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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딸들의 다른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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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교 댓글 6건 조회 2,604회 작성일 12-08-17 07:56

본문

스탈린시대와 박정희시대, 그 딸들의 다른 역사인식

 

.jpg

.박정희는 자유당때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4.19로 잠시 보류했다가 장면정권이 들이선지 일주일만에 쿠데타를 모의하고 9개월 반만에 쿠데타에 성공합니다

 

오로지 합헌정권타도만이 목표였습니다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니 말이 됩니까?


댓글목록

정말 지도자는님의 댓글

정말 지도자는 작성일

정말 지도자는
특히, 지위에 걸맞는 함양과
능력, 자질, 스팩, 지.덕. 체 등등
모든 부분에서 검증의 절차를
거치고 거쳐서 선출되야 헌다

그래야 그 조직이 그 지역이
그 나라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번성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허면 찡그러지고
엉망진창이 되고 퇴보허고
개고생 허는 것이여......

그런데...
갱남은 세분의 도백이
지나간 자리엔...
웬지....먹구름이....

대한이님의 댓글

대한이 작성일

스탈린은 독재로 인해 소련을 세계 최고의 악의 국가로 만들었지만
박정희는 산업화에 성공하지 아니하였는가
비교할 것을 비교 해라
비교야

ㅁㅁ님의 댓글의 댓글

ㅁㅁ 작성일

스탈린은 독재로 인해 세계 최고의 악의국가 ...ㅋㅋㅋ
그렇담

박정희는 유신독재로 세계 최고의 인권유린국가...ㅋㅋㅋ
장발이 못마땅해서 경찰이 바리깡들고 다니고
미니스커트가 못마땅해서 경찰이 자 들고 다니던 그시절..
말로 다할 수 없었던
통제받고 구속받았던것을
아련한 추억으로 생각하신다면..

더 나아가 그 구속받던 아련함을 그리워한다면
당신은 진정..마조히스트..

당신의 취향을 논하고 싶지는 않지만..
많은 국민들이 마조히스트는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ㅋㅋㅋ

잘해야님의 댓글

잘해야 작성일

잘해야 외세에 의한 국가 침략 강탈 없다.

국가와 국민은 조국 해방을 맞아 환호하지만, 가정내 애국선조를 잃고 경제적 고통속에서 숨어 우는 슬픔속에 잠긴 가정도 있다.

대한민국 조국 해방과 광복을 위해 순국하신 애국선열 영전에 분향을 올리며, 눈을 감고 호국선열들의 흘린피를 더듬어 볼필요가 있다.

1910년 한일병탄, 조선제국은 내우외환으로 일제 강제침략을 자초하여 대대적인 한민족 살육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 동아시아 와 태평양에서 일으킨 인류대학살을 펼친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한 날이다.
해방은 됐으나 아직 진정한 광복은 오지 않았다.

한반도에도 해방을 되찿았으나 진정한 광복은 뒤로 한채 외세에 의한 통치로 미군정의 남한 과 소련군정의 북한 통치로 38선으로 갈라져 또 다시 제2분단의 비운을 맞았다.
1950년 6월 25일 소련 탱크를 앞세워 김일성 집단의 남침으로 또 다시 화마에 휩싸인 한반도는 극심한 동족상잔의 피를 흘린뒤 휴전선으로 다시 갈라져 제3분단의 비운을 맞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M.W.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간에 서명되어 휴전선으로 남북이 분단됬다.

휴전이후 한반도는 남북 냉전시대에서 최근에 이르기 까지 진정한 광복과 평화가 아닌 총성만 멈춘 아직도 불안한 상태로 이어져 왔다.

그간 숫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재도발 움직임 속에서 대한민국의 국방은 국민의 피와 생명으로 지켜져 왔다.
그러나 국가벼랑끝 위기시에 국가를 구하려 목숨바친 애국독립운동가 와 호국영령 후손들에 대한 국가적 국민적 관심과 지원이 애처러울 정도로 미흡한것은 사실이다.
독립운동가 또는 호국선열 후손들은 어렵게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으나, 침략집단에 충성한 매국노 집단들은 아직도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하고 부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간 정부는 물론, 국회와 지자체 그리고 보훈처 법제처 는 가장 우선적 지원대상에 충실해 왔는가 ?

■ 과연 어느누가 국가가 벼랑끝 운명 시기에 목숨바쳐 애국 충성하겠는가 ? 애국자와 호국선열 후손에 대한 실질적인 보살핌이 필요하다.

▶ 국회와 감사원 사법기관은 철저히 이를 바로세워야 애국자 와 그 후손들이 경제적 고통현실을 최소화 할수 있고, 대한민국이 애국자가 대우 받는 국가로 거듭나야 국가를 지켜나간다.

■ 애국선열가정에 대한 국민세금 충당은 충분히 다음과 같은 사항을 철저히 준수하면 충족된다.

▶ 국민세금 혈세로 치뤄지는 진정한 장애자들은 당연히 국고로 지원해줘야 하지만, 실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음에도 국민혈세 장애수급 타 먹으려 억지 장애판정 수급자들은 제외시켜야 한다.

