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켜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국에서 댓글 4건 조회 3,068회 작성일 15-05-12 09:23본문
한국에서 권위주의 정치문화가 생성되게 된 이유로는 무속(巫俗)적 전통(샤머니즘적 신비주의), 신권적 통치의식, 경천경애(敬天敬愛)시상, 가부장적 전통,
남자지배전통, 왕도정치사상, 군주주의의 전통, 관료적 엘리트주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전통, 유교사상에 따른 위계적 사회구조와 계급의식,
제한된 사회적 유동성, 관료적 권위에 대한 탐욕성, 관(官)의 지배와 민(民)의 복종적 전통, 일제의 관료적 식민통치, 자본주의제도의 도입에 따른 금전만능과 배금주의사상 등을 들 수 있다.21)
권위주의 정치문화에서는 관료주의의식, 신분적 계층질서의 존중, 권위에 대한 복종, 상하계층의식과 배타성, 노동 천시, 체면, 공손, 인물에 의한 지배, 억압성과 정치적 무관심, 관존민비(官尊民卑)의식, 관습과 규범에 대한 순종, 지도자의 오만과 자존성, 이념적 단순성, 운명의식, 영웅숭배의식,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복종적 태도 등의 행태를 보인다는 지적이 있다.22)
이러한 지적을 볼 때 권위주의 정치문화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유교적 전통과 정치적 무관심 및 정치적 회의 등에 의해 저항보다는 순종을, 반대보다는 지지의 정치행태를 보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정치문화적 특성 때문에 한국의 지배계층에는 권위주의적 퍼스낼리티가 형성되었는데 반해 피치자층에서는 비판을 꺼리는 무관심의 습벽이 형성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통치관계는 결국 토의 · 교섭 · 설득의 방법 대신에 폭력 또는 다른 형태의 압력에 의존하는 행태를 보이게 되었고, 이러한 행태들로 인해 독재정치의 대두를 용이하게 만드는 정치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23)
결국 한국에서는 권위주의 정치문화라는 특성 때문에 국민들이 현상유지적이고 수동적인 경향이 강해지는 한편,
보수적인 가치에 집착함으로써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아 정치체제 내지는 정치적 현실 등을 그대로 수긍하고 그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성향이 보편화되고 말았다.
더욱이 갈등을 악한 것으로 인정하고 분열과 대립을 회피하려는 경향마저 보임으로써 권위주의체제의 생성과 유지를 허용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와 더불어 권위주의 정치문화는 정당체계의 발전을 저해하고 정당체계의 자연적인 형성보다는 인위적인 형성을 허용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역설적으로 정치체제가 민주적인 성향을 보이고 정치문화가 권위주의적인 특성이 아닌 참여형의 민주적인 정치문화로의 변화를 보이는 시기에는 정당체계의 자연적인 형성 또는 발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댓글목록
알몬드의 정의에 의하면, 정치문화의님의 댓글
알몬드의 정의에 의하면, 정… 작성일
알몬드의 정의에 의하면, 정치문화의 개념은 다음의 3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정치에 대한 인지적 정향(cognitive orientation)으로 그 사회집단의 현실인식과 정치의식 및 정치성향 등이다.
둘째, 감정적 정향(affective orientation)으로 그 집단이 정치에 관해서 갖는 애착심 ·혐오감 ·충성 등이다.
셋째, 평가적 정향(evaluative orientation)으로 이는 그 집단의 가치체계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정치적 정향의 대상을 분류하는 데 있어, 알몬드와 버바는 일반적 정치체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취급되는 대상은 전체로서의 정치체계이며 그 정향에는 애국심이나 소외감 같은 감정, 또는 국가의 대소 강약과 정치체제의 여러 특성(예를 들어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에 대한 인지와 평가가 포함된다.
