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선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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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치인 댓글 1건 조회 925회 작성일 10-01-06 08:17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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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와 절개님의 댓글
지조와 절개 작성일
지조와 절개는 선비의 징표
선비들이 가장 가치 있게 여겼던 것은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이념이었다. 이 일관성은 세력에 따라 변화하는 기회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선비의 지조와 절개는 선비로서의 징표와 같은 것이었다.
그밖에 여러 가지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주목받는 것은 학행일치(學行一致)의 방향성이다. 선비들은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길 때 비로소 그 배움이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천 단계에서 가장 중요시 되던 것이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이었다.
그러나 의리를 지키되 인정(人情)과 조화시키려 애를 썼다. 의리만을 따지면 세상살이가 삭막하기 쉽다. 인정만을 베풀면 기준이 없이 혼란스러워지므로 의리와 인정을 적절히 조화시켜야 한다는 균형감을 중시했다.
청백리(淸白吏)는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반대어로 사대부의 이상적인 역할 모델이었다. 청백리는 국가적인 포상의 대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높이 평가받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청백리로 선발되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가문의 영광이요, 자손까지 국가의 특전을 받았다.
지금까지 기록을 종합해 보면 청백리의 수는 160여 명이다. 장관급인 판서가 30여 명으로 가장 많고, 그중에서도 인사담당인 이조판서가 가장 많았다. 그 외에 영의정이 13명, 좌의정이 7명, 우의정이 3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시대로 평가받고 있는 세종시대는 청백리를 가장 많이 배출한 시대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인물로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유관(柳寬)을 들 수 있다. 이 세 사람은 우정이 돈독한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비슷한 성향을 보이며, 세종의 태평성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은 조선시대 지식인인 선비는 단순한 지식종사자가 아니라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실천을 통해 국가사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로 청빈(淸貧), 청백리(淸白吏), 청직(淸職), 청의(淸議), 청류(淸流) 등의 단어에서 보듯 깨끗함에 큰 가치를 두었으며, 선비정신을 맑음의 정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