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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들 어떠하리 , 저런들 어떠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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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방원의 하여… 댓글 2건 조회 2,429회 작성일 13-07-16 19:49

본문

이방원의 하여가
 
ㄴ>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하여가가 무슨 내용을 말해주고 있는지 좀 가르쳐 주세요.
 
정몽주의 단심가
 
ㄴ>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단심가에서 "임"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가르쳐 주세요
 
반드시 이 두 질문을 모두 답해야 합니다.
 
이 두 질문을 모두 답해 주시면 지식머니 마니마니 드릴게요~!
 

댓글목록

김.....님의 댓글

김..... 작성일

하여가는 고려왕조든 조선왕조든 상관없이 칡덩굴이 서로 얽혀서 살아가든 다 같이 잘살아 보자는 것이고
정몽주의 단심가의 임은 고려왕조를 뜻하는 것으로서
개혁집단과 보수집단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죠 예나지금이나
개혁이란 피를 보게 마련인가 봅니다

선죽교님의 댓글

선죽교 작성일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몽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해야만 고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몽주는 우선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조준∙남은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감금시키고, 조준∙남은∙윤소종 등은 귀양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가 머무는 해주로 급히 달려가 아버지의 귀경을 재촉했다. 이성계는 부상당한 몸을 가마에 싣고 그날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직접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성계는 평소와 다름 없이 정몽주를 맞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하여가]∙[단심가]라는 시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정몽주는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로 들려주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의 손에 죽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전설이 되다

정몽주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이상 그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는 도당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혔다.”라며 다시 효수하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문관들은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제 더는 그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정몽주의 충절은 선죽교에 뿌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로 남았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에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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