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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젠다 댓글 0건 조회 689회 작성일 09-02-2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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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조지 부시라는 개인의 성향 때문인가 아니면 미국의 자본주의 때문인가? 이 질문에 전자로 대답하는 사람은 후자로 대답하는 사람보다 더 보수적일 확률이 높다. '미네르바'로 알려진 네티즌을 구속한 것은 해당 검사 나름의 법률적 판단이었다고 보는가 아니면 정권 차원의 지시 또는 이심전심이 있었으리라고 보는가? 이에 대해 후자로 답한다면 전자로 답하는 사람보다 진보적인 성향을 가질 확률이 높다.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어떤 사회적 사태의 원인을 개인 차원에서 설명하는 경향이 높고,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 범죄를 범죄자의 개인적 특질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경향이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높은 반면에,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회경제적 환경이 범죄자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

미네르바의 글이 전체적으로 보수파 이명박 정권에게 비판적이었고 아울러 그 정권이 미네르바를 구속했다는 사실을 접어두고, 단지 한국 외환시장이 일개 네티즌의 글 때문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느냐고만 묻더라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보다는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에게서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할 확률이 높다. 한국의 경제 성장에서 박정희가 수행한 역할을 평가할 때에도 그렇듯이, 진보적인 사고에서는 역사 진행에 미친 개인의 영향력을 낮춰 잡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보수적인 사고에서는 높게 잡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보수와 진보를 구분할 수 있는 한 가지 그럴듯한 척도는 주어진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서 찾느냐 아니면 사회에서 찾느냐이다. 진보는 보수보다 대체로 사회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보며, 따라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접근하는 태도를 미봉책일 뿐이라고 불만스럽게 여긴다. 진보적 성향은 이처럼 사회를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조를 함축하는데,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요소들을 척결해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사회 질서를 개편함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첫눈에 상당히 매력적인 생각으로 보인다. 합리성, 즉 이치라는 것이 하나 있어서 만사에 똑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고, 따라서 모든 사회 문제를 이치가 알려주는 정답으로써 해결하면 전쟁, 권력 투쟁, 음모, 범죄, 불평등, 폭동, 빈곤, 등등, 사회악이 전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대부분 사라질 수 있을 듯하다. 서양 근대의 초기, 수학적 원리를 통해 자연계의 비밀을 풀어나가는 자연과학의 일대 혁명을 보면서 찬탄을 금치 못한 지식인들은 사회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식의 접근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사회의 문제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무지나 착각, 아집이나 집착 등, 비합리적인 감정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와 같은 미망에서 벗어나 계몽의 밝은 빛으로 들어오면 정치나 경제와 같은 사회적 현상들도 획기적으로 향상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계몽주의는 자유주의를 낳았고, 이어서 사회주의도 같은 바탕에서 잉태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합리성으로써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정치 현실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첫인상과는 달리 많은 난제들을 내포하고 있음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보다 자세하고 본격적인 논의는 나중에 제3부에서 다시 시도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요점만을 간략하게 제시한다.

첫째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한 시각에서 보면 이치에 어긋난다고 보이는 것이 사실은 불합리가 아니라 단지 다른 종류의 이치인 경우가 대단히 많다. 말다툼만 보면 바로 전쟁을 연상하는 시각에서는 당쟁이 극도로 불합리하게 비치겠지만,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당연하다고 보면서 폭력 투쟁과 논쟁을 분별하는 시각에서 보면 정당의 분화는 지극히 합리적인 일이 된다. 새만금 간척 사업,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한 자유무역 논쟁, 언론 관계법 개정과 재개정을 둘러싸고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몸싸움을 불사하게 만드는 쟁점, 등등은 서로 다른 정치적 가치관 사이의 경합인 만큼이나 합리성이 무엇인지에 관해 서로 다른 입장들이 부딪친 결과인 것이다.

