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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혼돈 - 법치주의와 준법의무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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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윤재 댓글 0건 조회 750회 작성일 09-11-2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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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논술 가이드]법치주의와 준법의무의 관계 최윤재| 서울디지털대학 문창학부 교수·한국논리논술연구소장 klogica@hanmail.net
출처 :
경향신문
  •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이 언어를 지배한다고 믿지만, 실상 언어가 지성에 반작용해 지성을 움직이는 일도 있다.” 언어가 인간의 지성에 오류와 잘못된 편견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경계한 말이다. 20세기에는 언어가 아예 ‘사유의 집’으로 격상된다. 언어가 없으면 사유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 언어가 올바르지 못하다면 어떨까. 올바른 사유가 불가능할 것이고 그에 기초한 실천도 올바르지 못할 것이다.

    현대 국가는 고도의 상징 질서의 복합체다. 상징의 많은 부분은 매우 추상적이지만 엄밀한 개념으로 채워져 있다. 그 개념들은 보편성을 취하고 있지만 상당 부분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국가의 근본 질서와 원리에 관한 것일수록 그 역사성이 더욱 깊다. 따라서 상징 질서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현재의 언어적 습관과 용법만을 살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시장, 자유, 평등,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 복지 등 수많은 개념이 그런 예에 해당한다. 이런 개념들의 역사적 기원과 그때의 의의만을 고집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를 무시하는 몰역사성은 더 큰 문제다.

    이렇게 언어와 사유의 관계, 상징 질서까지 들먹이는 이유는 이명박 정부 들어 강조되고 있는 소위 ‘법치주의’ 때문이다. 근대 민주주의의 역사에 관한 상식적 수준의 식견만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법치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근대 입헌 국가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최대의 적은 왕으로 대변되는 국가권력의 자의적 권력 행사였다. 이를 막기 위해 권력 분립이 요구되었고, 인민의 대의기관이 만든 법에 따라 권력이 행사돼야 한다는 법치주의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과거 권력의 자의적 지배에 견주어 법치주의를 ‘법의 지배’라고 일컫는 까닭이다. 이것은 일반 인민의 준법의무와는 성격이 다르다.

준법의무는 민주주의의 원리상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는 것에 해당한다(인민의 대표자가 만든 법은 곧 인민 스스로가 한 약속이나 매한가지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 법치주의는 인민이 권력 담당자에게 권한 행사를 엄격히 법에 따라 행할 것을 강제하는 것이다. 또 준법의무는 법이 요구하는 것에만 국한된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 법은 아무런 간섭을 하지 못한다. 반면에 국가 권력은 오로지 법이 규정한 범위 내에서만 그 권한을 행사하므로 법치주의는 최대한의 성격을 지닌다. 달리 말해서 그 범위를 넘어선 권한 행사는 법치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다.

위정자가 인민에 대해서 법을 준수할 걸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법치주의라고 하는 것은 명백히 개념 혼동이다. 단순히 언어적 혼동에 그치는 것이라면 크게 문제삼지 않아도 될 터이지만, 법치주의가 곧 인민의 준법의무라는 말이 고착화되면 법치주의의 본래 의미와 가치가 훼손되거나 증발될 수 있다. 이런 혼동은 법치주의에 관한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킨다. 국가권력의 법치주의 위반을 일반 인민의 준법의무 위반과 같은 정도로 보거나, 사소한 것으로 간과해버리게 만들어 버린다. 또 이것은 위정자 혹은 국가권력으로 하여금 법치주의는 인민의 몫으로 오인하게 해서 스스로 법 위에 서서 군림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한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씌워왔던 굴레를 벗어던지고 고삐를 뽑아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최근 국가권력의 여러 행태를 보면 과연 우리나라에 법치주의 원리가 작동이나 하고 있는지, 그런 원리가 규범으로 인식되고나 있는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법치주의의 위배니 실종이니 하는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이 모두가 준법의무와 법치주의를 등치시킨 효과요, 그 결과로 보인다.

잘못된 언어의 사용은 그 폐해가 이렇듯 심대할 수 있다. 올바르지 못한 언어 사용은, 비록 그것이 의도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용자로 하여금 올바른 사유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나아가 그릇된 실천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 조심스러워야 한다. 특히 다수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잘못된 언어 사용이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지도자는 공동체의 체제나 원리·원칙과 관련된 언어(개념)일수록 그 역사적 배경과 의미, 의의를 깊이 인식하고 그 바탕 위에서 현실의 문제를 접목시켜 해결책을 찾을 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아니하고 얄팍한 상식이나 편견에 기초해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언어를 사용할 때, 이제까지 이룩해온 기본적 가치와 원리가 하루아침에 붕괴할 수 있음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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