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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나그네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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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댓글 4건 조회 1,663회 작성일 10-08-18 17:40

본문

인생은 나그네 길이다.
 
한번 잘 못되면 돌이킬 수 없는 일방통일의 길이 바로 인생길이다.
 
인생길은 저마다 갈 길이 정해져 있다.
 
농부는 농사꾼의 길이 있고 상인은 장사치의 길이 있다.
 
 마찬가지로 공직자는 공직에 걸맞은 길이 있는 법이다.
 
스승에게는 사도의 길이 있고 판사에게는 법관의 정도가 있는 것처럼 군인에게는 충성의 길이 있으며 경찰관에게는 민중수호의 길이 있는 법이다.
 
저마다 정해진 길이 있지만 그 길을 바르게 가지 못하고 궤도에서 일탈하면 탈이 생기고 마침내 변고로 이어지는 것이다.

공직자가 택할 길은 빈틈없는 청렴하고 결백한 길이다.
 
공직자가 가야할 길은 정직하고 성실한 길이며 윤리도덕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는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길이어야 하는 것이다.
 
공직자는 자아주장보다 민중존재를 우선해야하며 사리사욕보다 사회공익을 앞세워야하는 자기희생의 길이요 멸사봉공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
 
공직자가 가는 길은 국민을 주인으로 섬겨야하는 공복의 길이다.
 
공직자가 가는 길은 민생안정과 국태민안을 위한 길이다.
 
주인인 국민에게 헌신하고 봉사해야하는 가시밭길인 길이다.

공직자가 가는 길이 어렵고 막중하기 때문에 국가는 국민의 혈세로 공직자의 직책직분에 걸맞은 봉록(俸祿)을 내리는 것이다.
 
공직자가 양심을 버린 나머지 자신의 직책과 직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챙기고 부정부패를 일삼는다면 이런 자는 정당한 국록을 받는 공직자가 아니라 탐관오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자는 국민에게 지탄받고 처벌받아 마땅한 범죄자인 것이다.
 
공직자가 독재자의 사악한 권력유지를 위해 주인인 국민을 도리고 학대하고 억압한다면 이는 공직자가 아니라 폭력배에 불과한 것이다.

공직자는 불의한 폭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책무가 있다.
 
선량한 국민을 보호하고 민주와 인권을 지키는데 앞장서야한다.
 
공직자의 길은 정의의 길이다.
 
공직자는 불의의 세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수호자의 길을 가야한다.
 
공직자는 악을 경계하고 선을 보호할 책무가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주변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를 일삼는 부패공직자들도 많다.
 
특히 법을 만들고 민주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솔선하고 수범을 보일 국회의원들이 걸태질에 앞장서는 모습은 목불인견이다.

공직자의 길은 양심의 길이다.
 
공직자는 불편부당한 유혹을 물리치고 공명정대의 정도를 가야하는 것이다.
 
공직자는 빈천을 감수하고 청빈을 장려하는 청백리의 길을 가야한다.
 
그래야 공직자는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칭송받고 신뢰받을 수 있는 것이다. 

댓글목록

일생님의 댓글

일생 작성일

성공한 관리로서의 일생

 

황희(黃喜)는 공민왕(恭愍王) 재위 12년(서기 1363년)에 개성에서 판강릉부사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살 때인 우왕(禑王) 재위 2년(서기 1376년)에 음직(蔭職)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스물한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2년 후에는 진사시(進士試)에도 급제했다. 그러나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스물일곱살 때인 창왕(昌王) 원년(서기 1389년),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이듬해에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서른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70여명의 고려 유신(遺臣)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문동의 고려 유신들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풀 뿌리와 나무 껍질로 연명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고 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갖은 방법으로 이들을 설득했으나 끝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데, 흔히 말하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결국 태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협박하기에 이르고,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고려 유신들은 충절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등지고 백성을 외면하는 것 역시 배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황희가 조선 조정에 홀로 출사(出仕)하게 되었던 것이다.

 

황희는 성균관학관으로 복직하여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리인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한 후에, 직예문춘추관을 거쳐 사헌감찰, 우습유(右拾遺)를 지냈다. 초기에는 관직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외직으로 겉돌기만 하다가 그의 나이 39세 때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에야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공직자로서 경력을 쌓아 갔다.