둘째, 통상적인 언어의 용례에서 이치 또는 합리성이란 감정이나 의지 또는 사회의 전통이나 관습과는 구분되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그 연원을 깊게 파고 들어가다 보면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자연과학의 경우에도 천동설을 믿던 시대의 합리성과 지동설이 득세한 이후의 합리성은 똑같지 않다. 뉴턴 물리학에서 신봉되던 합리성은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의 물리학에 의해서 일부가 무너지고 새로운 합리성이 그 자리를 메웠다. 나노 세계는 인간의 감각 능력을 바탕으로 구성된 세계에 관한 인식틀에서 벗어나는 세계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합리성이 적용되어야 한다.

하물며 정치나 도덕, 경제나 문화의 세계에서 합리성이 전통 및 관습과 모종의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다지 깊게까지 파고들 필요조차 없다. 조선시대에 여성 참정권이란 불합리는 고사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지금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말자고 한다면 얼빠진 소리가 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항일투쟁과 같은 전시에는 폭력의 사용이 오히려 합리적이지만, 평상시에는 폭력이야말로 합리성의 부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징표에 가깝다.

미국 보수파의 "법과 질서"를 흉내 내서 이명박 정권이 도처에서 발동하는 강제력을 한 쪽에서는 합리적이라고 보는 반면에, 다른 한 쪽에서는 합리의 정반대라고 본다. 이처럼 정치적 도덕적 합리성이란 각 개인이 어떤 문화, 사회, 시대, 진영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면이 다분히 많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주변에 아무런 질서도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합리성과 집단적 의지 및 전통 사이의 연관을 부각함으로써 내가 말하려는 뜻은 이치라는 것이 문화적 배경을 초월할 수 없다는 데에 그치지, 무분별한 상대주의 또는 가치 허무주의를 옹호하는 데에 있지 않다.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이라고 분별해서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사회생활이란 무수하게 다양한 국면과 양상과 맥락들로 구성된다. 그 가운데 일부에서는 합리성의 기준이 비교적 명확하게 정형화되어 정착되어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국면과 맥락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합리성의 기준이 정착되지 못한 곳이라면 그만큼 그 기준을 둘러싸고 정치적 경쟁이 발생할 소지가 높은 것이고, 합리성의 기준이 정착되어 있는 곳이라면 하나의 관습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지 않고 있는 상태임을 말한다.

하지만 전자의 국면이 후자의 국면보다 반드시 더 잘못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합리성에 관해 서로 다른 여러 관념들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교차하면서 병존함으로써, 혼란이나 붕괴를 초래하기 보다는 오히려 문화적 풍요를 창출할 수도 있다. 특히 19세기 이후 음악이나 미술, 영화 분야의 역사 전개가 그러하고, 20세기 후반 이래의 정치 이념이 또한 그러하다. 히틀러나 스탈린, 김일성 체제 등에서 권력에 의해서 재단된 합리성이 사회 구성원들의 사유와 상상력을 얼마나 획일화했는지를 고려해보면, 합리성의 기준이 사회적으로 통일되어 정형화된 상태가 반드시 건강한 것만도 아니다. 어쨌든 이 주변에는 수많은 갈래의 쟁점과 혼동들이 얽혀있는 바, 그에 대한 자세한 해명은 제3부에서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시도해 볼 것이다.


일단 여기서는 합리성이 정치를 초월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합리성이라는 개념의 내용 및 명찰과 관련해서 논쟁이 발생하면, 그런 논쟁은 모두 정치의 문제 그 자체로 비화할 잠재력을 항상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 점이 충분히 인식되어 있지 못한데, 그 때문에 획일주의적인 권력 숭배가 애국심이나 국가주의 또는 민족주의의 형태로 발호할 수 있는 여지가 대단히 넓다.

