학을 차지한 다음 둘을 합쳐서 영남대학교를 만들었다'며 영남대학교 탄생배경을 상세히 밝혔다

 

▶ 청구대학 

당시 경북청년총연맹위원장이었던 최해청(崔海淸)이 독립의 길은 배움에 있다고 생각하여 1948년 1월부터 대중강좌를 개최한 것이 계기가 되어, 40여 명의 동지가 뜻을 모아 대구야간대학(大邱夜間大學) 기성회를 조직하고 장인환(張仁煥)을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같은 해 9월 대구문리과전문학원으로 인가를 받고 법학과·문학과·이과 180명의 학생을 모집, 같은 해 11월 종로 임시교사에서 개교하였으며 초대원장에 최해청이 취임하였다. 1950년 3월 포정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4월에 청구대학으로 개편하여 이사장에 정종수(鄭宗壽), 학장에 최해청이 취임하였다. 

1953년 주간부의 설치로 주·야간에 각각 문학과·법학과·토목공학과·건축공학과를 두었으며, 학생정원은 1,280명이었다. 같은 해에 제1회 졸업생 49명을 배출하고 1955년문화동으로 이전하였으며, 1960년에는 효목동에 공학관을 준공하였다. 

1961년 대학원을 설치한 데 이어 1962년에 병설실업초급대학, 1963년 병설공업고등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1964년에는 대학본부를 30여만 평의 효목동 교사로 이전하여 대학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독립과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는 전통을 심으며, 학문의 자유로운 발전, 나아가 향토 및 민족과 사회에 대한 유기적 관련을 인식하고 교수·학생간의 정신적 교류 등을 건학의 정신으로 삼았다. 

부설연구소로는 신라·가야문화연구소를 비롯하여 국어연구소·국민소득분석연구소·낙동강수자원개발연구소·수리실험소·건축재료연구소·행정연구소·경영문제연구소 등이 있었다. 

1967년까지 총 14회 3,45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같은 해 12월 대구대학(大邱大學)과 통합되면서 학교법인 영남학원을 설립하여 영남대학교로 개편되었다. →영남대학교
 

▶ 대구대학

1945년 10월 이 학교의 전신인 경북종합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최준(崔浚)이 취임하였다.

광복과 함께 교육 재건의 중요성을 절감한 대구시 유지 20여 명이 민족문화 건설에 주역이 될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대학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1947년 3월 경북종합대학이 가칭 대구문리과대학으로 개교하여 2년제 예과(문과·이과)와 3년제 전문부(법과)를 두었다.

같은 해 9월 재단법인 대구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영문학과·철학과·법학과·정치학과·경제학과·응용화학과로 개강하였으며, 당시의 학생 총 수는 201명이었다.

1948년 9월 초대학장에 조용기(趙龍基)가 취임하고, 교사를 대봉동 대구중학으로 이전하였다. 1950년 4월 초급대학을 부설하고, 이듬해 4월 교사를 포정동 청구대학(靑丘大學) 구내로 이전하였으며, 향교재단과 합류하여 공동 운영하였다.

1952년 부설 초급대학을 폐지하였으며, 같은 해 5월 교사를 남산동 향교 구내로 이전하였다가, 1954년 12월대명동 신축교사로 이전하면서 기구와 시설을 확장하여 발전을 거듭하였다. 

1957년 3월 본관을 준공하고 이듬해 대학원을 설치하였다. 1959년 3월 재단법인 대구대학이 문파교육재단을 통합하여 병설 대구여자학숙의 설립인가를 받아, 4월 문과·상과·가정과·보육과로 개교하였다.

1961년 1월 병설 대구여자학숙을 대구대학과 통합하여 상과·문과·가정과·보육과·회계과를 가진 여자부로 개편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문과·상과·가정과로 된 병설 여자초급대학으로 변경하였다.

1964년 1월 재단법인을 학교법인으로 변경하였으며, 부설 연구소로는 동양문화연구소·기업경영연구소·천연물화학연구소·모직물기술개발연구소 등을 두었다.