 

이 시기에 그는 중추원(中樞院)을 없애 병권을 완전히 국왕에게 귀속시키는 등 병제를 일원화하는 작업을 무리 없이 추진하여 태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그즈음 지신사(知申事)로 있던 박석명(朴錫命)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사임하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황희를 적극 추천하였다. 이로써 황희는 그의 나이 43세에 임금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태종은 황희를 전폭적으로 신임하여 모든 정사를 그와 같이 논의하였는데, 외척이 정사에 관여하여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을 걱정한 태종이 처남인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제거하려 하자 황희가 앞장서서 이를 처리하기도 했다. 또 태종은 원로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황희에게 인사 행정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도 했는데, 이 모두가 황희의 뛰어난 능력과 사람됨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태종은 황희가 특별한 지위를 이용하여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인물이 결코 아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황희는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관리로서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 많은 공훈(功勳)을 세웠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황희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이조판서로 있던 태종 재위 18년(서기 1418년)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 지방으로 유배된 것이다. 황희가 유배되던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는데, 이때 황희는 교하가 너무 가까워 징벌의 효과가 약하다는 이유로 귀양지가 남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5년이나 더 머물러야 했다.

 

황희는 세종 재위 4년(서기 1422년) 2월에야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나 경시서 관리로 복직되고 11월에는 의정부 참찬에 중용되는데, 그때 그의 나이 60세였다. 그것은 황희에 대한 태종의 오해가 풀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세종(世宗)의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덕분이었다. 세종은 비록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했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태종은 예전부터 왕권을 탐하지 않고 세종을 잘 보필하여 나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강직한 인물을 물색해 왔는데, 이런 태종의 마음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황희였던 것이다.

 

그 후 황희는 세종 재위 5년(서기 1423년)에 흉년으로 민심이 어지러워진 강원도에 관찰사로 가서 흉흉한 민심을 다스리고 행정을 안정시켰으며, 세종 재위 8년(서기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65세 되던 해인 1427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 해에 사위인 서달이 권력을 남용했다는 죄로 처벌을 받는 과정에서 사건의 심리를 일부러 지연시켰다는 이유로 비난을 사게 된다. 또 태석균(太石鈞)의 죄를 가볍게 다스려 달라고 사헌부(司憲府)에 청탁한 것이 빌미가 되어 탄핵을 받고 사임하지만, 1개월 후에 왕명으로 복직하였다.

 

그해 9월, 모친상으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난 황희는 이후 파주 임진강 주변에 있는 반구정(伴鷗亭)에 칩거하며 지내다가 69세 되던 해에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적지 않은 나이에 관직의 정상에 오른 황희는 그때부터 18년 동안 명재상으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세종을 잘 보필하여 당대를 태평성대(太平聖代)로 이끌었다.

일화님의 댓글

일화 작성일

성품에 대한 많은 일화

 

황희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여름날, 시골길을 지나던 황희는 잠시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때마침 한 농부가 누런 소와 검은 소 두마리를 데리고 일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희는 뙤약볕에서 고생하는 농부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잠시 쉬었다 하라며 말을 건냈다. 농부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황희는 별 뜻 없이 이렇게 물었다.

 

"두마리의 소 중에서 어떤 놈이 더 일을 잘 하오?"

 

그러자 농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황희의 옷소매를 끌고 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황희는 뜬금없는 농부의 태도에 어리둥절했지만, 무슨 곡절이 있겠거니 하고 농부를 따라갔다. 밭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이르자, 농부는 황희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누런 놈은 일도 곧잘 하고 시키는 대로 말도 고분고분 잘 듣는데, 검은 놈은 꾀가 많아 다루기가 힘들답니다."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줄 알고 따라온 황희는 어이가 없어 다시 물었다.

 

"아니 노인장,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된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말씀하시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저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안답니다. 내가 만일 아까 그 놈들 근처에서 이 얘기를 했다면 그 놈들이 다 들었을 것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의 말을 짐승이 알아들으랴 싶지만, 나는 내 집일을 애써 해 주는 그 놈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

 

농부의 사려 깊은 행동에 감동을 받은 황희는 그의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했다고 한다. 그냥 가볍게 흘려 버릴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인생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황희는 공적인 일에는 엄격했으나 개인적으로는 온후하고 자상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관련된 일화로, 하루는 어린 종 둘이 다투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황희와 마주쳤다. 민망해준 그 중 하나가 상대방이 잘못해서 싸움이 벌어졌다고 일렀다. 어린 종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들은 황희는, "그래, 네 말이 옳구나." 하고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자 다른 종은 주인이 상대의 편을 드는 줄 알고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황희는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렇다면 네 말도 맞구나." 하고 둘을 타일러 돌려 보냈다. 이때 방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부인이 타박하기를, "아니, 대감께서는 이 놈도 옳다, 저 놈도 옳다 하시니 어찌 그러십니까? 옳고 그름을 확실히 밝혀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 나라의 정승께서 그리도 사리가 분명치 않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황희는 "맞소. 부인 말씀도 참으로 맞소." 하고 대답하여, 그만 부인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고 한다. 집에서 부리는 어린 종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황희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일화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젊은 시절 깨달은 삶의 자세를 일생 동안 잃지 않고 지켜온 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황희의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일화는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어느 날 황희는 집에 온 손님을 맞아 조촐하게 술상을 차려 놓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 아이 몇명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며 황희의 상투와 수염을 잡아당기고 상 위에 놓인 음식까지 마구 집어 먹는 게 아닌가! 그러나 황희는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고, "아이고, 이놈들 보게. 오냐, 오냐." 하면서, "손님이 계시니 너희들은 나가 놀아라." 하고 아이들을 달래서 내보내고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화를 계속했다. 손님은 내심, '정승 집에서 아이들을 버릇없이 키우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대감께서는 손자들을 굉장히 귀여워하시나 봅니다." 하고 짐짓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황희는 "아까 그 놈들은 우리 집 노비의 자식들인데 나를 아주 잘 따른다네. 결례가 되었다면 미안하이." 하고 대답했다. 황희의 말을 들은 손님은 종의 자식에게까지 친부모처럼 자상한 그의 모습에 진심으로 감복했다고 한다.