다른 한편 그들은 정치적 행위자로서 자신(自身)에 대한 정향을 고찰한다. 이것은 개인이 갖는 정치적 의무에 대한 여러 규범의 내용과 성격, 또 정치체계에 대한 개인의 자신감의 내용과 성격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체계의 구성부분을 취급하는 데 있어, 알몬드와 버바는 3가지의 대상을 구별한다. 그것은
① 입법부 ·행정부 ·관료와 같은 특정한 역할과 구조,
② 군주 ·입법자 ·행정가와 같은 역할담당자,
③ 특정한 공공정책과 그 결정, 혹은 그 결정의 집행이다. 이와 같은 구조 ·역할담당자 또는 결정은 다시 그것이 정치과정(혹은 투입과정)에 관여하느냐, 혹은 행정과정(혹은 산출과정)에 관여하느냐에 따라 분류된다.
특정한 사회의 정치문화의 유형을 규명하기 위하여, 즉 정치적 정향에 대한 인민의 분포를 찾기 위하여, 알몬드와 버바는 정치체계일반, 투입과 산출의 측면, 그리고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시민들 각자에 대한 인지적 ·감정적 ·평가적 정향의 상이한 빈도를 기준으로 정치문화의 유형을 분류하였다.
그리하여 이념형으로 제출된 것이 지방형 정치문화 ·신민형(臣民型) 정치문화 ·참여형 정치문화이다.
사실 문제점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하님의 댓글
사실 문제점이 너무 많아서 … 작성일
사실 문제점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하나 꼽을 수가 없네요...
제가 생각할 때 한국 정치의 문제점은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같아요. 통합의 문제와 입법, 행정을 행사하는 국민의 대리인과 국민의 문제죠.
우선, 통합은 좌우 이념갈등과 지역색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겠네요. 어딜가나 이념갈등은 있기 마련인데 이게 보수냐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정쟁으로 갈경우 정말 무의미한 싸움이 돼요. 이러한 갈등을 왜하는지가 중요한데 국가의 발전보다는 정권을 잡기위한 싸움으로만 여겨지는 것이 문제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제인지 모를 지역색이 아직도 만연하다는 거죠.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도 내부갈등이 많은데 너무 의미없이 소모적인 싸움이라 정치에 발전이 없는 것같아요.
두번째로는 주체에 대한 문제인데요. 대리인은 국회의원, 대통령을 비롯한 각료를 말하는데 어디까지나 이 직업은 명예직이라 생각하고 임해야하는데 사익에 대한 욕심이 큰 것같아요. 그로인해서 부정부패도 만연해지는 것이겠죠. 민주주의에서의 주체는 국민인데 우리나라의 국민은 약간 수동적인 측면이 있는 것같아요. 이전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졌지만 정치는 나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거죠. 요구한다고해도 잘 이뤄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애초에 요구를 하지도 않구요. 대리인들이 자신이 내건 정책을 잘 수행하는지에 대한 감시가 이루어져야하는데 그것도 잘 안이뤄지는 것도 있죠.
마지막으로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것을 알려달라고 하셨는데 관심인 것같아요. 대리인들이 헛짓못하게 감시하는건 국민의 몫이에요. 그것의 출발은 관심이겠죠. 그저 욕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하겠다라는 국민 개개인의 의견도 있어야겠죠. 이런 질문한다는 자체가 그 관심의 출발이니 더욱 더 관심가지고 감시해주세요. 그러면 한국정치가 한걸음 발전할거에요.
제왕적 대통령제, 지역주의, 인물중님의 댓글
제왕적 대통령제, 지역주의,… 작성일
제왕적 대통령제, 지역주의, 인물중심의 정당, 이념부재의 정당과 소위 말하는 우파라 자칭하는 기득권 세력과, 좌파라 주장하는 진보 세력과의 정권 다툼의 현실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강제로 이식되면서, 이에 대한 과도기도 나타나긴 하였지만, 세계 어디에 유래없는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물론 당시, 미국과 소련의 냉전 차제 하에서 미국의 아시아권 국가의 공산화를 방지 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 강한 리더십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습니다.