▶ 국세청은 서민층 대상이 아닌, 부자 졸부층에 대한 교묘한 탈세방지 차원에서 철저히 성실수납토록 국세의무 감시를 강화 시켜야 한다.

▶ 검찰 과 사법기관에서는 국세청 세무직원이 세무회계사무소 와 결탁하는 부정한 짓을 철저히 척결시켜야 한다.

▶ 국회 와 국민적 합의가 정립되지 않은 무분별한 국책사업은 발의기획 부터 책임시행부처 담당자 까지 개인재산 담보설정으로 철저히 그 책임여부를 지도록 입법화 시켜야 한다.
국민혈세는 국민의 피와 생명이기 때문이다. 결코 공직자들이 공식적으로 칼질해도 되는 떡이 아니다.

▶ 고물가 경제불황 저성장 기조속에서 경제위기에 닥치지 않으려면, 국가살림을 알뜰하고 짜임세 있게 꾸려가야만 국가가 지탱된다.

■ 외세는 대한민국 경제위기를 노려 침탈하려고 정탐하고 있다.

▶ 대선도 중요하지만 정치인들이 국민분열을 시켜서는 국가 위기를 초래 한다.
대선은 가장 조용하고 침착하게 치뤄야 한다. 대한민국을 망친것은 성실한 국민이 아니라 부정부패로 점철된 국가지도층 때문에 망국을 초래했었다.

▶ 그중 시급한 순서는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애국독립운동가정 과 호국선열가정, 그리고 극소외계층 과 무자본저소득 서민층 등 우선순위로 가정경제를 살려야 한다.

▲ 임진년 대한민국 지상 최대 천명은, 최우선 국가적 국민적 과제는 민생경제 안정이다.

평화선님의 댓글

평화선 작성일

‘평화선 선언’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외교적인 기습이었다. 당시 한-일간의 예비회담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은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한일 회담에서만은 어디까지나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고, 반명 한국은 일제 통치에 대한 보상 심리와 경계심이 작용하고 있었다. 서로 간에 첨예하게 이해가 맞서고 있었던 셈이었다. 결국 예비회담은 별 진척을 보이지 못한 채 1951년말 일시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측 협상 대표였던 金東祚씨(전 외무부 장관)는 일본측에 대응할 협상 카드로 어업자원 보호수역의 선포를 생각해 냈다. 처음에는 단순한 어업자원 보존의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구상은 실무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 과정에서 안보-국방 차원까지 포함됨으로써 훨씬 ‘래디컬’한 성격을 띠게 된다. 수역 내의 어족 자원 보호는 물론, 대륙붕의 해상·해저 광물 자원의 보존과 개발, 국방상의 해양 방어, 독도를 둘러싼 영토 분규의 종식 선언까지 포함한 강력한 해양 주권 선언안을 마련한 것이다.
 
  ‘하나,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의 영토인 한반도 및 도서(島嶼)의 해안에 인접한 해책(海柵:해양경계선)의 상하에 기지(旣知: 이미 알려져 있고)되고 또는 장래에 발견될 모든 자연자원, 광물 및 수산물을 국가에 가장 이롭게 보호·보존 및 이용하기 위하여 그 심도(深度) 여하를 불문하고 인접 해책에 대한 국가 주권을 보존하며 또 행사한다…’
 
  총 4장으로 된 이 역사적인 선언문의 안건은 ‘인접 해양에 관한 주권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李承晩 대통령에게 상신됐다. 李대통령은 ‘가만(可晩)’이라고 재결했다. 그렇게 해서 1952년 1월18일 국무원 고시 제14호로 만천하에 공포됐던 것이다. 이 선언은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한다는 취지가 부각돼 ‘평화선’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한국은 ‘평화선’, 일본은 ‘李라인’
 
  이 선언은 公海상에 주권 선언을 한 만큼 이는 공해 자유 원칙에 위배되는 면이 있었다.
 
  국제법상 공해 자유 원칙은 공해상의 자유로운 어업 활동의 보장도 포함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언문에 공해상의 자유 항해권은 방해치 않는다고 단서를 달기는 했다. 하지만 영토 귀속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던 독도를 포함해 우리의 해양주권을 설정하고 이를 침해할 경우 무력 행사로서 제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니, 일본으로서는 크게 한방을 먹은 격이었다.
 
  일본의 반발은 엄청났다.
일본은 평화선이 선포된 지 1주일 만에 정부의 첫 공식 항의성명을 외교 경로를 통해 우리쪽에 전달해 왔다. 언론에서는 ‘공해 자유를 완전 무시’, ‘한국, 어업 교섭에 선수 치다’ 등의 점잖은(?) 반발에서부터 ‘오만무례하고 불손한 한민족’, ‘한국의 해양 주권 선언은 영토 침략’이라는 감정 실린 성토까지 쏟아져 나왔다.
또 일본 각지에서 연일 평화선 선포를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金東祚씨의 회고에 따르면 이 평화선 선포가 있은 뒤로 한일 회담에 나온 일본대표들은 본건은 제쳐놓고 “한국측이 과연 한일회담을 계속하려는 성의가 있는지 묻고 싶다”는 등의 언사를 퍼부었다고 한다. 또 미국, 영국, 대만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이 평화선 선포에 대해 비판적인 성명을 내면서 일본의 입장을 거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평화선은 선포된 지 십수년 후, 한일 국교 정상화와 함께 역사의 뒤편으로 소리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 평화선 선포는 일본측에 충격을 준만큼 한일회담 과정에서 성공적인 외교 전략으로 유효했던 셈이다.
 