 

또 하루는 당대 명필 중의 한사람인 이석형(李石亨)이 황희의 집에 들러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황희가 책 한권을 꺼내 놓고 새로 표지를 만들었으니 제목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석형은 몇번 거절을 하다가 황희가 하도 정중하게 부탁하는지라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제목을 써 주었다. 그런데 조금 후에 한 아이가 방 안으로 들어와 저 혼자 놀다가 방금 이석형이 제목을 써 준 책 위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 이것을 본 황희는 노여운 기색도 없이 아랫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직접 방바닥과 책에 묻은 오줌을 닦았다. 그러고는 아이의 옷을 벗겨 둘둘 말아 아이의 손에 쥐어 주면서, "괜찮아, 괜찮아. 이제 엄마한테 가서 옷을 갈아 입혀 달라고 하거라." 하며 우는 아이를 달래서 내보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석형이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자, 황희는 미안한 개식으로 이석형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방문 밖에서 여종이 황망한 목소리로 죄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황희의 방에서 오줌을 싼 아이는 제 어미가 일하는 틈에 그 방으로 들어온 종의 아이였던 것이다. 황희는 사죄하는 여종에게 오히려, "철없는 아이가 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 하고 따뜻한 말투로 위로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석형은 황희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져 그의 앞에서는 항상 머리를 숙이고 예를 다했다고 한다.

 

사실 황희는 천인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천역(賤役)을 가볍게 해 주려는 방안에 골몰하였고, 면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이렇듯 귀천을 따지지 않고 타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 시대의 일반적인 양반들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황희는 당시 노비 출신 중에서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관직에 발탁하기도 했는데, 조선이 업격한 신분제 사회였음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던 것이다.

 

실제로 황희는 자기 집에서 부리던 어린 노비가 학문에 자질을 보이자, 그 아이를 면천시키고 경제적 도움까지 주면서 이르기를, "너는 열심히 공부하면 나라의 기둥이 될 수 있으니, 너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학문을 연마하여라. 그리고 지금부터 너와 나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니, 나중에 혹 만나게 되더라도 절대 아는 체를 하면 아니 된다." 하고 다짐을 하여 내보냈다.

 

십 수년 후, 그 노비는 과거를 보러 나왔다가 마침 그곳에 시험관으로 나와 있던 황희와 만났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서 황희에게 자신을 밝히고 인사를 하려고 하자, 그를 알아본 황희는 시험관에게 잘 보이려고 인사를 하는 것은 받아 줄 수 없다면서 그를 꾸짖고 뿌리쳐 버렸다. 이것은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의 10년 공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황희의 깊은 뜻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노비 출신의 젊은 선비는 시험에 급제하였으며, 황희는 그를 다로 불러내어 "다시는 나를 아는 체하지 말 것이며, 나도 너를 잊었노라. 그러니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정진하여 오로지 나라를 위한 일에 노력을 다하라." 하고 거듭 당부한 후 돌려보냈다고 한다.

 