사회적 문제로는 아직도 인물중심과 지역중심의 정치 현실을 이용한 퍼퓰리즘이 성행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국민들은 올바른 정치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상호존중이라는 시민적 덕성은 신자유주의화 아래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못하고, 객체화 시키면서 상품화 되고, 도구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무한 자유경쟁이라는 기치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그럴싸해보이고, 시장경제 체제의 옹호는 마치 전세계적인 트렌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는 미국 패권하에 영향을 받는 우리의 모습이고, 유럽 선진국과 여러 나라에서는 자국 보호를 비관세 장벽-환경, 인권, 사회적 기업에 부합하는 기업만 시장에 들어올 수 있음-등을 통해 실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북유럽의 복지국가는 시장 경제에 맡겨와 하는 것과 보호를 해야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선을 긋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 사회 정치 발전을 위해서는 크게 정치 형태의 변화, 소위 말하는 '실용주의' 노선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먼저, 이념 중심의 정치가 나타나고, 그로 인한 인물 중심이 아닌 정략과 대중의 논의를 통한 정치가 발생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 나라에 커다란 두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들의 초점은 차기 정권에 있지, 결코 정치적인 정교한 이론을 바탕으로 논의를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분명한 이념을 가진 정당이 나타나야 합니다. 단지 흑백의 논리로 보수와 진보라는 것을 나누자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말이 바뀌고 행동이 변화하는 그런 정책이 아닌, 자신의 정당이 지지한 공약에 대해서는 꾸준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공약 자체의 진실성과 여러 논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또한 지금의 소수 인물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형태의 정치는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하버마스가 말한 것처럼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공론의 장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권위를 앞세운 소수 엘리트들의 폭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밀의 말처럼 국민들은 정치 참여를 통해 더욱 깨어질 수 있으며, 사회화의 과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시대는 소통이 없는 일방적인 정치 진행과 올바르게 성숙되지 않은 시민의 덕성들로 인해 매우 혼란한 것이 사실입니다.
지역주의 타파가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 이용을 위해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지역주의에 대해 물들어 있었고, 또한 거기에 대한 수혜와 때론 박탈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이를 위한 정치제도의 개선은 중선거구제 및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보강 강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고여 있는 우리의 정치가 개선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경제적 측면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신자유주의라는 기치 아래에 모든 것을 시장경쟁에 맡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소위 '문제점'이라는 것은 여러 부분에서 지적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기득권'세력은 자신의 부의 축적을 위해서 '국가'의 발전이라는 미명아래에 이 체제를 더욱 곤고히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단순히 마르쿠제가 비판한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목적성을 상실하고 거대한 컨트롤 타워의 기계 부품처럼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묵묵히 살아가게 됩니다. 비판의식을 상실하게 되며, 진정한 자아 실현에 대해서 의식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자본주의 체제, 특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결코 변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88만원 시대, 비정규직, 고용불안, 청년 실업 이러한 단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 회복을 이룩한 우리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반공주의로 인해, 소위 말하는 '복지국가'를 '빨갱이'로 치부하려는 레드 컴플렉스가 아직도 남아있는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21세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흑과 백의 논리가 지배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미국, 공산주의는 소련이라는 이러한 도식은 20세기 정치 지배의 수단으로 기득권자들이 이용한 것들에 불과합니다.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국가들을 우리가 '빨갱이'의 국가로 말하지 않듯이, 우리는 '복지'의 측면을 강조되어야 합니다.
국가의 운영은 'CEO'의 개념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국익이라는 개념이 단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병들어 죽어가는데, 국가 자체에는 돈이 쌓여간다고 해서 과연 올바른 국가 운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선경제, 후복지라는 과거의 정치 경제 현실을 운운할 것입니까.
