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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노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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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도청노조 댓글 3건 조회 1,454회 작성일 10-08-27 17:45

본문

 

도청노조나

도청 출입기자단이나


그 나물에 그 밥 아이겠슈~

존 00새이기들 아이~겠슈


정의란 말도 입도 뻥긋하지 마세요

너희님들은 절대 욕 못헌다


맞장구나 치고 살아왔으니

가슴에 손을 언고 자식에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사회정의를 이야기 허 것노

이양 깔아주는 인생들아


눈만 말똥말똥 허거 여라

조청 노조간부와 기자단은 회식이나 자주허고


그렇게 살아 가거라이

댓글목록

ㅎㅎ님의 댓글

ㅎㅎ 작성일

거함산 떨거지구먼...

니도 그 꼴 당하기 싫거든 조용히 죽어 있어라

법적 정의님의 댓글

법적 정의 작성일

법적 정의이란것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규법입니다.
진(眞) 미(美) 선(善)같이 인간 생활의 궁극적 절대적 가치를 의미를 말합니다.

 

그렴 정의란 무엇인지 대해서 시대와 상황에따라 다소 다르게 표현합니다.

울피아누스: 정의란 각자에게 그 묷을 돌려주는 항구적인 의지 

 예) 내가 집에가는중에 지갑을 주었을때 그 지갑은 주인에게 돌려주는게 정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묷을 돌려줬으면 그 주인이 그일부(사례금)을 주는게 정의 라고 의미입니다. 

아리스토 텔레스: 정의의 본질은 평등이라고 하면서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평균적 정의와 능력과 공헌도에 따라 차등 대우하는 배분적(配分的) 정의로 부분

정의의 볼질이 평등이라는 점에 대해 쉽게 합의하더라도 구체적, 개별적 상황에서 평등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평들을 말할 때, 같은 것은 같게 다른것은 다르게 할 때의 기준은 합리적 차별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평균적 정의는 절대적 평등을 요구하고, 배분적 정의는 상대적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의란님의 댓글

정의란 작성일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논하고, 사회의 부정의가 팽배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국가란 어떤 것인가?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 중에서 ‘마징가 Z’라는 것이 있었다.

아수라 백작과 쇠돌이가 조정하는 마징가의 대결...마징가는 ‘좋은 놈’이었고, 아수라 백작 쪽은 ‘나쁜 놈’이었다. 선과 악이 분명했다는 애기다. 이 만화에서의 정의는 마징가가 아수라 백작군(軍)을 완전히 무찔렀을 때 실현되었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서는? 현실에서도 ‘악당’들만 무찌른다면 정의가 실현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먼저 다음을 고려해 보라. 도대체 누가 악당인가?

몇 해 전 아프리카 한 국가에서 일어나 미대사관 폭파 테러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그렇다면 테러를 저지른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인가?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것이다. 이들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악마’들이다. 그러나, 테러집단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숭고한‘애국지사’다. 왜냐하면, 테러를 저지른 사람들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폭탄을 터뜨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적은 오히려 미국의 부당한 대우와 폭거를 알리고 저항하는 것에 있다. 미국이 전 세계를 제압할 만큼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니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이 저항 할 수 있는 방법은 이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 양 쪽이 전부 ‘정의’에 호소하여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점이다. 테러를 당한 쪽은 공격한 쪽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비난하고, 테러를 행한 쪽은 정의를 이룩한 행위였을 뿐이라고 반박하다. 양 쪽이 모두 자신이 ‘정의로왔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도 이와 같다. 누구도 자신이 부정의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느 독재자도 ‘부정의’를 행하기 위해서 국가를 파멸시켰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은 ‘정의’를 실현 하려고했으면 일부 ‘부정의’한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변명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두 내세우고 있는 ‘정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1.“강자의 정의가 곧 정의이다.”:정의에 대한 현실주의적 견해

어떤 이들은 말한다. "정의란 아무 것도 아니다(Jistice is nothing) 정의는 단순히 명분일 뿐이며, 결국 강한 자의 의견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 진다"고. 경찰관 출신이 몰던 차와 평범한 서민이 몰고 가던 차가 부딪혔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경우는 경찰관 출신이 몰던 차가 유리한 판결을 받는다.