사적으로는 항상 타인을 배려하는 자세로 일과했던 황희였지만 공적인 일에서는 엄격하기가 서릿발 같았다.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대호(大虎)'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김종서(金宗瑞)가 북방에 6진을 개척한 공로로 병조판서에 오르자, 어느 날 황희는 김종서를 축하하러 병조에 들었다. 그런데 김종서는 황희를 보고도 그냥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김종서가 미처 자신을 못 본 것인지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그의 태도에는 자만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에 황희는 김종서를 수행하던 병조의 관리들에게 "너희 판서께서 앉아 계신 의자의 다리가 잘못된 것 같다. 한쪽이 기울어졌으니 속히 고쳐 드리도록 해라." 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 말을 들은 김종서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서는 황희의 발 앞에 엎드려 "소인이 미처 대감께서 오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라옵니다." 하고 사죄하였다. 사실 김종서보다 먼저 북방을 살피고 돌아온 사람은 칠순에 가까운 황희였으며 세종에게 6진 개척의 적임자로 김종서를 추천한 것도 바로 황희였다. 황희는 김종서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그릇임을 알고 그를 중용하도록 건의하였으나, 김종서의 성격이 다소 거칠고 자신감이 지나친 것을 경계하기 위해 한바탕 혼을 내 준 것이다. 김종서는 훗날 이때의 일에 대하여, "내가 한창 북방을 경영할 때는 오랑캐의 화살이 코앞에 날아와도 두렵지 않았는데, 영상(領相)이 큰소리로 꾸짖었을 때에는 오금이 저리고 등에서 진땀이 다 흘렀다." 하고 회고하였다 한다.

업무 자세님의 댓글

업무 자세 작성일

원칙에 충실한 업무 자세

 

큰일이 닥쳤을 때 개인의 사욕을 버리고 당당하게 맞서는 공직자로서 황희의 참모습을 보여준 두가지 일화가 있다. 먼저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제거한 사건이다.

 

태종의 왕후 민씨(閔氏)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도록 내조한 동지이자 이를 뒷받침한 1등 공로자였다. 제1차 왕자의 정변 때에 병장기(兵仗器)를 숨겨 놓았다가 내 준 것도 민씨였고, 우물쭈물하는 남편을 말에 태워 거사에 내몬 것도 그였다고 한다. 그러나 민씨는 이방원(李芳遠) 못지 않은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부부 간의 갈등이 매우 심했다. 특히 민무구, 민무질이 누이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후광을 등에 업고 조정에 갈등을 일으키자 이것이 큰 문젯거리가 되었다. 당시 형조판서로 있던 황희는 1408년에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국왕에게 올렸는데, 이것은 원경왕후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고 세자 또한 어려서부터 외갓집에서 자란 탓인지 외숙부들을 따르는 상황이라,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감히 앞장설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외척의 폐단을 걱정하던 태종의 심중과 조정의 인심이 이미 민씨 형제를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삭탈관직된 후 유배지에서 사사되고 만다.

 

또 하나의 사건은 황희의 정치적 생명이 끝날 뻔했던 폐세자(廢世子) 사건이다. 세자 제(堤)는 파행을 일삼아 아버지 태종의 미움을 사서 결국에는 폐세자되고 마는데, 이때 황희는 세자를 폐하는 것은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극구 반대하였다. 황희가 내세운 반대의 논리는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건국 초에 태조가 세자를 잘못 세워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비극을 초래한 것처럼 세자를 바꾸는 것은 공연한 화를 자초할 수 있으며, 태종 자신도 그것으로 피해를 보지 않았느냐는 지적이고, 둘째는 지금부터라도 적장자 승계의 전통을 엄정히 세워 나가야 향후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발생할 수 있는 말썽을 차단하는 본보기가 되어 국가 백년대계의 기틀을 튼튼히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세자가 아직 나이가 어리나 근본이 영리하고 총명하니 제대로 훈육한다면 충분히 군왕의 자질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결심이 워낙 확고하여 결국 세자는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바뀌였고, 황희는 좌천되거나 유배되고 만다.

 

이러한 황희의 곧고 바른 자세는 그에게 다소 거리감을 느끼던 사대부들조차 그를 완전히 인정하도록 하였다. 훗날 세종이 궐 안에 불당(佛堂)을 세우려고 했을 때, 모든 신하들과 유학자들이 동맹 파업까지 하면서 반대하자, 황희가 나서서 그들 모두를 설득해 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은 원래 척불숭유(斥佛崇儒) 정책을 통치이념으로 하고 출발한 유교 국가였다. 하지만 왕실에서는 태조 이래로 불교를 믿어 왔고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불가에 귀의한 몸이었다. 세종 또한 불교에 대한 신앙이 매우 깊어 대궐 안에 왕실 가족들을 위한 불당을 지으려고 한 것인데, 모든 신하와 유학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반대를 한 것이다. 성군으로 이름난 세종도 신하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서자 몹시 낙심했다.

 

이때 황희 역시 유학자였지만, 그러한 세종의 마음을 이해하고 반대하는 신하들을 설득하는 일에 나섰던 것이다. 세종이 국가 정책 자체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의 신앙을 위해 불당을 지으려는 것이므로 굳이 국왕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이해해 주자는 것으로, 큰일에는 엄정하지만 사사로운 일에는 너그러운 황희의 성품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장구치고북치고님의 댓글

장구치고북치고 작성일

장구치고북치고 있나요
산은산 물은물 자연산  아멘,관세음보살
자기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

하단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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