지금까지 현대 한국사회와 정치발전의 과제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소통'입니다. 세대의 차이를 넘어서, 지역의 차이를 넘어서 끊임없이 소통하고 서로를 이해해 가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리콴유(李光耀)의 분별력 9님의 댓글
리콴유(李光耀)의 분별력 9 작성일
리콴유(李光耀)의 분별력 9
자서전<The Singapore Story> 축약
깨끗한 정부 만들기
- "유모(乳母)국가라 놀려먹어도 할 수 없어!"
무책임한 자녀를 피하기 위해 나는 1983년 8월 해마다 열리는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대학을 졸업한 싱가포르 남성들에게 “자신들만큼 우수한 아이들을 원한다면
자신보다 교육수준이 낮은 아내를 고르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했다.
그 일로 인해 다음 해 있었던 선거에서 나의 인민행동당에 대한 투표율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12%나 떨어졌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했을까?
인재야 말로 나라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는 사실을 내가 깨닫게 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1965년 독립 당시 인구가 200만 명에 불과했던 싱가포르는
작고 자원도 부족한 나라로, 인재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이곳의 중국인들은 대부분 인력 브로커들이 짐 싣고 내리는 일이나, 인력거 끄는 일 같은 힘든 육체노동을 시킬 계약직 노동자로 데려온 중국 남부지방 출신 업노동자들의
후손이었다. 초기 인도 이민 역시 고무 농장에서 일하거나 도로건설 또는도랑과 하수구를 파는 계약직 노동자로 온, 대부분 낮은 계급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정부 관료 직에 있은 지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을 장관이나 관료나 전문가로 임명하는 일이 많을수록, 내 정책이 더욱 효과를 거두고 결과도 좋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생각은 캄보디아 시아누크공에게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로 치자면 그는 원작과 각색, 감독, 배우, 제작을
모두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처지였다. 캄보디아에는 교육받은 재능 있는 사람이 충분치 않았던 데다 그 얼마 안 되는 사람들마저 나중에 폴 포트(Pol Pot)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것은 캄보디아 비극의 한 원인이었다.
내가 ‘대 결혼 논쟁’ 연설을 하게 된 이유는 내 책상 위에 올려져있던,1980년 인구조사 수치를 분석한 보고서 때문이었다. 그 보고서에는 싱가포르의 똑똑한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고 있으며 다음 세대에 후손을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나타나있었다.
그것이 암시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싱가포를 여성들이 자식을 낳지 않고 있는 것은 그들과 똑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남성들이 그들과 결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싱가포르 대졸인원의 약 절반가량은 여성들이었는데, 그들 중 3분의 2가량이 미혼이었다.
아시아 남성은 중국인이든 인도인이든 말레이인이든 간에 자신보다 교육을 덜 받은 아내를 선호했다. 1983년에는 대졸 남성의 38%만이 대졸 여성과 결혼했다.
이렇게 전도된 결혼 및 출산형태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검토하지도 않은 채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을 어리석고 유해한 구식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다. 나는 1980년 대 미국 미네소타에서 있었던 일란성쌍생아에 대한 연구를 인용했는데, 이 연구에서는 이 쌍생아들이 유사한 면을 많이 보여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떨어져서 자랐는데도, 어휘나 지능지수(IQ),
습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음식이나 친구, 그리고 개성적 특징이 약 80%는 타고난 것이고, 약 20%는 교육의 결과였다.
대부분 아이들의 능력은 부모의 중간이며, 부모보다 그 지능이 낮거나 높은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자신보다 교육을 덜 받은 여성과 결혼하는 대졸남성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아이들을 가질 기회를 극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과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여성과 결혼 할 것을 강력히 권했으며,
대졸 여성들에게는 둘 이상의 아이를 가질 것을 권장했다.대졸 여성들은 내가 그들이 처한 곤경을 주시하자 당황했다. 한편,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여성들과 그 부모들은
내가 대졸 남성들이 그들과 결혼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항의했다.