  한일회담에서는 무엇보다도 평화선이 현안과제가 됐고, 일본측에서는 이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서둘렀다. 한일회담이 타결되기까지 여러 차례의 결렬이 있었고 몇 차례의 파국이 있었지만 결국 타결의 종장까지 이르는 데는 이 평화선이 실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평화선’은 ‘李라인’으로 명칭이 변했다. 李承晩 대통령을 반일 초강경론자라는 점을 꼬집고 싶은 일본의 심사가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당당함을 보여준 ‘위대한’ 선언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미지님의 댓글

이미지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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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60) 새누리당 후보는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자녀로서 처음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가 1998년 정치를 시작할 땐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이 그가 가진 정치적 자산의 전부였지만 그 뒤 '원칙과 신뢰'이미지, '위기에 강한 리더십'이라는 자산을 쌓으면서 정치인 박근혜로 자립했다. 그는 헌정 사상 최초의 유력 정당 여성 대선 후보이기도 하다. 그가 대권 재수에 성공해 이번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건국 이후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父女)가 모두 대통령이 되는 또 다른 기록을 쓰게 된다.

박 후보가 대권 꿈을 이루기 위해선 아버지와 과거사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입장을 밝히고, 불통 이미지를 덜어내야 할 것이다. 여권 내에선 "박 후보가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지려면 박 후보 본인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18년간 청와대 생활 …18년 간 칩거

1952년 2월 대구에서 태어난 박 후보는 아버지가 1961년 5ㆍ16 쿠데타에 성공해 63년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영애'가 됐다. 그러나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1974년 흉탄에 서거하면서 박 후보의 화려한 삶은 끝났다.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당시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그는 귀국해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그러나 5년 만인 1979년 박 전 대통령마저 총탄에 서거하는 비운을 겪었다.

18년 간 머물렀던 청와대를 떠난 뒤 박 후보는 무려 18년 간 칩거했다. 그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거나 각종 서적을 탐독하며 훗날을 준비했으며 지인들과 간간히 테니스 등을 즐기며 자기 관리를 했다. 그는 육영재단 이사장과 영남대학 이사 등을 거쳐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시 야당인 새누리당(옛 한나라당) 공천으로 당선돼 정치를 시작했다. 당시 46세였다.

5선 관록 정치인 박근혜

박 후보의 정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재선에 성공한 뒤인 2000년 당 총재 경선에 출마해 이회창 총재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여의도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2001년에는 당권ㆍ대권 분리 등을 골자로 한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하고 대표직을 맡았다. 대선 도전의 꿈을 접고 2002년 복당한 박 후보는 2004년 3월 대표를 맡아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 등으로 위기에 처했던 당을 구하기 위해 '천막당사'이전으로 배수진을 치며 총선을 주도해 예상 외의 성적을 냈다.

이후 2년 3개월 동안 당 대표를 지내면서 각종 선거에서 완승을 이끌어내 '선거의 여왕'이란 닉네임을 얻는다. 2006년 지방선거 유세 도중 괴한에 의해 얼굴에 칼을 맞은 뒤 병상에 누운 상황에서도 당시 경합을 벌어지던 대전 지역 판세를 물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박 후보는 이명박 후보에게 패하면서 정치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러나 현정부 내내 30~40% 안팎의 지지율로 대세론을 유지했고 2011년 10월 서울시장 선거 패배 이후 홍준표 대표가 사퇴하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명을 바꾸는 등의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결국 새누리당이 4ㆍ11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과반 의석(152석)을 얻으며 승리함으로써 총선을 진두지휘한 박 후보는 유력 대선주자 입지를 굳혔다.

역사관·불통 이미지 해결이 열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박 후보에게 명(明)이자 암(暗)이다. 박 후보의 오늘날을 있게 한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역사관 논란을 부른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5ㆍ16 쿠데타에 대해 2007년에는 '구국의 혁명', 지난달에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규정한 것은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때문에 캠프 내부에서도 '박정희의 딸'에서 '대선주자 박근혜'로 보다 적극적인 입장 선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소통 문제도 박 후보를 줄곧 따라다니는 약점이다. 특히 새누리당의 총선 승리 이후 주요 당직을 친박계가 싹쓸이하면서 '사당화 논란'까지 더해져 이 같은 부정적 이미지는 확대재생산됐다. 그 연장선상에서 젊은층 지지가 취약하다는 점도 박 후보 캠프가 고민하는 대목이다.

반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던 5년 간 아버지 곁에서 간접적으로 접했던 국정운영 경험과 5선 의원을 지내고 당의 수장을 수차례 맡으며 당을 위기에서 구해낸 리더십 등은 국민에게 '준비된 대통령 후보'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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