‘찬란한 신라·가야 문화의 옛 터전에 선현의 유업을 계승하여 민족문화의 주역을 양성한다’는 건학이념으로, 1967년까지 총 16회에 3,43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67년 12월 학교법인 청구대학과 통합되면서 학교법인 영남학원을 설립하여 영남대학교로 개편되었다. → 영남대학교

 

정수장학회의 모체인 김지태의 부일장학회 헌납과 관련, 강압성이 있었음이 법원에서 인정된 가운데 미국도 김지태의 부산일보와 라디오방송 포기등이 중앙정보부의 강압에 의한 것으로 판단했음을 보여주는 비밀전문이 발견됐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이 1963년 6월 11일 미국무부에 타전한 '부산일보 - 반미의 표출구'란 제목의 전문에서 부산일보의 소유주는 김지태 전 국회의원으로 부정축재와 밀수혐의로 1962년 4월 체포됐다가 석방의 댓가로 부산일보를 포기한뒤 1962년 6월 22일 공소취하로 석방됐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의 이같은 판단은 국정원 진실화해위원회의 2007년 부일장학회 헌납사건진상조사보고서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국정원 진상조사보고서는 1962년 4월 중앙정보부가 김지태를 부정축재처리법위반등의 혐의로 구속한뒤 석방등 신변안전보장을 내세워 재산헌납압력을 행사했고 1962년 6월 20일 부산일보등 언론 3사 주식과 토지 10만여평을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에 헌납한다는 기부승낙서에 서명, 날인한뒤 1962년 6월 22일 공소취하로 석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이 전문에서 1946년 창간된 부산일보는 부산지역에 4만여명의 독자를 가진 신문으로 최근 한국에서 대표적인 반미성향의 신문이라고 밝히고 전 소유주는 김지태 전 국회의원이지만 현재 중앙정보부가 비밀리에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김지태가 석방의 댓가로 부산일보를 포기한뒤 1962년 6월 22일 공소취하로 석방된 것은 물론 라디오방송국또한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황용주에게 넘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전문은 부산에서 잘 알려진 좌익인사중 한명이며 박정희의 비공식 자문역할을 하던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에게 운영권이 넘어가고 1962년 8월 1일 황용주가 부산일보 사장이 됐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황용주는 사장이 된뒤 2천원의 대출을 받아 1963년 4월 한국에서 가장 현대적인 인쇄시설을 도입하고 5층 신축빌딩을 마련했다며 이같은 대규모 투자는 사실상 정부에서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이 전문은 1963년 5월 29일자 전문에서 김종필이 장악했던 중앙정보부의 강압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밝히고 김지태는 라디오방송국[부산mbc를 의미] 또한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황용주에게 넘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전문은 잘 알려진 반미주의자이자 좌익인사인 황용주는 장면정권때 주필을 맡으면서 장면정권에 반대하며 반미주의적인 톤의 사설을 실었다고 설명하고 황용주를 비롯해 좌익으로 의심받던 사람들은 516즈음에 체포됐으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또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개입으로 풀려난뒤 박정희와 김종필의 막후 조언자역할을 맡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또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은 황용주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위험스런 인물이지만 중앙정보부는 그에 대한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미국에 비밀리에 알리고 김용태, 장태화[김종필의 측근들]도 의심스런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부산일보는 황용주의 지시에 의해 반미와 중립주의자적인 기사를 게재하고 있으며 미국과 미국정부의 행동에 대한 공격은 정부매체인 서울신문을 훨씬 능가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사설을 통한 가장 극단적인 미국에 대한 공격은 박정희의 군정연장선언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밝힌 3월 25일자 링컨와이트선언에 대해 3월 27일자 신문 사설을 통해 '내정간섭'이라며 '한국을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한 볼모로 삼는 것은 물론 미국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넘기려고 기도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김지태부산일보헌납은 강압 미국무부비밀전문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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