또 언론은 지능이 유전이며 교육이나 음식, 훈련의 결과가 아니라는 내 믿음이
나의 엘리트 의식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미혼 대졸여성들의 문제를 덜어주기 위해 나는 대졸남녀 간의 교제 활동을 도와주는
사교개발기구(SDU)를 설립했다. SDU는 처음엔 여자든 남자든 대졸자에게 경멸을 받았다. 세계의 유수한 신문들은 내가 남녀 간의 심포지움이나 세미나, 컴퓨터 학습,
그리고 선박여행을 통해 실현시켜보려는 짝짓기 노력과 SDU 활동을 비웃었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어머니들은 자신과 비슷하게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며느리가
더 호락호락하리라 여겨 그들을 선호했다.
가정의 경제를 혼자서 책임지지 못하는, 가장다운 위엄이 없는 남성은 동정이나
조롱을 받을 것이라는, 이런 문화적인 편견을 없애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또 수많은 상급학교(고졸정도)의 여성들은 결혼할 만한 대졸 혹은 상급수준의 남성을 찾지 못했다. 보통수준의 여성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은 눈을 높여 결혼하기 원했고, 남성들은 낮춰서 결혼하기를 원한다.
그 결과 교육을 적게 받은 남성들은 결혼할 여성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출산율이 자동적으로 떨어졌다.
나는 이런 출산경향을 바로잡기 위해 당시 교육 장관이던 캥쉬와 협의,
세 명의 자녀를 둔 대졸여성에게는 세 아이 모두에게 모든 부모들이 높이 평가하는
가장 좋은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을 주었다.
깨끗한 정부 만들기
내가 1959년 인민행동당(PAP) 정부를 출범시켰을 때 우리는 깨끗한 정부 만들기를 다짐했다. 우리는 탐욕스럽고 부패하고 타락한 아시아 지도자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억압당하는 국민들의 자유를 위해 싸우던 이들이 오히려 국민들의 재산을 빼앗는 약탈자가 되어 갔기 때문이다. 환멸을 안겨준 아시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게 대해 분노하고 부끄럽게 여겼던 것이다.
1989년에는 부정에 대한 최고 벌금액을 1만 싱가포르달러에서 10만 달러로 높였다.
반부패조사기관(CPIB)에 거짓 정보나 사기정보를 제공하면 감옥행에 처해지거나
최대 1만 싱가포르 달러의 벌금을 물게 만들었다. 여기에다 법원은 부정과 부패로 모아들인 모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세관공무원들은 금지된 물품을 몰래 들여오는 차량들의 조사를 신속히 해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아 왔다.
중앙조달청에서 근무하는 요원은 사례를 받고 입찰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수출입 담당 공무원들은 허가 절차를 빠르게 해 준다는 명목으로 뇌물을 받았다.
건설업자들은 부정공사를 눈감아 달라고 직원들에게 뇌물을 건네주었다.
일부 중국인 학교의 교장과 교사들은 문방구 공급업자들로부터 커미션을 받았다.
권력과 자유재량을 개인의 이익으로 바꿔나갈 때, 인간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의 교묘함을 드러낸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나는 측근과 고위직부터 부패행위에 관한한 가차 없이 처벌했다.
정부가 높은 윤리기준 그리고 부패 척결에 대한 강한 확신과 결단력을 과시하며 출범하기는 쉽다. 그러나 지도자가 모든 범법자들을 예외 없이 다스릴 만큼 강력하고 굳센 의지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이 같은 좋은 의도를 실천하기는 어렵다.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청렴함과 헌신을 요란하게 내세웠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중국의 호텔 종업원들은 심지어 손님이 버리고 간 물건까지 포함, 호텔 객실에 남은 물건들을 모조리 돌려주었다.