예컨대 세종대왕은 군주정 시대의 한 영웅 정도가 아니라 민족사의 영웅으로 여겨져서, 노무현도 이명박도 공히 찬양한다. 세종이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 전략적 사고를 할 줄 알았고, 한 사람의 권력자로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적이었으며, 다방면에 높은 소양을 가진 지성인으로서 대단히 많은 성취를 이뤘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어린이를 위한 위인전을 기획한다고 할 때 정치인 가운데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 틀림없다. 그러나 세종을 현대 정치인의 모범으로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는 군주이고 현대는 군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당 사이의 경쟁 자체를 죄악시하던 시대, 정부에 대한 비판이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던 시대, 인민을 주권자가 아니라 단지 "어린 백성"으로 치부하던 시대의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을 숭상하는 마음 안에는 계몽적 전제를 그리워하는 정치의식이 자연스럽게 틈입해서 똬리를 틀 수밖에 없고, 그러한 심성은 박정희 식 개발독재를 거부해야 할 이유를 식별할 수 있는 시야를 가로막고 만다. 재벌기업 경영자 출신 이명박이 서민들에게 인기를 끌고, 경기고와 서울 법대를 나와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이회창을 대졸 이상 계층보다 중졸 이하 계층에서 더 많이 지지했던 현상도 같은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요소들이 "잘나고 똑똑한" 사람의 획일적인 기준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합리성의 기준이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언어의 덮개 밑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생각이 막연한 상태에 머무른다는 지표에 해당한다. 동시에 합리성의 내용에 관한 숱한 논쟁의 여지들을 감당하기에는 사유 능력의 힘이 부친다는 지표에 해당한다. 나아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정치사회란 무엇보다 획일적인 질서를 가져야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기 쉽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논쟁과 갈등을 그 자체로 위험하다고 보아 백안시함으로써, 건강한 공론을 통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할 기회가 싹도 트지 못하고 봉쇄되기 쉽다. 따라서 합리성의 본질에 관해 조금이나마 성찰을 해보지 않고, 단지 주변에 퍼져 있는 생각을 합리적이거니 받아들이는 태도는 가장 우려할 만한 형태의 권력숭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국 정치 발전의 현단계에서 이와 같은 상황은 진보파에게 특별히 불리하다. 민주화라는 구호는 1960년 4월 혁명부터 1987년까지 나름대로 의미도 있었고 효과도 있었지만,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과거에 탄압을 받던 소수파 김대중과 노무현이 1997년과 2002년에 집권함으로써 정치적인 현안의 지위를 상실했다. 평화적 정권 교체라는 염원이 일단 선거의 형식적 제도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소임을 다하고 염원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물론 사회생활의 도처에서 은밀하게 저질러지는 불의, 배임, 폭력, 전횡 등은 아직도 두껍게 남아있지만, 이런 것들은 얼핏 국지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보이기 때문에, 중앙정부를 어느 편에서 장악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논쟁에서 일반 유권자들에게 직접적인 호소력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국 진보 세력이 어젠다를 상실했다고 진단하면서 진보의 위기를 말한다.

한국 진보 세력이 어젠다를 상실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들은 또한 노무현 정권이 담론 투쟁에서 패배한 이유와 상당부분 겹친다. 진보 진영의 어젠다가 정교하지도 치밀하지도 못하다는 비판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 나는 이 연재에서 한걸음을 더 나아가 진보 진영이 가짜 문제와 진짜 문제를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아울러 가짜 문제와 진짜 문제를 분별하지 못하는 데에는 정치와 사회와 도덕과 가치에 관한 사유의 근본적인 프레임이 어떤 고정관념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 고정관념들은 우리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공유되는 것들이지만, 그 성격 자체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며, 실제에 있어서도 진보 진영의 정치의식이 새롭고 즐거운 상상력으로 충전되는 길을 철저히 가로막고 있다. 이 책에서 내가 특정해서 비판하려는 고정관념은 합리주의, 선험주의, 민족주의로, 각각 제3, 4, 5부에서 다룰 것이다. 그리고 가짜 문제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지역주의를 들어서 제2부에서 논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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