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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살아남는 두 부류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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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 부류 댓글 3건 조회 1,614회 작성일 15-03-24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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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에 한 미국 高官이 리콴유를 만나 북한정권에 대하여 나눈 對話(대화)의 보고서가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의하여 공개되었다.
  그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북한의 집권자들은 정신병자 같은 집단이다. 늙어서 축 처진 모습을 한 자들이 박수와 환호를 받으려고 경기장을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니는 지도자를 위하여 봉사한다.
 
차기 지도자는 그러나 김일성과 김정일이 가졌던 배짱과 변덕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인민들이 파리처럼 죽어가는 것을 구경하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지 않기를 원할지 모르지만, 일본이 핵무장을 하는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國境(국경)에 미군이 나타나는 것보다는 핵무장한 북한을 더 選好(선호)할 것이다.>

 타임(미국 시사주간지)과 한 인터뷰에서 리콴유(李光耀)는 ‘귀하는 종교적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종교적 가치를 크게 신봉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기도가 사람을 치유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사람을 안심시킬 수는 있겠지요.
 
나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인 홍슈센 전 재무장관이 죽음을 맞아들이는 자리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심장마비가 와서 死境을 헤매고 있었는데,
 
그의 눈에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와 부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거든요. 두 사람은 천당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신을 믿는 사람들은 위기가 닥칠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도움이 되는 일이지요.
 
한참 옛날입니다만 나는 한 프랑스 가톨릭 신도가 쓴 ‘진짜 敵’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나치 강제수용소 체험을 썼습니다.
 
수용소에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요. 신념을 가진 그룹의 사람들은 살아남았는데 신념이 없었던 사람들은 죽었다는 거예요. 신념을 가진 그룹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는 著者와 같은 신앙인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자였답니다. 이들은 끝내 그들이 결국은 승리할 것이란 신념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의사들, 재능이 좋은 음악인들, 그들은 음식과 담배를 바꿨다고 해요.
 
그들은 그렇게 하면 어느 날인가에는 점호 때 추운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되어 처형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버티지 못했다는 겁니다.
 
신앙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투지를 가지고 결국 살아남았답니다. 인간의 정신 속에는 이성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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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님의 댓글

1979년 작성일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생애 마지막 날 도고호텔에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 그 7일 전에 있었던 리콴유 수상과의 대화 내용을 소개했다.
 “이 수상이 그러는데, 공산당과의 싸움에서는 내가 죽든지 적을 죽이든지 하는 두 길밖에 없다는 거야. 어중간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거야.”
 朴 대통령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외국 지도자는 그와 가장 닮은 사람이었다. 리 수상은 1979년 10월16일에 訪韓했다. 金聖鎭(김성진) 문공부장관이 ‘수행장관’이란 유례가 없는 직함을 가지고 수상의 안내를 맡아 1박 2일간 경주 일대를 돌았다. 朴 대통령이 리콴유를 초청한 데는 ‘내가 건설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한번 보여 주겠다’는 의욕이 있었다. 리 수상은 처음에는 초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미국 허드슨 연구소 소장 허먼 칸 박사는 리 수상과 친했다. 김성진이 칸 박사를 초청하여 박 대통령을 만나게 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意氣投合(의기투합)하여 말 꽃을 피웠다. 칸 박사는 그 뒤 리콴유를 만나자 “박정희란 인물이 간단치 않은 사람이니 꼭 한번 만나 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리 수상에게 자신의 작품인 포항종합제철을 보여 주고 싶어 했으나 자존심이 강한 리콴유는 경주의 문화유산을 보겠다고 했다. 외무부에서는 리콴유가 포항공항에서 내려 경주로 향할 때 浦鐵(포철)을 관통하는 도로를 주행하여 가도록 짰다. 리 수상의 옆자리에 타고 있던 金聖鎭 장관이 보니 리콴유는 벌써 눈치를 채고는 車窓(차창) 밖으로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다. 1박 2일간의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때도 포철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김 장관이 “두 번이나 그렇게 하면 실례가 되니 경주에서 대구공항으로 가도록 노선을 변경해 달라”고 했다. 경호실에서 “안 된다”고 제동을 거는 것이었다. 김 장관은 崔侊洙(최광수) 의전수석을 통해서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냈다.
 경주에서 대구로 달리는 길 양쪽은 화려한 가을 날씨 속에서 풍요로운 농촌풍경이 황금물결을 이루며 이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누런 벼이삭, 지붕개량을 끝낸 깔끔한 농가, 지붕위에 널린 빨간 고추. 리 수상은 비로소 차창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가끔 시계를 보았다. 이런 농촌이 어디까지 계속되는지를 재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부러움과 오기가 뒤섞인 표정으로 상기됐다. 대구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 탑승한 그는 이륙한 뒤에 김 장관을 바라보고 말문을 땠다.
 “貴國(귀국)의 농촌은 아주 실속 있게 잘 사는군요.”
그러고 나서 리콴유는 “이러한 발전의 비결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김 장관은 박정희의 지도력과 외국에 나가 있던 우수한 두뇌들을 귀국시켜 국내의 과학기술발전에 기여하도록 한 정책을 들었다. 崔亨燮(최형섭) 과기처장관이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과학자들을 찾아가서 애국심에 호소하고 좋은 연구시설과 대우를 약속하여 귀국시킨 사례들을 설명했다. 리콴유 수상은 진지하게 경청하더니 비행기가 서울에 닿을 때까지 사색에 잠기는 것이었다.