선진국에서 석면공장을 세우면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로 지탄받지만, 그 선진국이 후진 국가에 석면 공장을 짓게 하고 수입하는 것은 ‘정당한 국제 상거래’로 인정된다. 이 모든 행위가 말해주는 것은 정의란 오직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힘의 논리’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의롭기 이전에 힘을 길러야 한다. 힘이 곧 정의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당장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정의가 명분 만은 아님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수 십만 명의 목숨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철권을 휘두르던 독재자라도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고 ‘천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릴 수 있다. 또한, 위안부 문제를 보자.

일본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자국의 이익에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파해치며 해당국,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인간 사회는 힘으로만 이루어진 동물의 세계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정의라는 것이 있다. 그 것이 무엇이라고 단정짓기 어렵다고 해도. 그렇다면 도대체 정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2.“정의는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다”:정의에 대한 실용주의적 견해

정의가 단순한 명분이 아니라면 이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해답을 우리는 범죄 조직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범죄 조직은 사회의 악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범죄 조직 만큼 ‘윤리성’을 강조하는 집단이 없다.

선임자에 대한 반항은 곧 죽음이며 배신이란 곧 평생 불구자로 살만큼의 보복을 받음을 의미한다. 충성, 윗사람에 대한 존경과 복종, 서로간의 유대감...모두가 정의와 관련된 덕목들이다. 이 덕목들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비도덕적인 집단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그것은 정의가 사회를 유지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생활을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즉, 정의는 유익하다. 만약 범죄 집단의 모든 이들이 이러한 덕목을 무시해 버리고 산다면, 집단은 그 순간부터 존재할 수 없다.

사회 전체도 마찬가지다. 집단 내에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존중할 것을 보장하지 않으면 사회는 결코 존속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는 우리의 생존 보장이라는 ‘실용적인 목적’ 때문에 유용하고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것은 정의를 보는 일면적인 견해일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의가 나에게 유익하지 않을지라도 ‘정의로워지기’ 때문이다. ‘타이타닉호의 침몰 사건’을 보라. 배가 가라앉고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인데도 남자들은 노약자와 여성들에게 보트의 자리를 양보하고 바다로 뛰어든다.

 악단단원들은 승객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죽는 순간까지 음악을 연주한다. 이들에게 정의가 유익했는가? 자신이 없는 사회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정의에 기꺼이 동참한다. 그렇다면 정의는 과연 우리에게 유용하기에 존재하는 가치인가?


3.“정의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이다”:정의에 대한 이상주의적 견해

그렇다면 오히려 정의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아닐까? 인간인 이상 추구해야 하는.... ‘신의 이름으로’, ‘천리(天理)를 따라’, 와 같은 말들이 전근대적으로 보이고, 비합리적인 듯 들리지만, 앞서의 고찰과 연관 지어 보면 그다지 틀린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정의는 단순한 명분만도 아니며, 단순히 이익이 되기 때문에 따르는 것도 아니기에.

그러나, 보편적 가치로 정의를 보았을 경우, 이 정의는 실제 생활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예컨대, 재개발 지역에서 20층 짜리 건물을 지어야겠다고 주장하는 쪽과, 다른 이들의 일조권을 침해받기 때문에 이를 허락할 수 없다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 상황을 생각해 보라.

둘 다 정의를 내세운다. 건물을 짓겠다는 측은 자신의 재산권 행사라는 정의를, 못 짓게 하는 쪽은 타인의 권리 보호라는 정의를. 이 경우 누가 이기는가? 결국 힘이 있는 쪽의 손이 올라가지 않는가?

또한, 죽어가는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 공금에 손을 댄 은행원을 생각해 보자. 죽어가는 부모님을 살리는 것이 옳은 것임에 반해, 공금을 유용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경우 어떻게 이 사람을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보편적 가치인 정의는 이 경우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있다. 앞서 일조권 분쟁의 경우, 아무리 힘있는 자가 이긴다고 할지라도 정의는 있다. 법률의 논리적 해석, 상황의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고, 항고, 상고가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만약 힘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황이라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 분개하고 해결책을 요구한다. 이 것이 바로 정의가 있음의 예이다.

 그리고 또한, 앞서 은행원의 예에서도 우리가 이러한 상황자체를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정의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가 과연 무엇인가를 정의 내리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정의로 보느냐에 따라 사회의 가치 규준은 크게 달라진다. 이 번 시간을 통해서 정의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교제에 있는 논술 기출 문제들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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