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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일이 생겼는지 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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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슨일 댓글 0건 조회 1,913회 작성일 09-10-2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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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읽으며 자란 책으로 '한국의 위인'이라는 12권짜리 전집이 있었다.

한 권에 열명 정도 위인의 행적을 시대별로 기술한 것인데 요새 같으면 한 명에 한 권은 됨직한 수준으로 꽤 문학적이면서도 균형감각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책이다.

경지사라는 출판사에서 1972년에 발간한 것인데 그해에는 우수도서로 지정되기도 했었고 사학자 이기백, 아동문학가 이원수, 미술사가 최순우 같은 분들이 서문을 쓰고 신지식, 신현득, 장욱순, 이종기 같은 분들이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진실과 정의가 단일한 길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이 위인들의 역사는 읽을 것이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줄잡아 수십번은 읽었고 나에게는 친한 친구이며 귀한 선생이었다.

예를 들면 청나라의 침입으로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 항복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싸움을 해야한다는 주전론자 김상헌과 화친을 해야한다는 주화론자 최명길은 모두 충신이었다.

쇄국정책으로 변화를 거부한 대원군이나 개화를 위해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이나 모두 충신이었다.

이기일원론인지 이기이원론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퇴계와 이율곡은 모두 뛰어난 학자였고 김부식은 정지상을 질투하여 부당하게 정지상을 처형했지만 이들 모두 대단한 문장가였고 시인이었다.

묘청과 허균은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였지만 이들의 반란에는 명분과 대의가 있었고 이들의 실패는 안타깝고 절망적이었다. 요컨대 이들 또한 위대했다.

그러나 별이 떨어지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꿈을 꾸고 집안에 향기가 감돌고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이 노한 듯 벼락이 치고 위인들의 탄생과 죽음은 늘 뭔가 신이한 현상을 동반하였다. 평범한 중에도 특히 평범했던 나에게 '위인'의 세계는 뭔가 초월적이고 특별한, 인간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이었다. 신이하고 비범한 영웅들, 위인들의 세계는 교육적이기보다는 문학적, 설화적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이들의 세계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사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건이었다. 어떤 위인이 사망하게 되었을 때의 날씨를 기술한 짧은 구절이 있었다. 한 위대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고 가을비가 내리고 흔치 않은 가을벼락이 크고 잦게 울려 하늘도 애통해하고 분노하는 듯했다는 것이다.

천둥번개가 치고 비는 내리고 위대한 영웅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난다는 이미지상투적이지만 드라마틱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흔치 않은'이라는 수사였다. 가을에는 벼락이 흔치 않던가? 어느 해인가 가을, 벼락이 몹시 쳤다. 날씨에 따라 천기를 읽으려는 옛날 일관이라도 된 양 나는 흔치 않은 가을벼락이 왜 이리 치는가하고 염려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종종 그런 걱정을 해야했다.

그리고 어느 해인가 깨달았다. 우리나라 날씨를 지배하는 기단이 바뀌는 환절기,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치는 일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늦가을 비가 잦은 것을 가을장마라고 부른다는 것도 곧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토록 위인들을 비범하게 만들었던 많은 수사들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그들이 위대한 것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기 때문도 아니고 비범한 태몽을 꾸었기 때문도 아니며 하늘이 비를 뿌려 그들의 죽음을 슬퍼했기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범하고 특별하고 신이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기술'되는 위인의 세계에서 어쩌면 진짜 비범하고 특별한 것은 '수사'뿐인지도 모른다.

위대하다는 것은 결국 기록자의 가치판단에 따른 것이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 지배자의 기록이다. 아니 지배자가 하는 일이 곧 기록을 독점하는 것이다.

말을 독점하고 문자를 독점하고 교육을 독점하고. 생각해보면 오늘의 위정자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언론을 독점하고 반대자를 몰아내고 빈부격차는 바로 교육의 차별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다행한 것은 이제 기록이 특정 계급에 독점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기록하고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오직 우리 자신만이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이 고식적이고 안이한 선전과 변명, 통계와 숫자놀음을 넘어서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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