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캡틴은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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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리 캡틴 댓글 2건 조회 1,815회 작성일 11-02-14 14:05본문
우리 캡틴은 왜 그럴까
남 잘하는 것을 두고 질투는 왜 헐까?
자기 책임만 다하면 되는 거지~~~~~~~~?
자기 임무나 역할도 잘 못하면서~~~~
남의 험을 쫓아 가는지??????????
제발 그러지 마세여..........
우리 사장님은
도민의 위해 도민을 바라보고 오직 도민을 위해
일하라고 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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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석님의 댓글
타산지석 작성일
정치권에서 비롯된 복지 논쟁은 시민사회와 학계에도 큰 화두를 던지고 있다.
표에 목숨을 거는 정치인에게 복지논쟁을 맡기는 경우에 걷잡을 수 없는 포퓰리즘 경쟁을 자초할 수 있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한탕주의 포퓰리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심도 깊은 토론을 거쳐 선심성 공약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성숙된 국민만이 성숙한 정치를 가질 수 있다.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우리의 사회복지 지출이 국민총생산에 비해 선진국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늘려야 한다고 한다.
복지비용의 지출이 높아야 복지선진국이 된다는 논리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결정하지도 않고 쓸 돈부터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절실하지도 않은 일에 돈을 쓰는 것은 낭비다.
서구 복지국가 실패 타산지석 삼아
복지가 낭비가 아니라 투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선 복지국가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처음으로 돌아가 단추를 새로 채우는 수밖에 없다.
선진국의 복지 비용 규모를 부러워하기에 앞서 복지가 가져오는 부작용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복지 후발국가로서 장점을 살려야 한다. 복지선진국의 장점은 배우되 부작용까지 따라할 필요는 없다.
구체적인 복지 문제를 논의하기 전 먼저 복지국가의 전체적인 모습을 설계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복지국가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기본으로 ‘보충성의 원칙’을 들 수 있다.
이는 독일에서 발달해 유럽으로 확산된 사회구성원리이다. 이에 의하면 국가는 개인이나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개인의 생존과 생활은 일차적으로 개인이 스스로 자기 책임하에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이를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개인에 가까운 공동체인 가족과 지역사회가 나서야지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국가의 소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원칙이다.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근접공동체인 가족이나 지역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비로소 국가가 개입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가 개인의 생활을 방치한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나 근접사회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다만 이때 국가의 지원은 개인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지, 개인을 국가에 의존하도록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국가의 도움은 결국 국가의 도움이 불필요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존’ 아닌 ‘자립’ 돕는 정책 설계
오늘날 서구 복지국가의 가장 큰 문제는 갈수록 개인이 국가의 도움을 점점 더 많이 필요로 하도록 의존성을 늘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인구구조와 경제구조에 바탕을 둔 유렵형 복지모델은 노령화가 진행되고, 경제성장이 둔화된 오늘날 존립의 기반을 위협받고 있다. 또한 모든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고 국가에 미루게 돼 아무도 이웃 문제에 신경을 쓰려고 하지 않는 차가운 사회가 되고 있다.
이에 유럽에서는 국가의 복지활동을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것에 한정시키고, 그 목표도 국가의 도움을 불필요하도록 개인 책임을 확대하는 쪽으로 개혁 방향을 잡고 있다.
개인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라도 국가 개입 이전에 웬만한 문제는 이웃이 연대적으로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번 길들여진 복지 혜택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어 거부하기 어렵다. 복지 의존성은 개인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달콤한 환상에 안주하게 한다는 점에 딜레마가 있다. 국가가 높은 복지 비용을 지고 있는 것은 실패한 복지국가모델이다.
대한민국은 이런 선진국의 실패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국형 선진복지모델을 설계해야 한다. 일차적으로 자기책임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국가 이전에 가족과 지역공동체가 연대적 자발성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국가가 개입하는 경우에도 개인의 자립을 신장시키도록 해 국가의 도움이 더 이상 불필요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화와 규율님의 댓글
민주화와 규율 작성일
민주화와 규율
1917년 혁명 후 내전기에 탄생한 ‘붉은 군대’는 창설 초기 매우 ‘민주적’이었다. 사회주의 이상에 따라 계급 구분이 없어졌다. 장교라는 말이 사라지고 장교 제복과 견장도 폐지됐다. 장교 직책은 ‘지휘관’으로 대체됐다. 이는 위계(位階)가 아니라 지휘할 능력이나 자격이 있음을 뜻하는 순수한 기능적 개념이었다.
여기에다 지휘관은 사병들의 민주적 선거로 선출됐으며 사병은 1917년 3월 14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공포한 명령 제1호에 따라 지휘관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사병들이 지휘관의 특정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여부를 놓고 장시간 논쟁하는 사태가 자주 빚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규율은 있을 수가 없었다. 1924년 미하일 프룬제 군사혁명위원장이 군을 개혁하면서 장교의 명령권과 처벌권을 포함한 규율 규정을 복구했지만 제국 군대의 악습 부활이라는 공산당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런 전통은 1930년대까지 붉은 군대를 지배하는 정신적 저류였다. 독소전 초반 붉은 군대가 그토록 무능했던 이유도 상당 부분 여기에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위해 싸웠던 국제여단도 ‘민주화’ 과잉이었다. 자원병이 대부분이었던 병사들은 훈련보다는 싸우는 이유에 대한 집단 토론과 회의에 더 열을 쏟았다. 그들은 가장 기초적인 군사 기술에도 무지했을 뿐만 아니라 체질적으로 그것을 싫어했다. 그들은 ‘앞으로 가’ ‘좌향좌’ ‘우향우’ ‘뒤로 돌아’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한 참전 용사는 국제여단 병사들을 이렇게 평했다. “그들은 ‘자본론’을 손에 쥐고 있었을 뿐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 싸울 준비를 하지 않았다.” 이상은 높고 정의감은 불탔지만 국제여단은 오합지졸이었다.
인천의 한 경찰서장이 소속 의경의 투서로 전격 경질됐다고 한다. 투서의 내용은 과도한 근무로 지쳐있는데 교육을 하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고 TV 시청도 금지했다는 것이다. 그 의경은 이것을 ‘강압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서장은 규율 유지를 위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민주화와 규율 모두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다. 그 둘이 행복하게 동거할 수 있다면 최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바람을 배반하기 일쑤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참으로 지난(至難)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