“각하가 여론과 언론을 무시하였기에님의 댓글

“각하가 여론과 언론을 무시… 작성일

“각하가 여론과 언론을 무시하였기에 대한민국이 성공했다”

 10월19일 청와대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서 리콴유는 朴 대통령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데 소모합니다. 한편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깁니다. 대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시는 분이셨더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성진은 1991년에는 駐싱가포르 대사를 지내면서 그와 재회하게 된다. 1994년 1월19일 김성진(당시 대우그룹 부회장)은 <月刊朝鮮>을 위하여 리(李) 수상과 인터뷰할 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아시아에서 귀하를 제외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세 사람만 든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먼저 鄧小平(덩샤오핑)을 꼽겠습니다. 그 노인은 정말 어려운 시대에 험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중국이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방향을 전환시켰습니다. 만일 등소평이 모택동 이후에 정권을 잡지 못했더라면 중국은 소련처럼 붕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본의 요시다 수상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과 냉전이 시작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이 미국 편에 확실히 서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글쎄요. 세 번째 사람을 거론하게 되면 한국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아서…….”

리콴유(당시는 수상직에서 은퇴)는 ‘아시아의 3대 지도자에 들어갈 만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 金泳三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와 前 정권, 특히 군사정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정치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3대 지도자에 현직 대통령이 싫어하는 박정희를 포함시켜서 괜히 한국·싱가포르 관계에 악영향을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리콴유가 그 김영삼 대통령을 어떻게 보았을까?

역사 바로 세우기 비판님의 댓글

역사 바로 세우기 비판 작성일

역사 바로 세우기 비판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싱가포르를 방문, 리콴유 전 수상을 만났다. 그는 자랑부터 하더라고 한다. 매일 아침 장거리 조깅을 한다고. 그는 싱가포르와 한국은 가족의 중요성이나 가족을 부양하는 사회적 網(망)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리 수상은 하나를 덧붙였다고 한다. 한국과 싱가포르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데 대한 공통된 이해관계가 있다고.
 그는 김영삼의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을 비판하였다.
 <(김영삼이 주도한 이른바 역사 재판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파멸시켰을 뿐 아니라 현대 한국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은 모든 권위에 환멸을 느끼거나 시니컬해졌다. 全과 盧는 당시 한국의 기준에 맞는 행동을 했을 뿐 결코 악당이 아니었다. 노태우는 또 군인 출신을 후계자로 삼아선 안 된다는 미국 여론의 압박도 있어 김영삼에게 정권이 넘어가도록 허용했었다. (그럼에도 노태우를 감옥으로 보낸 것은) 다른 나라들의 군사 지도자들에게 나쁜 신호를 보냈으니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 하는 민간 정치인에게 정권을 넘기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1999년 한국에 와서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을 만났을 때 리 전 수상은 이른바 햇볕정책에 대하여 이런 충고를 했다.
 <남북간에 사람들의 교류가 활발해져야 한다. 연구소끼리, 대학끼리, 여론 형성자들끼리. 그렇게 해야 북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뀐다.>
 김 대통령은 중국과 북한 관계에 대하여 물었는데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중국 지도층은 한반도에서 전쟁이나 무질서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현상 유지를 원한다. 그래야 한국과 교역을 하고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반도가 통일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통일이 되면 중국은 미국과 한국에 쓸 수 있는 북한 카드를 잃게 된다.>
 리콴유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대하여는 비판적이다. 한국이 점진적으로 민주화를 하면서 항의 시위를 완화시킬 수 있는 법적 장치를 갖추어갔더라면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경찰과 과격하게 충돌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에서 지도층과 국민들이 사회적 신뢰관계를 再開(재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역대 대통령들이 기업인과 관리자들을 우대하여 고도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생긴 갈등을 해결한 다음 한국은 다시 정력적으로 전진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한국인들은 역동적이고, 부지런하며, 의지가 강하고, 유능한 국민들이다. 그들의 경쟁 문화는 그들을 성취 지향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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