물질의 소유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을 내세우는 과장된 행위였다. 그러나 1966~76년의 문화혁명기간동안 모든 체제는 무너졌다. 족벌주의와 부패가 지도층까지 물들인 것이다. 모든 사회성원들이 혁명가의 탈을 쓰고, 그들이 동료와 선배까지도 배반하고 구속시켜, ‘헬리콥터 승진’을 하려는 기회주의자들로 타락하고 말았다.
깨끗한 정부의 필수 조건은 선거 입후보자들이 당선되기 위해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있다. 아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부패를 조장하는 것은 바로 엄청난 선거비용이다. 선거 때 많은 돈을 쓴 당선자는, 반드시 자기가 쓴 돈을 다시 거둬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의 당선을 위해서 자금을 축적하려 한다.
이런 악순환에 빠지면 벗어 날 수 없다.
일본의 국회의원은 도쿄와 자신의 선거구에서 근무하는 그의 보좌관에게 지급하기 위해
그리고 유권자들의 생일, 결혼, 장례식에 선물을 보내기 위해 1년에 미화(美貨) 1백만 달러를 쓴다. 더구나 선거가 있는 해에 입후보자에게는 5백만 달러 이상의 돈이 필요하다. 그는 재정을 소속 파벌의 보스에게 의지한다. 파벌 보스의 권력은,
그가 후원하고 그에게 자금을 의지하는 국회의원의 수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는 한 선거와 다음 선거 사이에 그의 추종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많은 금액의 돈을 모아야 한다.
일본 말고도, 언론이 비교적 자유로운 발언권을 가진 나라로 알려진 한국, 타이완, 인도,
태국, 필리핀 역시 이 부정부패는 사회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유언론이 언론사 사주의 부정과 부패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탈리아의 총리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거대한 언론사의 사주였지만, 총리가 되기 전 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수사기관에 의해 조사를 받고 구속된 일도 있다.
영국의 경우 (2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재산이 없는 사람을 국회에서 찾아 볼 없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현실은 이제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이 두 나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너무 바쁘고 성공적인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국회에 진출하기를 꺼린다.
1970년대부터 청소년들을 사악하고 위험한 중독에서 구하기 위해 나는 모든 담배 광고를 금지했다. 1957년까지는 나도 하루 20개피 이상의 담배를 피웠다.
껌 판매까지 금지 시키자 미국에서는 우리의 조치를 크게 비웃었다.
싱가포르의 국가개발부장관은 1983년 초, 버려진 껌이 열쇠구멍, 우편함,
엘리베이터 버튼 등에 끼여서 야기되는 문제들 때문에 껌의 판매금지를 제의했던 것이다. 복도나 길바닥에 뱉어 놓은 껌 때문에 청소와 청소기 수리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공공물을 파괴하는 불량배들은 도시철도기차의 문에 달린 감지기에 껌을 붙여
공공서비스에 큰 차질을 일으켰다. 내가 총리를 그만 두고 나서 2년 뒤인 1992년 1월,
고촉동 총리와 그의 다른 동료들은 껌 판매금지를 결정했다.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외국 특파원들은 부정부패에 대한 큰 추문을 보도한 적은 없다.
대신 그들은 싱가포르를 “유모의 나라(과보호 국가)”라고 비웃고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최후에 웃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에 우리가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도록 국민들을 설득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상스럽고 거칠고 교양 없는 사회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문명이 개화되고 세련된 사회가 될 수 있는 기반은 없었지만
가능하면 최단시간에 이런 사회가 되려고 애쓴 데 대해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첫째로 우리는 국민들을 교육시키고 그들에게 옳은 생활습관들을 권고했다.
우리는 대다수의 국민들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면 그 다음으로 고집 센 소수를 처벌할 법률을 제정했다. 이것이 바로 싱가포르를 더욱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든 것이다. 만약 이런 것이 “유모 국가”라면 나는 내가 싱가포르를 쭉 길러 온 유모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